19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게 피살된 궁정동 안가(출처 : 하성환))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게 피살된 궁정동 안가(출처 : 하성환))

1979년 10⬝26 유신의 핵이 제거되기 직전 가을로 기억한다. 여느 때처럼 캠퍼스 풍경은 메마르고 스산했다. 강의가 없는 빈 시간에 도서관에서 책을 읽다 갑자기 소란스러운 소리에 창밖을 내다보았다. 중앙도서관에서 내려다본 장면은 충격이었다. 학생회관 옥상에서 사복경찰이 시위 주동 학생을 마구 구타하고 축 늘어질 때까지 발로 지근지근 밟고 있었다. 그 순간 그 모습을 도서관에서 함께 쳐다보던 어떤 여학생이 “개**들”이라며 분노했다.

유인물이 흩뿌려지고 학생들이 학생회관 주위로 몰려들기도 전에 사복 경찰들에 의해 순식간에 제압당했다. 80년대 초 대학가 풍경은 도서관 귀퉁이든 어디든 캠퍼스 곳곳에 사복 경찰들이 깔려 있었다. 학교 정문 옆 수위실엔 항상 경찰이 오가는 학생들을 감시했다. 대학 행정실엔 정보기관원들이 상주하거나 수시로 드나들었다. 그때를 돌이켜보면 그 시절 대학은 대학이 아니었다.

또 어느 날은 교내 시위가 한창 진행돼 사방으로 유인물이 흩뿌려지고 반독재 민주화를 촉구하는 구호가 들렸다. 그러자 순식간에 최루탄이 터지고 집회에 모였던 학우들은 쏜살같이 흩어졌다. 70년대 말 80년대 초 교내 집회 당시엔 시위를 주도한 학생은 퇴학이었다.

70년대 10년 동안 유신의 핵이 제거될 때까지 전국 대학에서 무려 600명이 넘는 학생들이 퇴학당했다. 물론 퇴학으로 끝나지 않고 그대로 구속돼 감옥에 갇힌 학생들 또한 수없이 많았다. 집회 시위 현장에서 체포된 학생들은 바로 학교 근처 전경대로 연행돼 곤욕을 치렀다. 누구는 무기정학, 유기정학을 당하고 누구는 학적변동자로 분류돼 강제로 군대에 끌려갔다.

그런 엄혹한 시절, 글쓴이는 학교에 가기보다 야학에 가는 걸 좋아했다. 교련 과목을 비롯해 전공과목이 F학점이 나왔다. 이번 학기는 학사경고였다. 학군단 장교는 학적변동자로 분류해 군대 입대시킨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학교에 가서 배우는 게 별로 없었던 시절이었다. 80년도엔 중간고사와 기말고사를 치러 학교에 간 것 빼곤 강의실에 거의 들어가질 않았다.

전두환 정치군인들이 활개 치던 1980년도 1학기엔 휴교령이 떨어져 대부분 학교에 갈 수 없었다. 탱크를 앞세워 착검한 공수부대가 대학 정문을 지키고 있던 시절이었다. 2학기엔 광주 학살 원흉들이 권력의 정점에 섰던 살벌한 시절이라 학교 캠퍼스조차 너무 살풍경해서 학교에 애착이 없었다. 캠퍼스 잔디엔 사복 전경들이 노닥거리다 지나가는 여학생을 희롱하는 사건도 발생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어디선가 교내 시위가 시작되고 최루가스가 난무했다. 무작정 쫓기는 시위대와 경찰의 최루가스를 피해 중앙도서관 옆쪽으로 내달렸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최루가스가 중앙도서관과 카페 사이로 자욱하게 퍼져갔다. 학생들은 어찌할 줄 모르고 빠르게 인문대 쪽으로 달음박질을 쳤다.

글쓴이도 허둥대며 최루가스를 피해 중앙도서관과 카페 사이를 냅다 뛰었다. 그러던 순간, 중앙도서관 유리창 하나 사이로 공부하는 학생들 모습을 보았다.  도서관 유리창 하나 사이로 운명이 갈리는 느낌이었다. 한참 시간이 흐르고 사복 경찰 몇 명이 인문대 쪽에서 학교 본관 방향으로 시위학생 한 명을 질질 끌고 가고 있었다. 상황이 종료되고 글쓴이는 도서관 방향으로 다시 내려오다 야학 선배와 마주쳤다.

그 선배는 글쓴이를 야학으로 이끈 대학 선배이자 고등학교 선배다. 그 선배는 아직 최루가스가 남아 있는 잔디 위로 갑자기 벌렁 드러누웠다. 그리곤 글쓴이를 쳐다보며 말을 걸었다. “성환아, 공부하는 건 죄가 아니지?” 그 말을 듣는 순간 멍멍했다.

“공부하는 게 죄라니!” 아마 그 선배도 70~80년대 대학 캠퍼스 풍경이 고통스러웠던 것 같다. 그래서 후배인 글쓴이에게 갑자기 그런 질문을 툭 던지며 스스로를 위로 받고 싶었던 듯했다. ‘공부하는 게 죄스러운 세상’이 될 만큼, 당시 시대 상황은 엄혹하다 못해 참혹했다. 80년 광주시민을 학살하고 등장한 정치군인들이 통치하던 그 시절! 정의감 넘치는 순수한 영혼을 간직한 수많은 청년 학생들은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자책하며 번민했고 좌절했다. 세상과 담을 쌓고 편하게 공부하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70~80년대는 그런 시절이었다.

멀리 시골에서 어렵게 보내 준 돈으로 대학 생활을 하면서 시위에 참여해야 하는지 아니면 눈을 꾹 감고 부모님 원하시는 고시 공부를 해야 하는지, 그것도 아니면 한 발을 뺀 채, 그냥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무덤덤히 학과 공부를 해야 하는지 선택을 해야 했다.

그리곤 저녁마다 야학에서 어린 노동자들을 만났다. 야학에서 만나는 어린 노동자들을 볼 때마다 그 제자들이 살아가는 우리 사회현실에 조금은, 아니 적잖이 미안한 마음이랄까 부채의식을 가졌다. 부모 잘 만나서 대학까지 다니는 글쓴이와 달리, 검정고시 야학에 오는 어린 노동자들은 한결같이 불우한 청소년들이었다. 어린 나이에 정규 중학교는커녕 공장에서 일하거나 구두닦이를 하며 생계에 보탬을 줘야 하는 10대 청소년들을 보며 이런저런 생각들로 마음이 편치 않았다. 대학생이 된 자신이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부끄럽다고 해야 할까 그런 묘한 기분이었다.

87년 6월 민주 항쟁을 촉발시킨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자행된 남영동 대공분실(현재 민주인권기념관) 509호 조사실  전경(출처 : 하성환) 박종철 군은 직접 노동운동에 뛰어들기 전 노동자의 삶을 경험하기 위해  소규모 영세한 공장에 취업해 노동자로서 삶을 살기도 하였다.
87년 6월 민주 항쟁을 촉발시킨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자행된 남영동 대공분실(현재 민주인권기념관) 509호 조사실 전경(출처 : 하성환) 박종철 군은 직접 노동운동에 뛰어들기 전 노동자의 삶을 경험하기 위해 소규모 영세한 공장에 취업해 노동자로서 삶을 살기도 하였다.

그런 회색인으로 살아가던 글쓴이와 달리, 80년대 열혈 대학생들 가운데엔 적잖이 공장으로 뛰어들었다. 박종철 군처럼 대학생 신분을 박차고 시대가 준 소명 의식에 충실하려고 치열하게 살아갔다. 그 청년 학생들은 부천, 부평 바로 인천으로 가서 노동자 생활을 자처했다.

야학 후배 김**는 어느 날 구파발 성당에서 하던 생활야학 교사 모임에 참석했다. 그 자리에서 당시 우리 야학이 좀 더 노동야학으로 전진하고 변화했으면 하는 마음을 격정적으로 토로했던 기억이 난다. 그 후배는 대학생활을 접고 노동현장으로 가서 노회찬과 함께 노동운동에 헌신했다. 몇 년 전 민주노총 금속노조위원장을 맡아 목동 열병합발전소 굴뚝 위에 올라 고공 농성을 하던 노동자들의 풍찬노숙을 대변하며 열변을 토했다.

구로고 졸업생 가운데 경제학과를 다니다 노동운동을 위해 공장에 취업한 제자가 생각난다. 그 제자는 글쓴이가 학생들을 가르치다 그해 말 군대에 갈 때 고3 신분임에도 구로구청 앞 ‘정다방’에서 글쓴이를 환송해 준 고마운 제자였다. 여리고 순수하며 맑은 영혼을 간직한 참한 제자였다.

89년 해직되고 90년 초로 기억되는 어느 날, 갑자기 쫓기는 신세가 되어 글쓴이 집에 며칠간 숨어 지낸 적이 있었다. 당시 홀트아동복지회 노조위원장이자 야학 후배이던 00경의 도움으로 수배 중 도피 생활을 접고 다시 노동현장으로 뛰어들었다. 지금은 57살이 되어 있을 텐데 잘 살아가고 있는지 여간 궁금한 게 아니다.

공장 활동을 했던 그런 친구 중엔 노회찬과 함께 ‘인민노련’을 조직해 노동운동에 헌신했던 초등학교 친구 임##도 있다. 그 친구는 삼수 끝에 80년 서울대 경제학과를 들어갔지만 시대가 시대인 만큼 노동현장으로 거침없이 뛰어들었다. 구사대에 머리를 심하게 맞아 머리 수술까지 할 만큼 치열하게 그 시대를 살아갔던 친구다. 80년대 노동운동은 노동 현장만큼 거칠고 위험했다.

도량이 넓고 인품이 훌륭해 친구들 사이에 신망이 두터운 그 친구는 지금도 여전히 한국 사회에 깊은 애정을 갖고 직간접적으로 운동에 기여하고 있다. 노회찬 의원이 안타깝게 투신했을 때 그 친구는 거의 제정신이 아닌 듯 한동안 극심한 충격에 휩싸였다. 노회찬 의원이 죽음을 선택하기 며칠 전까지도 서로 연락하는 사이였고 부인들 또한 같이 노동운동을 했던 사이라 서로 연락을 주고받던 관계였으니까 그 정신적 충격이 오죽했으랴!

그런가 하면 77년에 대학을 입학해 97년 늦깎이 화학교사가 된 홍00 선생님도 있다. 그분 역시 부천지역에서 노동자로 공장 생활을 자처했다. 운동 노선은 달랐지만 노회찬 부인 김지선 씨를 잘 알고 있었다. 그 선생님은 언젠가 차를 타고 갈 때 이렇게 고백하듯이 말했다. “하선생, 나는 대학을 가지 말고 그냥 노동자로 살아갈 걸 잘못했어...”

언제나 헌신적이고 훌륭한 인품을 간직했던 그 선생님은 지금 무얼 하고 계실까? 2000년대 중반 경기도 양평으로 이사 간 걸 알고 전교조 조합원 선생님들과 찾아간 적이 있었다.

<전쟁과 여성인권박물관> 외벽에 부착된 평화나비 손편지들(출처 : 하성환)
<전쟁과 여성인권박물관> 외벽에 부착된 평화나비 손편지들(출처 : 하성환)

거기까지 간 김에 경기도 광주 「나눔의 집」에도 들러 지하실에 조성된 일본군 위안부 기념 공간도 둘러보았다. 둘러보는 내내 일본군 위안부 소녀들이 겪었던 참상은 참으로 끔찍했음을 깨달았다. 지금은 정년퇴직하셨을 텐데 무엇을 하고 계실까? 그 선생님이 오늘따라 무척이나 궁금하다.

70~80년대 대학 캠퍼스는 살풍경했다. 캠퍼스 낭만이란 게 없었다. 정의와 불의가 첨예하게 맞부딪치는 형국에서 대학생 낭만을 찾는 게 불가능한 시절이었다. 운동의 최전선에 나설 수 없다면 고작 할 수 있는 게 눈을 질끈 감고 학문에 몰입하거나 학과 공부에 충실한 경우다. 물론 학술 운동하던 사람들은 예외다.

그렇게 선택을 강요받던 시절, 대학 선배가 내뱉은 말처럼 “공부하는 것조차 죄스럽게” 느껴지던 시대분위기에서 그저 맘 편히 공부할 수 있었던 시절만은 아니었다. 글쓴이처럼 경계지대 회색인들은 그 시절을 회상하면 마냥 부끄러움만 남는다.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아니, 후손들에게 그런 시절을 다시는 물려주고 싶지 않다.

편집 :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ethics6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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