湯之盤銘曰 苟日新日日新又日新(탕지반명왈 구일신일일신우일신)

【번역】탕(湯)임금의 세수대야에 새긴 글에 “진실로 날로 새로워졌거든 나날이 새롭게 하고 또 나날이 새롭게 하라.”라고 하였다.

【해설】동아시아 역사상 최초로 혁명을 일으켜 세상을 바꾼 인물은 탕(湯)임금이다. 3600년 전, 그는 폭군이었던 하(夏)나라의 마지막 임금 걸(桀)을 쳐부수고 상(商 : 일명 殷)나라를 세워 백성을 나라의 근본으로 삼는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그는 어떻게 세상을 바꾸었을까? 그가 세상을 바꾸기 위해 가장 먼저 한 일은 무리를 규합하거나 군대를 양성하여 다른 나라를 공격하는 일이 아니라 놀랍게도 날마다 세수를 하면서 자신을 돌아보고 성찰하는 일이었다. 

'구일신 일일신 우일신(苟日新 日日新 又日新)'

벌써 금년도 반에 이르렀다. 매일을 새로워지자고 스스로에게 다짐하건만 똑같은 일로 매일 매일을 부딪히다 보니 힘들다가 화도 나고 다 그만둬 버리자 라는 생각도 한다. 하지만 조금 힘들다고 그것을 극복 못하는 어리석은 행동은 금물이다. 그래서 日日新 又日新이 필요한 것이다. 작심삼일(作心三日)이라고 하지만 삼일 후에 다시 작심삼일을 한다면 계속 이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이어져 꾸준히 지속할 수만 있다면 결실을 맺을 수 있다. 진실로 하루를 새롭게 하고, 날마다 새롭게 하자. 바보같이 어제의 어려움에 연연하지 말고 항상 새로움을 즐기자. 

​​찰스 다윈은 "살아남는 것은 강한 종도 우수한 종도 아닌 변화하는 종"이라고 갈파하였다. 이는 지구상에 살아남는 종은 강한 자가 아니라 환경의 변화에 잘 적응한 자라는 것이다. 모든 생물은 진화를 거듭한다. 때문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변화해야 한다는 다윈의 진화론은 인간 사회에서도 당연한 진리로 받아들여진다. 개인이나 조직에서 근간을 이루는 요소인 진화의 핵심은 위기를 극복하려는 혁신의 힘이며 이는 스스로의 변화에서부터 시작된다. "하루라도 새로워질 수 있거든 나날이 새로워지고, 또 나날이 새로워지리라." 은나라 탕왕은 자신의 세숫대야에 “苟日新 日日新 又日新”이라는 문구를 써놓고 얼굴을 씻을 때마다 마음까지 씻으려고 노력했다.

이 세상에 일단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다 나이를 먹으면서 노인이 된다. 산전수전(山戰水戰)을 다 겪으면서 그렇게 어쩔 수 없이 노인으로 늙어 가지만 분명한 것은 늙더라도 반듯하고 곱게 늙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湯王은 아니어도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좌우명(座右銘) 하나쯤은 적어 놓고 곱게 늙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으면 어떨까?
 
사람들은 매일 샤워를 하면서 몸을 청결하게 관리한다. 더 나아가 얼굴과 몸매를 꾸미는 데 갖가지로 세심하게 신경을 쓴다. 그러나 이처럼 육체적인 생명에는 노력과 정성을 다하면서도, 정작 마음을 곱게 가꾸는 정신생명의 수양은 소홀히 한다. 옛날의 선비들은 오히려 정신생명의 향상을 평생의 과제로 여겼다.
 
퇴계 이황 선생은 그야말로, ‘숨이 끊어지는 마지막 순간까지 사랑의 정신을 놓지 않으려’ 하였다. 선생은 세상을 떠나기 며칠 전 설사로 인해 방 안의 요강에서 용변을 보면서, 윗목 한쪽에 놓여있던 분매(盆梅)를 다른 방으로 옮기도록 당부했다고 한다. “매화 형에게 불결할 터이니 내 마음이 편치 못하다.” 이는 역시 부단한 수행 속에서 순결해진 생명감각으로 매화와 교감하는 한 단면을 영상처럼 보여주지 않는가?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는 성경(聖經)》의 말씀 또한 이렇게 이해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성령(聖靈)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말씀은 밝은 덕성(德性)으로 자신을 부단히 각성하고 고양시키는 ‘又日新’의 정신과도 통한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하느님의 나라’란 꼭 사후(死後)의 천국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 역시 ‘又日新’의 정신이 이르고자 하는 ‘천인합일(天人合一)’의 환희로운 세계와 일맥상통할 것이다.
 
‘又日新’의 수행은 깊은 산중에서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어찌 보면 산중의 수행은 참다운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수행은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일상생활 속에서 실행되어야 진정한 수행인 것이다. 가정에서, 출근길에서, 또는 직장 내에서 사람들을 만나는 자리가 바로 수행의 현장인 것이다. 욕망, 이기심, 분노 등을 다스려 사람들에게 순수한 인격으로 다가가며, 일을 사심없이 처리하려는 노력이 바로 수행의 한 방법이고 더 나아가 수행정신으로 바라보면 세상만사가 다 자아(自我)의 발견과 성취를 위해 긴요한 자료가 아닌가?
 
노인이라는 것은 지위도 자격도 아니다. ‘삐딱한 생각’은 용렬한 행위이다. 의식적으로 고쳐야 한다. 그리고 자기가 옳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늙었다는 이유로 대접받으면 반드시 감사를 표해야 한다. 또한 남에게 일을 시켰으면 나서지 말고 조용히 지켜봐야 하고 화초만 가꾸지 말고 머리를 쓰는 일도 해야 치매를 예방할 수 있다. 또 자기가 사용하던 물건들을 버리는 습관을 몸에 붙여야 한다. 혹 가까운 친구가 죽더라도 태연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늙어가는 과정을 자연스레 받아들이고 최후를 하늘에 맡기는 것이다.
 
대체로 나이 들어 날로 새롭고 또 새로워진다는 것은 위와 같은 생각을 실천에 옮겨도 가능한 일일 것이다. 나를 나오라고 연락해 주는 곳도 없고, 불러 주는 곳도 없다는 것은 인생을 헛산 것이다. 나오라는 곳이 있으면 무조건 참석하는 것도 나를 새롭게 하는 일이다.
 
그리고 "나는 아무것도 더 배울 것이 없다"고 하는 사람도 다 산 사람이다. 사람은 죽을 때까지 무엇인가를 배워야 한다. 배움의 열정에 불타는 사람은 늙지 않는다. 타성에 젖어 있다보면 '변해야 한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기가 좀처럼 쉽지 않다. '지금 이대로'는 편안함을 가져다 주지만, '변화'는 미지의 문밖이라는 두려움과 힘듦을 떠올리게 만들기 때문이다. '지금 이대로'가 단순히 멈춰 서있음이 아니라 결국 퇴보를 의미한다는 것도 잘 인식하지 못한다. 

빅토르 위고는 약한 자는 '미래'를 가리켜 '불가능'이라 하고 겁쟁이는 '“미지'라 하고 용기있는 자는 '기회'라고 한다 했다. 설혹 미래는 '변해야 한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달았다고 해도 그것을 단기가 아닌 장기적으로 꾸준히 실천하기란 더욱 어렵다. 시간이 흐르면서 '절박감'이 사라지고, 내부의 저항도 나타나는데다, "이제 이쯤이면 됐어"라는 생각이 자꾸 유혹하기 때문입니다.  

까치가 둥지를 짓는 방법은 예나 지금이나 같다. 시골 까치는 나뭇가지 사이에, 서울 까치는 전신주 위에 짓는 장소만 다를 뿐,  어떤 까치도 둥지를 복층으로 짓거나 네모진 형태로 만들 생각은 하지 않는다. 사자나 곰도 마찬가지다. 사냥한 먹이를 늘 같은 방식으로 먹는다. 이번에는 색다르게 양념구이를 해볼 생각은 하지 않는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동물의 생존 방식은 오래 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반면에 인간은 어떤가? 동일성을 유지, 계승해온 동물과 다르게 우리 인간은 늘 새로움을 추구한다. 똑같은 것의 반복을 지루해 하며 새로운 발상을 참신하게 여긴다. 끊임없이 변화를 꾀하는 인간은 새로움에 왜 그토록 열광할까?

갈수록 새로움을 향한 사람들의 갈증은 더욱 커져서 새로운 계획, 새로운 결심,  새로운 목표를 세우기에 온 정신을 쏟는다. 어떻게 하면 더 건강해지고 더 많이 저축하고 더 열심히 일해  이전보다 새로워 질 수 있을까? 그런 고민 속에 많은 사람들이 새해, 새달, 새날에 새로운 나를 위한 새로운 길의 출발점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이,  새로운 계획을 꾸준히 지켜가기란 쉽지 않다. 피곤하거나 바빠지거나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으면 밑줄 두 번 긋고 다짐한 새 결심을 초개와 같이 버린다. 

그래도 마음이 충만해지는 세계로 눈을 돌리면 우리 인간이  새로워질 수 있는가? 
이기적인 유전자를 가진 우리가 이타적인 삶을 살 수 있는가? 

나 아닌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고, 나 아닌 누군가를 위하여 양보하고 희생하는 새로운 삶이 가능한가?  이런 질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일류 직장, 멋진 차, 근사한 집을 가졌을 때 우리가 느끼는 새로움도 좋은 것이다. 문제는, 새로움을 추구하는 인간은 거기에서 멈춰서지 못한다는 점이다. 내게 기쁨을 준 대상은 변함 없이 그대로인데 그 대상을 바라보는 나는 항상 같지 않다.  바람 부는 하늘의 구름처럼, 순간순간 달라지는 내 욕구를 제어하기 어렵다. 그런 나를 그대로 둔 채 욕구를 채워줄 대상만 바꾼다는 것은 별 효과가 없다. 새로움은 새 물건이나 새로운 상대의 등장으로 해결 되는 게 아니다. 무엇보다 마음이 새로워져야 하고,  마음부터 변화되어야 한다. 진정한 새로움은 내면의 새로움이며, 인식의 변화에서 시작된다. 보는 눈이 달라지면 삶도 새롭게 변화한다.

최근 종방한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에서 재벌 총수가 손자에게 이런 말을 한다. '사람에겐 오장육부가 있는데 나한테는 심보가 세 개나 더 있다. 돈 많이 벌어서 성공하려는 욕심, 어느 누구도 절대로 믿지 못하는 의심, 언제든 쓸모가 없어지면 배신할 수 있는 변심이 그것이다.‘

이를 최고의 신념처럼  자랑하는 재벌 총수는 사람들에게 세 개의 심보를 휘둘러서 부와 명예, 권력을 장악했다. 하지만 드라마에 나오는 그의 얼굴에서 진정한 기쁨은 찾을 수 없고 마음 속은 텅 빈 듯이 보였다. 그가 자랑한 욕심, 의심, 변심은 그에게만 있는 특별한 심보가 아니다. 누구나 속내를 한 꺼플 들춰내면 다 들어 있는 것이다. 혹여 다른 사람을 향해 남발할까 봐 그 심보를 쟁여두고 있을 뿐이지, 오장육부처럼 날 때부터 우리에게 있던 것들이다.

그렇다면 마음이 만족하는 새로움을 위해 이 심보들을 사용해보자. 단, 목표 지점을 바꿔 외부인이 아닌 나에게 겨냥해야 한다. 욕심과 의심과 변심을 부메랑처럼 돌려 나 자신에게 향하도록 하면 이전에 몰랐던 것들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한다. 나만 위하던 이기적인 욕심과 결별하게 되고, 내가 옳고 성실하다는 자기 신뢰에 대해서도 강한 의심을 품게된다. 또한 선행을 베풀 수 없는 나의 실체에 등 돌리는 변심도 단행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내 마음부터 바꾸는 것이 인식의 변화다. 이를 통해서 보이는 세계가 달라지면 삶도 자연스럽게 새로워진다.

이 상태가 마음의 세게로 눈을 돌리는 것이다. 이 세계에 첫발만 내밀면 그 다음은 '자동라인'을 따라 저절로 흘러간다. 새가 날갯짓으로 중력을 이겨내고 공기의 흐름을 타면 저절로 날아가듯이 말이다.

전국시대(戰國時代) 위(衛)나라에 거백옥(蘧伯玉)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는 위나라의 대부였다. 사마천(司馬遷) 사기(史記)에 ‘공자가 존경한 사람으로 주(周)나라에 노자(老子)가 있고 위나라에 거백옥이 있다’고 했다. 거백옥은 논어(論語)와 좌전(左傳), 장자(莊子) 등 여러 고전에 등장하는 당시 이름 높은 위인이었다. 어떻게 그런 평판을 얻게 되었을까?

하루는 거백옥이 공자에게 사람을 보냈다. 공자가 위나라에 갔을 때, 거백옥의 집에 잠시 머문 적이 있있는데 심부름꾼을 보내 공자의 안부를 물어본 것이다. 공자가 다시 심부름꾼에게 “요즘 선생님은 어떻게 지내시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가 이렇게 “선생님께서는 실수를 줄이시려고 하지만 아직 잘 되지 않는 듯합니다.” 이 말에 공자는 ‘참으로 훌륭한 심부름꾼이다’고 여러 번 칭찬하였다. 회남자(淮南子)의 이 고사는 ‘年五十而知四十九年非’ 거백옥이 나이 50년이 되어 지난 49년간의 삶을 되돌아보며 잘못을 깨달았다는 뜻이다. 그는 날마다 자신을 돌아보고, 후회하고 반성하며 다시 새로워지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그야말로 日日新又日新의 대표적인 사례다. 공자는 그의 인물됨에 감탄하고 그것을 알아본 심부름꾼마저 훌륭하다고 칭찬한 것이다.

이 고사에서 ‘후회’란 자기성찰과 성숙의 의미임에도 불구하고 후회란 말이 주는 부정적인 어감이 있는 건 사실이다. 보통 후회를 바람직하지 않은 것으로 여기기는 하지만 후회는 실수를 되돌아보고 반성해서 더 나은 선택과 결정을 하도록 해주는 강력한 감정이다. 후회를 ‘최소화’하지 말고 ‘최적화’하라!

우리는 날마다 새로워 져야 한다. 
내 마음에 촛불을 켜야 한다. 
상대방이 아닌 내 자신이 내 마음에 촛불을 켜자. 
나를 태우자. 
잘못된 습관, 옳지 않은 생각, 남 탓 등등 모든 걸 버리고 내 자신의 짐을 가벼이 하자.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은 지금까지의 악습과 폐단을 과감히 벗어버리고 새롭게 되는 일이다. 
어린 시절 양지 바른 곳에서 졸고 있는 강아지를 대하듯 우리는 내 마음을 단순하게, 가볍게, 깨끗하게 내 생각을 세탁물을 빨 듯 다시 한번 깨끗하게 빨기 위해 노력하자. 
생각과 육신에 새로운 활기를 넣어 새로운 삶의 장을 열 필요가 있고 지금이 기회인것 같다. 
다시 日日新 又日新 하자.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새로운 목표 설정이다. 
아직 내게는 할 일이 많이 남아 있다. 

편집 : 양성숙 편집위원

류종현 독자  ppuri200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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