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1년 9월 ‘삶터’ 사건과 구로경찰서

1981년 9월 10일은 잊을 수 없는 날이다. 그날 밤늦게까지 교육학과 동기와 서로 생각을 나누었다. 그 친구는 독실한 크리스천이고 졸업 후 신학대학원으로 진학해 목회자가 되었다. 그날 주제는 신의 존재에 대한 이야기였다. 당시엔 다방이 오늘날 카페 구실을 했다. 밤늦은 시각까지 신이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고 발현하는지 각자 자신이 품었던 평소 생각을 주고받았다.

친구와 헤어져 자취방으로 돌아왔을 때 밤 12시 자정이 다 되었다. 누님이 놀란 표정으로 형사들이 찾아왔었다고 전했다. 정보과 형사들은 온종일 나를 뒷조사하고 다녔다. 사범대 행정동에 가서 흔적을 조사했고 강의실을 따라 나를 탐색했다. 결국 그날 자취방 근처에서 내가 올 때까지 잠복했다.

나는 누님 말을 듣고 곧장 밖으로 나갔다. 쪽문을 통해 나가려다 잠복하고 있던 형사들에게 잡혔다. 그리곤 택시에 태워져 연행됐다. 택시에 타자마자 형사들은 내 목덜미를 잡더니만 머리를 바닥에 욱여넣었다. 어디로 끌려가는지 몰랐다. 두려움이 공포로 밀려왔다. 연행된 곳은 남대문경찰서였다. 내가 야학 활동을 했던 공간에서 지근거리에 있는 경찰서다. 순간 지난날 야학 활동이 머리를 스쳐 갔다.

서울역 근처 중구 양동엔 붉은 벽돌집이 많았다. 어느 날 가정 방문 차 야학 제자 집을 찾았다. 그 제자는 서울역 근처에서 구두닦이를 하고 있었다.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어린 나이에 공부하고 싶은 마음은 컸으나 가족 생계를 외면할 수 없었다. 붉은 벽돌집 안은 대낮인데도 너무 어두웠다. 그런 공간에서도 아이들이 뛰어놀고 있었다.

나는 몇 층 올라가 야학 제자가 사는 집을 찾았다. 단칸방마다 방문을 열어젖힌 채 안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오늘날 쪽방촌보다 더 열악한 공간이었다. 사실 서울역 주변 군데군데 보이던 붉은 벽돌집은 창녀들이 기거하던 공간이기도 했다. 층을 올라 걸어가면서 속옷만 걸친 창녀들이 방 안에 있는 모습도 보였다.

야학 제자 어머니가 돌도 지나지 않은 어린아이를 안고 있었다. 제자의 동생이냐고 물었더니 어느 창녀가 낳아 놓고 도망가서 자신이 그냥 키운다고 그랬다.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어머니는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3평 남짓한 방 안에서 아이 포함 8명이 생활한다고 했다. 교도소 독방보다 못한 생활이었다. 1980년대 초 서울역 근처 붉은 벽돌집이 그랬다.

도시에서 주변부로 밀려난 하층민들이 살았던 공간이다. 70년대 발표된 조세희 작가가 쓴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1978)이 떠올랐다. 붉은 벽돌집을 나오면 바로 서울역 앞 거대한 고층 빌딩 ‘대우’건물이 우뚝 서 있었다. 붉은 벽돌과 높은 고층 빌딩! 급속한 산업화와 불평등을 상징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대학 시절은 중고 시절만큼 어두운 풍경이었다. 80년을 전후해 박정희 군부정권이 몰락하고 전두환 군부 정권이 교차하던 시기였으니까 캠퍼스 풍경도 스산함을 넘어 을씨년스러웠다. 학교 강의를 빠진 적이 많았다. 당시엔 출석 점수가 없었다. 도강이나 청강, 그리고 대리출석이 적지 않았던 시절이다. 무엇보다 대학 생활에 흥미가 없었다. 캠퍼스 곳곳엔 사복경찰들이 깔려 있었고 그 모습이 눈에 띌 정도였다. 그 시절 대학가 풍경이 얼마나 메마르고 스산했던지 지금 생각해도 다신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진 않다.

야자 이만규(1888-1978)는 조선 최고의 교육자. 교육사학자이자 조선어학회 활동을 한 국어운동가였다. 그가 일제의 탄압으로 해직되고 감옥에서, 그리고 출소 후 방대한 자료를 수집해 해방공간 출간한 <조선교육사(상, 하)>(을유문화사)는 현재까지 이를 능가한 교육사서가 없을 정도로 출중하다. 대학에서 교직과목으로 시대의 사표! <이만규>를 가르치고 예비교사들을 대상으로 최고의 교육사서 <조선교육사>를 읽어보도록 교육과정에 반영해야 한다.(출처 : 박용규 박사 제공) 부산교대 심성보 교수가  읽기 쉽게 1988년(거름), 2010년(살림터) 두 차례에 걸쳐 재출간하였다.
야자 이만규(1888-1978)는 조선 최고의 교육자. 교육사학자이자 조선어학회 활동을 한 국어운동가였다. 그가 일제의 탄압으로 해직되고 감옥에서, 그리고 출소 후 방대한 자료를 수집해 해방공간 출간한 <조선교육사(상, 하)>(을유문화사)는 현재까지 이를 능가한 교육사서가 없을 정도로 출중하다. 대학에서 교직과목으로 시대의 사표! <이만규>를 가르치고 예비교사들을 대상으로 최고의 교육사서 <조선교육사>를 읽어보도록 교육과정에 반영해야 한다.(출처 : 박용규 박사 제공) 부산교대 심성보 교수가  읽기 쉽게 1988년(거름), 2010년(살림터) 두 차례에 걸쳐 재출간하였다.

무엇보다 그 시절엔 강의를 들어도 별로 가슴에 와닿지 않았다. 한편으론 부모님이 고대하는 고시 공부가 머릿속 한구석을 여전히 맴돌며 죄어왔다. 다른 한편으론 전공 학문에 대한 지적 호기심도 스멀스멀 생겨났다. 대학 2학년 교육사 강의를 들으며 도서관에서 대출받아 읽은 이만규가 쓴 『조선교육사』가 기억에 남는다. 월북한 항일교육자가 쓴 『조선교육사』는 당시 허기진 호기심을 조금은 채워주었다.

사회철학에 대한 지적 호기심으로 철학 강의를 찾아가 들었다. 한국 문학에 대한 강의도 도강해 들었지만 허전한 마음을 채워주질 못했다. 철학사 강의는 내용이 어려웠고 문학 강의는 밋밋하고 틀에 박혀 가난한 영혼을 위로하질 못했다.

어느 날은 강의가 진행되는 도중 최루탄 쏘는 소리와 최루가스가 스며들어 강의가 중단된 적도 있었다. 80년대 초반 전두환 군부정권 시절 얼어붙은 대학 캠퍼스 풍경을 보여주는 단면이다. 그만큼 내 영혼도 쪼그라들어 가난한 상태를 면치 못했다. 캠퍼스에 정이 가지 않았다. 한 마디로 살풍경한 시절이었다.

연행된 뒤 지하 유치장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추석 명절 연휴를 앞두고 어두운 유치장에 갇혀 있다 보니 수만 가지 생각이 엄습했다. 이튿날 서울시경 대공과 형사 두 명이 출장을 나와 나를 다른 방으로 데리고 가서 조사했다. 방에 들어서자 다짜고짜 읽었던 책을 전부 써 보라며 펜을 던지고 겁박했다.

읽었던 책을 생각나는 대로 수십 권을 적었다. 한참을 들여다보던 형사는 막스 베버를 문제 삼았다. 갑자기 이☓☓ 하면서 주먹으로 배를 쳤다. 그러면서 야학 회보를 이리저리 뒤적거렸다. 그리고 내가 쓴 문건에다 빨간 줄을 북북 그으면서 이런 건 북한에서 쓰는 표현이라며 위협했다.

연행된 야학 동료 중엔 새벽 4시에 자다가 끌려온 친구도 있었다. 그 친구는 무자비하게 수십 대를 구타당했다고 했다. 그 친구는 삶터 사건이 종결된 이후 군대에 강제로 끌려갔다. 80년대 강제징집은 그 시절 흔한 풍경이었다. 학내 시위에 참여하다가 연행되면 갑자기 학적 변동돼 강제 징집당했다. 나는 남대문경찰서에서 운 좋게 풀려났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선친께서 여러 경로로 손을 썼던 것 같다.

나는 삶터 사건을 겪은 후, 9월 말쯤 되었을 때 다시 남대문경찰서로 소환됐다. 형사가 사건 종결을 통지하면서 “너 인마! 남영동 갈 뻔했어!”라며 내 뒤 꼭지에 대고 소리쳤다.

1987년 1월 연행된 지 10시간 만에 건강하던 스물두 살 청년 박종철 군이 물고문으로 고통스럽게 죽어간 공간 509호실이 옛 모습 그대로 보존돼 있다.(출처 : 하성환)
1987년 1월 연행된 지 10시간 만에 건강하던 스물두 살 청년 박종철 군이 물고문으로 고통스럽게 죽어간 공간 509호실이 옛 모습 그대로 보존돼 있다.(출처 : 하성환)

87년 1월 박종철 군 물고문 사망 기사를 접하고 남영동이란 말이 떠올라 소스라치게 놀란 적이 있다.

박정희, 전두환 군부정권 시절인 70-80년대 공안사건을 조작하며 인권을 짓밟았던 국가폭력의 상징! 남영동 대공분실은 2005년 경찰청 인권센터로, 그리고 2018년 <민주인권기념관>으로 명칭이 바뀌었다.(출처 : 하성환) 4층이 박종철 군 유품과 어린 시절, 그리고 편지와 사진들이 전시돼 있고 5층 509호실 한 곳만 87년 고문실 원형 그대로 보존돼 있으며 나머지 고문실은 다른 공간으로 변경했다.
박정희, 전두환 군부정권 시절인 70-80년대 공안사건을 조작하며 인권을 짓밟았던 국가폭력의 상징! 남영동 대공분실은 2005년 경찰청 인권센터로, 그리고 2018년 <민주인권기념관>으로 명칭이 바뀌었다.(출처 : 하성환) 4층이 박종철 군 유품과 어린 시절, 그리고 편지와 사진들이 전시돼 있고 5층 509호실 한 곳만 87년 고문실 원형 그대로 보존돼 있으며 나머지 고문실은 다른 공간으로 변경했다.

그때까지 남영동 대공분실의 실체를 몰랐다. 1981년 당시, 야학 친구들은 여러 대학에 속해 있었다. 따라서 여러 대학을 엮어 공안사건으로 조작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그런 사실을 떠올리면 순간 등골이 서늘했다. 그렇게 어두운 기억에서 벗어나 오랜만에 학교에 갔을 때 아무도 내가 그런 일을 겪었는지 물어보던 친구가 없었다. 당시 바깥으로만 돌던 나 자신 때문인지 그 순간은 무척 외로웠다.

그러다가 1984년 3월 구로고등학교로 초임 발령을 받았다. 1학년 담임을 맡고 1학년과 3학년 수업을 들어가던 가을 어느 날, 구로경찰서 정보과로부터 소환을 통보받았다. 순간 움찔했다. 당시에 구로 공단에서 야학교사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형사는 기름이 반질반질하게 흐르는 얼굴로 한 손에 몽둥이를 들고 서 있었다. 몽둥이로 바닥을 둔탁하게 여러 번 치면서 나를 위협했다.

수업 시간 미국을 비판하는 내용을 죄다 쓰라며 겁박했다. 그 순간 81년 가을에 겪었던 ‘삶터 사건’이 떠올랐다. 악몽이 다시 시작되는 느낌이었다. 형사는 심문 시작부터 ‘삶터 사건’을 죄다 알고 있다며 나를 겁주었다. 당시엔 내가 가르치던 국민윤리 교과서에 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이 서술돼 나왔다. 아마도 이를 문제 삼는 것 같아 한껏 졸아 있었다.

그날 밤늦은 시각까지 조사받고 나오면서 한국 사회가 참으로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80년대 그 시절은 ‘공포로 질식된 어둠의 시대’였다.

편집 :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ethics60@naver.com

한겨레신문 주주 되기
한겨레:온 필진 되기
한겨레:온에 기사 올리는 요령

저작권자 © 한겨레:온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