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간의 얼굴>을 한 시민사회를 꿈꾸며

짐승 세계에선 약한 자가 살아남기 어렵다. 어미도 강한 새끼에게 먹이를 준다. 그러나 인간 세계에선 정반대다. 약자에 대한 연민과 함께, 약자는 늘 공동체의 관심과 보호의 대상이다. 모든 가정에서 튼튼한 자녀보다 허약한 자녀에게 부모는 더 관심을 보이고 애정을 갖는다. 학교 선생님도 스스로 잘하는 학생보단 적응에 어려움을 겪는 학생에게 더 많은 관심과 애정을 쏟는다. 짐승 세계와 인간 세계의 크나큰 차이다.

지하철 9호선 국회의사당역 4번 출구 50m에 위치한 이룸센터 앞 장애인 농성장 모습.(출처 : 하성환)  농성장 옆에 쓴 글귀가 눈에 띈다. <세상에 목소리 없는 자란 없다. 다만 듣지 않는 자, 듣지 않으려는 자가 있을 뿐이다 - 고병권>
지하철 9호선 국회의사당역 4번 출구 50m에 위치한 이룸센터 앞 장애인 농성장 모습.(출처 : 하성환) 농성장 옆에 쓴 글귀가 눈에 띈다. <세상에 목소리 없는 자란 없다. 다만 듣지 않는 자, 듣지 않으려는 자가 있을 뿐이다 - 고병권>

2021년 12월 3일부터 시작한 「전장연」(「전국 장애인 차별철폐연대」의 약칭) 출근길 시위에 불편한 시선을 보내는 이들이 적지 않다. 심지어 일부 시민들 가운데엔 비난과 욕설도 서슴지 않는다. 이준석 「국민의 힘」 전 대표는 2022년 당 대표 시절 “선량한 시민의 불편을 야기해 뜻을 관철하겠다는 비문명적 방식”이라고 여러 차례 비난했다. 일국의 집권 여당 대표가 장애인 인권에 대해 보여준 옹졸한 인식에 놀라웠다. ‘비문명적 방식’이라니? 그는 정말 인권의 역사가 피와 눈물로 점철된 투쟁의 역사임을 모르는 것일까?

곰곰이 생각하면 ‘비문명적 방식’이라는 고상한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인권 역사에 대한 무지를 고스란히 드러냈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문명국가(?)라는 북서유럽 국가들에서 사회적 약자인 여성과 장애인의 인권이 어떻게 성장해 왔는지 이해한다면 그야말로 부박한 역사 인식이 아닐 수 없다.

120년 전 영국 여성들이 투표할 수 있는 권리를 비롯해 참정권을 획득하기 위해 어떤 수모를 겪고 고난을 헤쳐왔는지 교과서엔 상세하게 기록돼 있다. 장애인 인권 투쟁의 역사도 마찬가지다. 1995년 봄, 영국 전역에서 10만 장애인들이 이동권을 확보하기 위해 스스로 버스와 기차에 수갑을 채운 채, 비장애인 중심의 대중교통체계에 저항했다. 심지어 아예 도로 위 버스 앞에 드러눕는 방식으로 매우 처절하게 투쟁했다.

올해 5월 지하철 9호선 국회의사당 역 지하철 역사 내에서 장애인들이 집회를 통해 장애인 권리예산 입법을 촉구하고 있다. (출처 : 하성환)
올해 5월 지하철 9호선 국회의사당 역 지하철 역사 내에서 장애인들이 집회를 통해 장애인 권리예산 입법을 촉구하고 있다. (출처 : 하성환)

마찬가지로 70년대 독일에서도 장애인들이 대중교통 수단 트램 선로를 점거하거나 시의회를 점거해 쇠사슬로 묶고 단식 농성을 벌였다. 물론 영국과 독일 시민사회단체와 노조는 장애인 이동권 투쟁에 적극 연대했다. 그런 지난한 과정을 거쳐서 오늘에 이른 게 이른바 문명국가(?)의 모습이다. 적어도 오늘날 북서유럽 국가 비장애인들은 장애인들이 전개하는 이동권 확보 투쟁에 불편한 시선을 보내거나 비난하진 않는다. <시민성> 교육을 통해 공감하기에 연대하진 못해도 대부분 불편을 감수할 뿐 비난하진 않는다.

우리 사회는 어떤가? 「전장연」 지하철 승차 시위에 대해 오세훈 서울 시장은 「전장연」을 “사회적 강자”라 왜곡하며 ‘무정차’, ‘무관용’을 강변했다. 그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로 극도의 인내심”을 운위하더니 “서울 시장으로서 더 이상 시민의 피해와 불편을 방치할 수는 없다.”며 단호한 대처를 언급했다. 나아가 경찰력을 동원해 ”민⬝형사상 대응을 포함해 필요한 모든 법적인 조치를 다하겠다.”고 강조했다. 집권 여당 「국민의 힘」 하태경 의원은 방송에 나가 「전장연」을 “국민을 괴롭히는 폭력적인 NGO”라고 비난했다.

그에 말맞춰 일부 언론들은 「전장연」 지하철 승차 시위에 ‘불법’이란 딱지를 붙였다. 게다가 장애인 활동을 향해 “민폐 시위”니 “좀비”로 몰아치며 갈라치기에 앞장섰다. 언론의 존재 이유인 권력 감시와 사회적 약자 보호엔 아예 눈을 감고 관심조차 보이질 않았다. 장애인 권리 예산이 어떻게 배정되고 집행되는지 권력을 감시하는 기사는 한 줄 없었고 오직 권력의 대변인 노릇에 정신이 팔려있었다.

윤석열 정권에 대해 장애인 권리예산 보장을 촉구하는 전장연 손팻말(출처 : 하성환)
윤석열 정권에 대해 장애인 권리예산 보장을 촉구하는 전장연 손팻말(출처 : 하성환)

예산을 관장하는 추경호 기재부 장관은 「전장연」이 요구하는 장애인 권리 예산을 보장해주면 “나라가 망한다”고 여론을 호도하기까지 했다. 실제로 장애인 이동권 관련 2023년도 대한민국 예산은 237억 원인데 이는 인구 100만도 안 되는 프랑크푸르트라는 독일 일개 도시 장애인 이동권 관련 예산에도 미치지 못하는 금액이다. 우리 사회 장애인 차별이 얼마나 심각한지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 수 없다.

전체 장애인 가운데 55.7%가 중졸 이하 학력이라는 사실은 장애인 탈시설의 가장 강력한 근거이다. 탈시설을 위해 이동권을 보장해야 하고 이를 위해 권리예산을 배정해야 한다. 교육은 장애인에게 절실한 기본권이자 사회인으로 살아갈 최소한의 권리이기 때문이다.(출처 : 하성환)
전체 장애인 가운데 55.7%가 중졸 이하 학력이라는 사실은 장애인 탈시설의 가장 강력한 근거이다. 탈시설을 위해 이동권을 보장해야 하고 이를 위해 권리예산을 배정해야 한다. 교육은 장애인에게 절실한 기본권이자 사회인으로 살아갈 최소한의 권리이기 때문이다.(출처 : 하성환)

우리나라 장애인 1년 예산은 OECD 평균의 1/3 수준으로 매우 낮다. 전체 장애인 중 55.7%가 중졸 이하 학력임을 생각할 때 국가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깨달아야 한다. 언제까지 장애인들을 비장애인들과 격리된 복지(?)시설에 가두고 이동권을 제한할 것인가? 장애인도 비장애인과 똑같이 대한민국 국민이다. 장애인도 아침에 일하러 가고 싶고 교육받고 싶고 취미생활을 하고 싶다. 그러려면 장애인도 이동해야 한다. 헌법에 명문화된 평등권이 장애인에게도 똑같이 적용돼야 한다. 비장애인 집단이기주의나 다수의 횡포가 아니라면 그게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성숙한 시민사회 모습이다. 권력자들이 “사회적 약자 보호” 운운하는 정치적 수사로 더 이상 이미지 정치만 할 수는 없다. 국민은 바보가 아니고 설득력 또한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 서울 지하철 어지간한 곳엔 거의 엘리베이터가 설치돼 있다. 장애인들만 이용하는 게 아니라 어린이, 할아버지, 할머니, 임산부, 유모차를 탄 아기 등 교통약자들 모두 이용한다. 그런 풍경이 참으로 아름답지 않은가? 그런데 그 엘리베이터가 설치되기까지엔 장애인들의 눈물겨운 투쟁과 희생이 어려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다시 말해 장애인들이 비난과 멸시를 받으며 투쟁한 끝에 대중교통의 공공성이 강화돼왔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1999년 혜화역, 천호역에서 리프트 사고가 발생했다. 급기야 2001년 1월 오이도역에선 설을 맞아 역 귀성한 할머니가 지하철 리프트를 탔다가 추락사하는 황망한 사건이 벌어졌다.

<계단 버스>는 차별 버스이기에 장애인 이동권을 보장하기 위해 저상버스 도입을 촉구하는 손팻말(출처 : 하성환)
<계단 버스>는 차별 버스이기에 장애인 이동권을 보장하기 위해 저상버스 도입을 촉구하는 손팻말(출처 : 하성환)

오이도역 사건(2001) 이후 장애인도 장애인 복지(?)시설에 갇혀 지내지 않고 일반 시민들처럼 일하고 공부하며 친구를 만나도록 이동권을 요구했다. 자유권적 기본권에 해당하는 최소한의 요구였지만 서울시는 예산 부족 타령만 하며 진척이 없었다. 그러자 장애인들은 2001년 2월 시청역 선로를 점거해 쇠사슬을 자신의 휠체어와 선로에 칭칭 감았다. 결국 장애인들은 경찰에 연행됐지만 그렇게라도 해야 기자들이 달려와 취재해 갔다. 그렇게 뉴스를 탔고 신문에도 한 줄 기사화됐다. 저상버스 도입 또한 마찬가지다. 모두 장애인들이 여론을 만들어가며 싸운 결실이다. 왜 오늘날 장애인들이 탈시설과 이동권을 절규하는지 이해가 가는 대목이다.

오늘날 서울 지하철 283곳 중 261개 역사에 엘리베이터가 설치돼 있다. 20년 동안 장애인들이 ‘비문명적 방식(?)’으로 발 벗고 나서서 싸운 눈물겨운 수고와 투쟁의 결실이다. ‘비문명적 방식(?)’에 손가락질하기보다 이젠 교육받은 사람답게 약자의 고통에 공감하고 연대할 줄 아는 성숙한 시민이 필요하다. 이동권 투쟁을 바라보는 일부 비장애인들의 불편한 시선은 ‘시험형 인간’으로 길러지고 ‘능력주의’에 경도된 한국 사회가 지닌 원죄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지성’이 빛나는 성숙한 시민이 절실히 필요한 시절이다.

편집 :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심창식 편집위원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ethics60@naver.com

한겨레신문 주주 되기
한겨레:온 필진 되기
한겨레:온에 기사 올리는 요령

저작권자 © 한겨레:온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