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8년 정순애 안내면

“따신데 앉아. 일루와”
어머니는 손으로 방바닥을 쓸어내시며 객들이 앉을 공간을 마련하시느라 손도 마음도 분주하셨다. 인정의 허기를 꽉 채워주신 어머니. 말씀 한 마디 한 마디 정이 뚝뚝 묻어나는 분, 손길에도 온정이 넘친다. 방바닥보다 더 따뜻한 어머니의 손길과 온정. 햇살이 마당에 꽉 들어차 온 집안을 가득 채웠다.  
어렵게 살던 지난날을 생각하면 고개를 절래절래 흔드는 날도 부지기수였지만 노년의 일상이 잔잔하고 평화롭다시며 “지금이 제일 좋아” 라고 말씀하신다. 물론 여기저기 아픈 데가 많으니 몸은 자유롭지 못하지만 마음은 그저 안락하다고
고생하던 시절 끝에 이런 날도 온다, 그래서 인생이 살만하다고 우회적으로 마음을 드러내셨다. 시골 아낙의 무심하고 고생스런 날들이 노년의 평화로운 일상에 깊은 뿌리가 된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피, 땀, 눈물 없이는 우리는 손에 아무것도 쥘수 없다는 진리를 어머니의 인생을 통해 또 들여다본다. 한 권의 인생백서 같은 어머니의 삶이 또 우리를 숙연하게 한다. 

 

 ■ 인생은 전쟁터 같았지만 든든한 우군이던 우리 부부 

예쁘장한 비단장사가 우리 동네에 비단을 팔러왔다. 내가 스무 살이 되기 전이다. 보따리 장사들이 이 마을 저 마을을 다니면서 물건을 팔던 시절, 비단장사도 우리 동네를 수시로 드나들었다.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나의 시어머니가 되셨다.

어른들끼리 혼담이 오고가고 나는 20살, 남편은 22살에 만나 친정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서 결혼이라는 둥지를 틀었다.

남편은 일본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던 불사조 같은 사람이다. 나도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유년의 결핍이 많았고 어려운 여건에서 살아내느라 정신 바짝 차리고 살 수밖에 없었다.

우리 큰딸이 60대 중반이니 옛날 같으면 할매인데 아직도 새댁 같다. 나는 그 나이에서 스물을 더 하니 인생이 여름날 낮잠 자듯이 잠깐이다. 먼 길을 왔지만 어느새 성큼 다가왔다.

남편은 학교 소사로 성실하고 근면하게 사는 것을 인생의 철칙으로 삼았고 나는 허리띠 졸라매면서 농사일, 집안 살림하면서 우리 아이들을 키우고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모르게 그 세월을 살아왔다. 

우리 처음 결혼했을 때 동네에서 제일 못살았다고 우리 부부는 지난날을 회상하면서 말하지만 그 세월을 넘고 넘어 이제 웃으면서 얘기할 수 있는 여유로움이 있다.

성실한 남편 덕분에 나는 어려운 살림이었지만 그렇게 사는 게 답인줄 알고 남편을 내조하면서 묵묵히 일상을 살아냈다. 뒤돌아서면 한 뼘씩 자라는 아이들 키우는 하루하루가 진이 빠지는 날들도 허다했지만 우리 아이들은 내가 일어서게 하는 힘이 되었다. 뼛속의 진액이 다 빠져나오는 고단함도 있었지만 그 진액이 다시 내 삶의 윤활유가 된 것은 분명하다.

 

■ 뼛속의 진액이 내 삶의 동력 

안남 동막이 고향인 나는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동생과 둘이 자랐다. 다른 집은 7남매 8남매 형제들이 북적거렸지만 우리는 둘이 자랐고 혼자 몸으로 우리를 키우신 어머니의 고생은 생각만 해도 눈물부터 닦아야 한다. 그 시절 여인의 삶이 다 그러했다고 말하기에는 어머니의 인생이 가련하다. 

나는 젊어 고생 사서도 한다면서 위로했고 노년에는 집으로 찾아드는 햇볕마냥 따뜻한 날을 맞았는데 어머니는 그 시절을 맞아보지 못하고 떠나셨으니 가슴이 아리다. 이제는 꿈에서 조차 보이지 않는 어머니.

수확기에 쌀 40가마를 하면서 허리를 펴기 어려울 만큼 힘든 시간이 있었지만 곡식이 차고 넘치는 지금이 눈물 날 만큼 고맙다.

아이들 차비 벌어보겠다고 열무를 단단히 묶어서 옥천 장에 내다팔았다. 난전을 펼쳐놓고 열무 단을 판들 전대에 얼마나 채워질 것인가. 장날에 오고가는 사람들이 한 단씩 사갈 때 마다 우리 아이들 차비라도 번다는 생각에 힘든 것도 모르던 시절이다. 가져간 열무 단을 다 팔면 그 날은 횡재 한 듯이 버스에 올랐다. 

 

터덜거리는 버스에 올라 꾸벅꾸벅 졸면서 집으로 돌아오던 시골 아낙의 모습이 이젠 그리움이 되었다. 

손은 거칠지만 세상을 따뜻한 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생긴 것은 나에게 훈장처럼 주어진 세월의 흔적이다.

처마 끝에 주렁주렁 매달린 홍시들도 봄부터 여름 내내 땀 흘렸던 그 시간들을 보상해주는 효자노릇을 한다. 해거리를 하느라 어떤 해는 손으로 만지기만 해도 물이 주르륵 흘러 물러터진 녀석도 있지만 어떤 해는 암팡지고 알차게 매달려 있는 녀석들을 보면 우리 자식들 같다.

시부모님을 모시는 일도 만만치 않다. 옛 어른들이 96살까지 사시는 건 쉽지도 않거니와 그 수발을 드는 일이 당연한 일이지만 잘 모시지 못하는 마음의 빚, 그리고 고단한 하루하루까지 더해져 힘겨운 날들이었음을 부인하지 않겠다.

“얼마나 징그럽게 살았으면 한 푼 없이 시작해서 지금 이렇게 넉넉해졌겠어?” 라고 말한들 흠 잡힐 일이 없다. 그만큼 열심히 살아냈다.

 

■ 아! 이 호강스러운 날들이 내 것 이라니

불 떼서 밥 해먹던 시절에는 석유곤로만 있어도 양반이었다. 샘도 하나밖에 없어 물 길러 다니는 일도 보통일이 아니었다. 물길은 다라를 머리에 이고 돌아올 때는 물을 반이나 흘려보내는 일들이 허다해서 하루에도 수십 번이나 샘을 오고갔다. 지금 젊은이들이 우리들 젊은 날을 그려보면 전래 동화 속에 나오는 이야기 같다고 할 것이다. 할머니의 옛 이야기로 들리지만 그 혹독한 하루하루를 보내면서 그 젊은 애기들의 부모를 우리가 키워냈다. 우리가 저그들의 뿌리인 것을 아이들이 생각해낼 수 있을까? 알아달라는 말이 아니라 세상의 이치는 근간이 있어야 그 위에서 열매를 맺는 다는 말이다. 즉, 공짜가 없다는 진리를 몸으로 체득한 우리 세대다. 

겨울에는 눈이 무릎까지 차올라 눈 한번 오면 새카만 땅이 한 뼘도 안보였는데 지금은 날씨가 변했나, 이젠 눈 보기도 어렵고 사람구경도 힘들어 동네에 15명이나 살까? 서글픈 현실이다.

동네에 애들 떨어 진지 족히 20년은 된 거 같다. 아이들 구경은 할 수가 없다. 이렇게 삭막한 세상이 우리 사는 날에 올지는 짐작도 할 수 없었다. 몸은 편해졌지만 사람답게 사는 일이 쉽지 않다.

 

지금 집도 우리 아이들이랑 나이가 비슷하다. 안채에서 우리 아이들을 낳았다. 방 두 개에 고물고물 들어앉아 식구들이 살던 그 때 이후로 벌써 강산이 여러 번 변했다. 외딴집에 꺼적집 모양새를 하던 집에서 아이들을 낳고 허리는 차차로 구부러졌지만 인생의 열매들을 하나둘 맺기 시작했다. 세상에 공짜가 없어서 우리 부부 하루하루 눈물, 땀방울 흘리지 않은 날들이 없었지만 이제 마음만으로는 허리를 쫙 펴고 세상 부러울 게 없는 날들이다. 

남편이 머리 염색까지 도맡아서 호강을 제대로 한다. 살아온 날들보다 살 날이 훨씬 부족하지만 따뜻한 양지 녁에서 인생의 겨울을 보낼 수 있는 것이 내 복이며 호사를 누리는 것이다. 

 

다리가 아파 제대로 걷는 것도 힘에 부치지만 지금이 제일 좋은 때 인 것은 고단하게 내렸던 깊은 뿌리로부터 튼실한 나무를 키워낸 덕분이다. 

스무 살 앳된 얼굴 ‘순애’가 60년 넘는 세월의 강을 건너면서 주름진 얼굴, 딱딱한 손등, 마음대로 걸을 수 없는 불편한 다리를 얻었지만 세월의 훈장이 되었다. 언제가 가장 좋았냐는 물음에 주저 없이 “지금”이라고 즉답할 수 있으니 내 인생이 서글프지 않다. 

앞으로 얼마나 더 가을들판에서 수확의 기쁨을 누릴지, 처마 밑에 달린 홍시가 곶감 되는 것을 몇 차례 더 볼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  그저 매일매일이 감사하니 ‘오늘’이 ‘그날’이어도 여한이 없는 때를 맞았다.

작은 시골동네에서 강산이 여덟 번 변하는 동안 살아낸 이름 없는 할매지만 우리 아이들, 우리 집 앞뒤를 꽉 채운 밭이 내가 살아온 날들을 기억하고 있다. 우리 부부가 자녀들한테 남겨준 유산은 정직하고 근면한 생활 태도밖에 없지만 억만금보다 귀한 유산이 되었다. 

내 인생의 사계 중 겨울을 맞았지만 눈 내린 겨울이 봄날처럼 포근하다. 지난 세월의 눈물과 땀방울, 뼛속의 진액이 지금의 내 형상을 만든 것은 자명하다. 

 

*이 글은 옥천신문과 제휴한 기사(http://cms.hanion.co.kr/news/articleView.html?idxno=28707)입니다.  

편집 : 김미경 편집위원

김경희 옥천신문 시민기자  minho@o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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