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전에도 언급했듯이 내가 태어나고 자란 경기도 화성시 시골 마을에서 매주 1~2일씩 밭농사 일을 하고 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먼저 돌아가신 후 혼자 10여 년 정도 텃밭을 혼자 농사지으셨다.

그러다가 4~5년 전부터 건강이 안 좋아 지시자, 나의 도움으로 일하시다가 최근 외부 출입을 못 하시자 이제는 나 혼자 농사를 짓고 있다. 그것도 힘에 부쳐 1/3 정도는 풀밭이다. 어머니는 가끔 부축받아 마당에 나와보시고는 풀밭을 만든 나를 못마땅해하신다. 내가 이 밭농사 일을 하면서, 수십 년도 넘는 긴 세월 어머니의 힘드셨음을 짐작하게 되었다. 이렇게 저렇게 땅이 줄어들어서 그렇기 전에는 훨씬 넓은 땅이었다. 이 밭에서 나는 온갖 것들은 어머니의 손을 거쳐 매일 식탁에 올라 우리 형제들은 배곯지 않고 컸다. 형제들의 학비는 아버지가 돼지와 소를 키워 어렵사리 댄 것으로 기억된다.  용돈 등 푼돈은 어머니가 밭에 참깨나 콩 등을 심어 보따리에 이고 장에 나가 판 돈으로 충당되었을 것이다. 거기다 어머니는 별도로 용돈을 호주머니에 찔러주기도 하셨다. 나는 그것도 모자라 책 산다고 속여 다른 데 쓰기도 하였다.

나의 어머니
나의 어머니

어머니는 봄에 날이 풀리면 때를 놓치지 않고 강낭콩, 완두콩을 비롯하여 일찍 먹을 수 있는 순서대로 밭을 나누어 심으셨다. 같은 옥수수도 일찍 여무는 것과 늦게 여무는 것을 구분해서 씨앗을 보관하셨다가 심으셨다. 씨앗을 구분해서 보관하시는 어머니의 솜씨는 동네가 알아주는 것이어서, 동네 아주머니들이 자주 씨앗을 바꾸러 오기도 했다. 그렇게 밭일을 쉬지 않고 하시는 어머니의 얼굴은 검게 그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나는 정말 죄송하게도 어머니의 검고, 화장 안 한 모습이 싫었다. 다른 엄마들은 얼굴에 분도 바르고 옷도 예쁘게 지어 입는데, 나의 어머니는 시골 아줌마 모습 그대로였다.  어머니 화장품은 장에서 파는 값싼 “크림”과 쪽머리를 하시고 바르는 “동백기름” 정도였다고 기억된다. 중학 시절 읍내에서 장 보러 나온 어머니와 만났을 때 나는 일부러 몇 발짝 떨어져 걷기도 했다. 여학생들이 볼까 봐 두려워서다.

나는 혼자 농사일하게 되면서 이러저러한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밭일하려고 호미를 들고 앉으면 어머니에 대한 여러 가지 생각으로 마음이 무거워지기도 한다. 내가 하는 이 밭에서의 노동은 어쩌면 가톨릭 신자들의 “산티아고 순례길”을 순례하는 순례자의 마음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어설프기 짝이 없는 말 같지만, 나는 이 밭에서의 노동을 통해 어머니의 힘드셨음을 그나마 뒤늦게라도 깨달았다고 생각한다.

그것뿐 아니다. 곡식은 정직하다. 농부가 땀 흘린 만큼 작물은 틀림없이 열매를 내어준다는 사실도 깨닫게 되었다. 나는 이 논리는 역으로도 성립이 된다고 믿고 싶다. 농부뿐 아니라 노동자의 땀은 정직하다고 생각한다. 2년을 더 사시면 100수를 채우는 어머니의 얼굴은 이제는 예전같이 검지 않으시다. 밭일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리라. 부모님이 끝내 나에게 농사일시키지 않으시며 농사라는 직업을 갖지 말라고 하셨는데 그 소원은 이루어진 것 같다. 30년을 공무원으로 근무하고 명예퇴직을 했기 때문이다. 내 기억으로 얼굴이 새까맣게 그을렸던 적이 한 번 있었던 것 같다. 50년 전쯤인 1974년 7·8월에 육군 논산훈련소에서 신병훈련을 받을 때다. 훈련 마지막쯤 뜨거운 대낮 연병장에 모여 문득 옆 동료와 말을 하다 보니 이가 유난히 희게 보여서 다시 보니 얼굴이 구릿빛으로 바뀌어 있었다. 거울을 볼 틈도 없을 때라 나도 똑같았을 게다. 나는 공직에서 퇴직 후에도 약간의 관련 업무에 봉사하기 위해 1주에 하루나 이틀 정도 정장 차림으로 출근한다. 그 핑계로 밭일을 시작하기 전에 얼굴과 양팔, 손에 햇볕 가리개를 먼저 착용하는 게 일상이다. 햇볕을 받으며 막일하여 얼굴과 손이 검게 탄 것이 절대 수치스러운 일이 아님에도 말이다.

최근 내가 정기구독하는 잡지(한겨레21)의 표지사진을 보고 나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건설노조 강원 건설지부 부지부장 홍성헌씨의 검게 그은 얼굴 모습이다. 뭔가 할 말이 많은데, 말로 다 할 수 없는, 금방이라도 쏟아져 내릴 것 같은 눈 속에 가득한 눈물,  마음이 막막해진다. 내가 그분보다 나이가 좀 많으니 미리 세상을 더 좋게 바꾸지 못한 책임이 나에게도 일부 있지 않을까. 또 우리는 흔히 “직업선택의 자유”라는 말로 햇볕에 그을리며 위험에 노출되는 힘든 일을 하는 노동자들에게 갚아야 할 땀값을 쉽게 상계하려 하는 것 아닐까.

기회가 된다면 홍부지부장님께 위로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

편집 : 박효삼 편집장

박승남 주주  psn123@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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