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성이 마비된 교육, 반(反)지성으로 질식된 사회

<전국 장애인 차별 철폐 연대> 활동가들이 지난 2022년 2월 8일 오전 서울 지하철 3호선 충무로역 승강장에서 <장애인권리 예산> 약속을 요구하며 지하철 타기 출근길 선전전을 벌이고 있는 장면. (출처 : 한겨레 신문 박지영 기자 사진과 글)
<전국 장애인 차별 철폐 연대> 활동가들이 지난 2022년 2월 8일 오전 서울 지하철 3호선 충무로역 승강장에서 <장애인권리 예산> 약속을 요구하며 지하철 타기 출근길 선전전을 벌이고 있는 장면. (출처 : 한겨레 신문 박지영 기자 사진과 글)

엊그제 서울시장 오세훈은 페이스북에 이런 말을 했다.

“1년 넘게 지속된 지하철 운행 지연 시위에도 시민들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로 극도의 인내심을 보여줬다. 그러나 서울시장으로서 이제 더 이상 시민의 피해와 불편을 방치할 수는 없다.” 그러면서 경찰력을 활용해 ”시위 현장에서 단호한 대처 이외에도 민⬝형사상 대응을 포함해 필요한 모든 법적인 조치를 다하겠다.”고 강한 어조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했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 “극도의 인내심”을 언급하며 “더 이상 시민의 피해와 불편을 방치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오시장의 표현은 “선량한 시민 최대 다수의 불편을 야기해서 뜻을 관철하겠다는 방식은 문명사회에서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비판했던 이준석 전 국민의 힘 당 대표의 생각과 일치한다. 최근에 화물연대 파업에서 ‘법치’를 강조했던 대통령을 닮아가는 표현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 현실은 정반대로 거꾸로다. 배려의 대상인 장애인들은 이미 수십 년 동안 ‘극도의 인내심’으로 버텨왔다. 공부를 하러 학교에 가는 것도 극도의 인내심으로 버텨왔고 생계를 위해 일하러 나가는 것도 극도의 인내심으로 버텨온 고난의 연속이었다. 집 바깥은 휠체어를 타고 다닐 수 없을 정도로 턱이 높다. 사람이 지나다니는 인도 역시 휠체어가 지나갈 수 없을 정도로 좁다. 어쩔 수 없이 외출하려면 인도를 피해 위험한 차도를 이용해야 한다.

20년 전에는 지하철 역사마다 엘리베이터가 없어서 목숨 걸고 리프트를 이용했고 저상버스가 없어서 버스를 이용할 수도 없었다. 한 마디로 집 밖을 나갈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그렇게 지체장애인들은 수십 년을 인내하며 존재하지 않는 듯이 살아왔다. 그게 예나 지금이나 대한민국이 처한 정직한 현실이다.

지하철 역사마다 엘리베이터가 설치되기 시작한 것은 20년에 지나지 않는다. 1999년 혜화역 사고, 천호역 리프트 사고에 이어 2001년엔 오이도역(지하철 4호선)에서 리프트를 이용하던 지체장애인이 추락 사망하는 사고까지 발생했다. 2002년엔 발산역(치하철 5호선) 1번 출구에서 리프트를 이용해 계단을 오르던 지체장애인이 굴러떨어져 사망했다. 2001년 오이도역 참사를 계기로 박경석 (노들장애인 야학 교장) 선생님이 ‘장애인 이동권 연대’(이하 ‘이동권 연대’)라는 단체를 만들었다. 그리고 세 가지를 정부와 서울시장에 촉구했다.

첫째는 서울을 비롯해 수도권 전체 지하철 역사에 엘리베이터를 설치하고 둘째는 저상버스를 도입하며 셋째는 장애인용 휠체어 콜택시를 운행하도록 촉구했다. 장애인도 비장애인과 똑같이 학교에 가고 일하러 나가거나 친구를 만날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똑같은 인권, 이동권을 누리고 싶은 처절한 외침이었다.

북유럽 국가에선 휠체어를 탄 장애인이 낯선 도시로 이사 오면 시장이 나서서 장애인 이동권을 세세히 보장해 준다. 인권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정치가 일상생활에서 목격되는 풍경이다. 그런 정책의 결과 장애인은 도서관이고 병원이며 자신이 가고 싶은 곳 어디든 자유롭게 다닐 수 있다. 휠체어가 나다니도록 턱을 모두 없앤 덕분이다. 프랑스도 활동보조인 덕분에 평생 누워서 살아가는 지체장애인이 파리 시내 어디든 자유롭게 이동한다. 눈물 날 정도로 부러운 풍경이다. 우리 대한민국은 정반대다. 장애인이 나서서 투쟁하지 않으면 변화가 없다.

서울 지하철 4호선 혜화역 2번 출구 앞에 있는 ‘장애인 이동권 요구 현장’ 동판. ‘1999.6.28 혜화역 장애인(장애인이동권연대 투쟁국장 이규식 님) 휠체어 추락사고 이후, 여기서 이동권을 외치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출처 : 한겨레 신문 장현은 기자의 사진과 글)
서울 지하철 4호선 혜화역 2번 출구 앞에 있는 ‘장애인 이동권 요구 현장’ 동판. ‘1999.6.28 혜화역 장애인(장애인이동권연대 투쟁국장 이규식 님) 휠체어 추락사고 이후, 여기서 이동권을 외치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출처 : 한겨레 신문 장현은 기자의 사진과 글)

1999년 혜화역 리프트 사고 이후 법원은 장애인 이동권을 인정하는 판결을 내렸다. 역사상 처음 있는 의미 있는 판결이다. 그러나 서울시는 엘리베이터 설치에 부정적이었다. 지하철 역사 구조상 설치가 어렵다거나 부족한 예산 타령만 되뇌었다. 그러자 ‘이동권 연대’ 장애인들이 합법 수단을 통해 시 정책 변화를 강력히 촉구했는데 모두 묵살 당했다. 시장 면담조차 무산되자 한층 투쟁의 수위를 높여 나갔다. 그 길밖에 없었다.

거리 시위, 점거 농성, 집단 삭발 투쟁, 항의 단식 투쟁, 심지어 지하철 선로 점거 농성 투쟁으로 치달았다. 그렇게 장애인 스스로 극한투쟁을 실천해야만 신문에 한 줄 기사가 나오거나 여론의 관심을 받을 수 있었다. 2001년 2월 장애인들이 서울 시청역 지하철 선로를 점거해 휠체어에 쇠사슬을 칭칭 감았다. 그러자 지하철이 멈추고 기자들이 달려오고 경찰이 장애인들을 경찰서로 끌고 갔다.

그 사건 이후 당시 이명박 서울시장은 2004년까지 지하철 엘리베이터 설치를 약속했다. 하지만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이동권 연대’는 계속 투쟁을 이어갔고 투쟁할 때마다 지하철 역사에 하나씩 엘리베이터가 설치돼 갔다. 다행히 노무현 정부 시절 교통약자법(2005)이 시행됐고 장애인 차별금지법(2007)도 시행됐다. 그러나 법에 의한 최소한의 보장이었다. 장애인들이 학교나 일터, 그리고 지인을 만나러 자유롭게 외출하기엔 여전히 넘어야 할 장애물들이 많다.

2020년대 이후 우리나라 장애인 복지예산은 OECD 평균치의 1/3 수준에 머물고 있다. 사회적 소수자인 장애인 복지예산이 형편없이 낮은 수준이다. 장애인들처럼 소수자 운동으로 조직화되지 못한 채 사회적 약자로 머물고 있는 노인 복지 예산은 더더욱 형편없다. 왜 OECD 국가 가운데 노인자살률 1위, 노인빈곤률 1위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2021년 4월 현재, 서울 지하철 283곳 가운데 261개 지하철 역사에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었다. 92%를 넘겼지만 아직도 22군데 지하철 역사엔 엘리베이터가 설치돼 있지 않다. 저상버스 도입도 겨우 56%를 넘겼을 뿐이다. 서울 시내 마을버스에 저상버스가 도입된 것은 지난해 서대문구(6대)와 동작구(2대)가 최초였다.

이웃 나라 일본이나 선진국 호주는 시영버스가 존재하기에 저상버스 문제가 쉽게 해결된다. 우리는 버스가 100% 민간회사 소유다. 국가가 나서야 할 공적 영역임에도 <자유>를 강조하는 시장경제체제에 방임하고 방치한 탓이다. 그만큼 저상버스 도입도 더딜 뿐 아니라 여전히 갈 길이 멀다. 오늘날 장애인 단체는 리프트를 ‘살인 기계’로 인식한다.

2018년 8월21일 오후 시청역 지하철 1호선 안에서 <장애인 차별 철폐 연대> 회원들이 시민들에게 지하철 장애인 휠체어 <리프트 철거>와 <승강기 설치>의 필요성을 호소하고 있는 장면. (출처 : 한겨레 신문 김진수 기자의 글과 사진)
2018년 8월21일 오후 시청역 지하철 1호선 안에서 <장애인 차별 철폐 연대> 회원들이 시민들에게 지하철 장애인 휠체어 <리프트 철거>와 <승강기 설치>의 필요성을 호소하고 있는 장면. (출처 : 한겨레 신문 김진수 기자의 글과 사진)

그리하여 2018년부턴 지하철 역사 내 엘리베이터 설치 투쟁과 함께 리프트 철거 투쟁을 동시에 진행하고 있다.

오늘날 지하철 엘리베이터는 장애인뿐만 아니라 할아버지, 할머니, 어린 아이, 임산부, 유모차를 끄는 젊은 부모들도 쉽게 이용한다. 아주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풍경이다. 교통약자에 대한 배려 정책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약자에 대한 배려가 구조화되고 일상화된 사회가 인간의 얼굴을 한 성숙한 사회라는 데엔 이견이 없다. 모두 ‘이동권 연대’(오늘날 ‘전국장애인 차별 철폐연대’, 약칭 ‘전장연’) 투쟁의 눈물겨운 헌신의 결실이다. 아니, 정확히 표현하면 오늘날 지하철 엘리베이터에는 리프트 사고로 목숨을 잃은 장애인들의 희생과 슬픔, 그리고 고통의 역사가 배어 있다.

‘전장연’이 지난 1년 넘게 진행하고 있는 지하철 운행 지연 시위 투쟁에 대해 일부 시민들이 눈살을 찌푸리거나 욕설을 내뱉는 경우가 있었다. 성숙한 시민의 모습이 아니다. 더구나 그런 미성숙한 시민들의 분노에 편승해 수구 언론들이 여론을 조성하는 것은 여론조작이나 마찬가지다.

더구나 미성숙한 시민들의 분노와 수구 언론이 만들어 낸 여론을 빌미로 서울시장이 “극도의 인내심”을 언급하며 “더 이상 시민의 피해와 불편을 방치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적반하장이자 반(反)지성의 극치다. 한국 사회는 반(反)지성으로 질식된 사회이자 성찰 없는 사회다.

<전국 장애인 차별 철폐 연대>(전장연) 회원들이 2022년 3월 28일 오전 서울 경복궁역 3호선 승강장에서 <장애인 이동권 보장·장애인 권리예산> 반영을 요구하기 위해 출근 시간대 지하철 시위를 시작하기에 앞서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이날 시위에는 장혜영 정의당 의원과 김예지 국민의힘 의원이 자신의 안내견과 함께 참석했다. 김예지 의원은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를 대신해 사과하며 무릎을 꿇기도 했다. (출처 : 한겨레 신문 신소영 기자의 사진과 글)
<전국 장애인 차별 철폐 연대>(전장연) 회원들이 2022년 3월 28일 오전 서울 경복궁역 3호선 승강장에서 <장애인 이동권 보장·장애인 권리예산> 반영을 요구하기 위해 출근 시간대 지하철 시위를 시작하기에 앞서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이날 시위에는 장혜영 정의당 의원과 김예지 국민의힘 의원이 자신의 안내견과 함께 참석했다. 김예지 의원은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를 대신해 사과하며 무릎을 꿇기도 했다. (출처 : 한겨레 신문 신소영 기자의 사진과 글)

평생을 아니, 최소한 20년을 넘게 엘리베이터 설치를 촉구하며 선로에 쇠사슬을 감아 묶은 뒤 극한투쟁을 이어오며 ‘극도의 인내심’으로 살아온 장애인들 삶을 모독하는 표현이다. 누가 ‘극도의 인내심’을 발휘하며 살고 있는가? 글쓴이는 서울시장에게 묻고 싶다. 지하철 10분, 15분 지연되는 것이 ‘극도의 인내심’인지 아니면 20년을, 평생을 그렇게 차별을 받으며 살아온 장애인들이 ‘극도의 인내심’을 발휘하며 살아온 것인지 되묻고 싶다.

역사를 조금만 제대로 들여다 본다면 인권의 역사는 피와 눈물로 점철된 저항과 투쟁의 역사였다. 여성 참정권 운동만 하더라도 남성들이 제 손으로 여성의 정치참여를 허용하지 않았다.  국회 청원, 항의 시위, 농성은 물론이고 아무 연고 없는 거리 상점들 유리창을 죄다 부수는 격한 투쟁도 마다하지 않았다. 심지어 우체통에 폭탄을 터뜨리기도 했다. 충격요법이었다. 그래야 여성들의 목소리가 언론에 나오고 사회의제로 떠오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늘의 눈으로 보면 사회혼란을 야기하는 중범죄에 해당하는 극렬 행동임에 틀림없다. 

그러함에도 20세기 초 영국 사회 남성들은 <여성들은 정치에서 판단력을 행사하기에는 너무 감정적이고 쉽게 냉정을 잃는다>며 반대했다. 심지어 <여자들에게 투표할 권리를 준다면 사회 구조가 무너질 거>라고 여론을 흔들어댔다. 오직 <여자의 권리는 그녀의 아버지나 남편을 통해 잘 이루어지고 있다>며 여성 참정권 운동에 나선 여성들을 조롱하고 무시하며 구타를 일삼았다. 그러나 의식적으로 자각한 여성들은 당대 주류 언론과 남성들이 퍼뜨린 낡은 이데올로기에 갇혀 있지 않았다. 동등한 인격체로, 그리고 당당한 사회역사의 주체로 여성참정권 획득을 향한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그게 불과 100년 전 일이다.   

오늘날 학교 교육은 병든 상태다. 중병을 앓고 있다. 학생들은 시험에 나오는 지식만 기억하고 달달 욀 뿐 생각하는 능력을 기르는 데 힘쓰질 않는다. 지성의 힘을 기르는 비판적 사고나 공감 능력을 키우는 배려의 도덕성을 기르지 않는다. 나아가 공화국 시민으로서 더불어 살아가고자 하는 시민성, 바로 협력과 연대의 정신을 중요시하지 않는다. 오직 자신의 운명(?)을 가르는 시험경쟁에서 승리하는 것에 온 신경이 곤두서 있다. 이는 극단적 개인주의로 대부분 어린 학생이나 부모도 그런 상황으로 내몰린 처지다. 정글 속에서 각자도생! 바로 한국 사회 자화상이다.

얼마 전 화물연대 파업에서 보인 여론 조사 결과는 바로 그런 반(反)지성을 가리키는 지표였다. 파업 후 며칠 시간이 흐르자 국민 절반 이상이 화물연대 파업에 싸늘한 눈길을 보냈다. 일부 언론은 화물연대 파업을 <극단적 노동운동>으로 몰아부쳤다. 그들이 왜 파업을 했는지 알아보려는 노력은 고사하고 당장 일상의 불편과 국민 경제에 엄청난 해악을 끼친다는 주류언론에 포획된 탓이다. 이런 현상은 지성의 마비와 극단적 개인주의가 아니면 설명할 길이 없다. 산재사고로 1년에 10만 명에 이르는 산재사고 부상자가 발생하고 해마다 2,000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죽어 나가는데도 변화의 미동도 없는 한국 사회는 이미 지성이 마비돼 인간의 조건마저 실종된 상태다.  

유최안 금속노조 거제통영고성 조선하청지회 부지회장은 2022년 6월 22일 대우조선해양 옥포조선소 제1도크(배 만드는 곳)에 1㎥의 철제감옥을 용접해 만든 뒤 31일 동안 스스로를 가뒀다. 51일간의 파업이 끝나자 대우조선해양은 유 부지회장을 포함한 하청지회 간부 5명에게 470억원의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손배가압류를 막을 수 있는 노란봉투법(노동조합법 2·3조 개정) 통과를 촉구하며 혹한의 추위 속에서 28일째 단식 농성을 이어오던 유최안 부지회장은 12/27일 오후 급격한 건강 악화로 병원으로 긴급 이송됐다.(출처 : 한겨레 신문 김명진 기자)
유최안 금속노조 거제통영고성 조선하청지회 부지회장은 2022년 6월 22일 대우조선해양 옥포조선소 제1도크(배 만드는 곳)에 1㎥의 철제감옥을 용접해 만든 뒤 31일 동안 스스로를 가뒀다. 51일간의 파업이 끝나자 대우조선해양은 유 부지회장을 포함한 하청지회 간부 5명에게 470억원의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손배가압류를 막을 수 있는 노란봉투법(노동조합법 2·3조 개정) 통과를 촉구하며 혹한의 추위 속에서 28일째 단식 농성을 이어오던 유최안 부지회장은 12/27일 오후 급격한 건강 악화로 병원으로 긴급 이송됐다.(출처 : 한겨레 신문 김명진 기자)

가로 세로 높이 1m 쇠창살을 직접 제작해 “이대로는 살 수 없지 않느냐”며 “국민 여러분! 죄송합니다. 우리는 살고 싶다”며 절규한 대우 조선 해양 하청 노동자들의 투쟁도 마찬가지다. 당시 행안부장관 이상민은 경찰특공대 투입을 언급할 지경이었다. 2009년 쌍용차 파업 당시 경찰특공대 투입이 떠오를 정도로 어질어질했다. 게다가 대우 조선 해양 사업주는 하청 노조에 470억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마치 쌍용차 손배가압류의 악몽을 떠올리는 장면이다. 이게 정상국가의 모습인지 부끄럽고 욕스럽다. 

오늘날 대학입시를 향해 틀 지워진 학교 교육은 ‘시험형 인간’만을 양산해 왔다. 그들 가운데 시험에 합격해 수직 상승한 사람들은 승리의 오만함 속에 살아가고 시험에 떨어진 다수의 학생들은 열패감 속에 평생을 살아간다. 박근혜 정권 시절, 행정고시에 합격한 어느 교육부 고위 관료가  국민을 개돼지로 생각하며 자신은 상위 1%를 지향하는 삶을 거침없이 기자들 앞에서 피력한 적이 있다. 이런 <시험형 인간>에게서 인간에 대한 연민과 공감, 그리고 사회적 약자에 대한 연대의식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무엇보다 무서운 사실은 ‘시험형 인간’을 목표로 정형화된 학교 교육이 예나 지금이나 그런 괴물엘리트를 수없이 양산해 왔고 오늘날도 양산하고 있다는 데 있다. 지성이 마비되고 양심조차 실종된 괴물엘리트들이 우리 사회를 지배할 때, 그리고 그들의 입으로 사회정의와 공정, 그리고 법치주의를 남발하고 독점할 때 그 사회는 절망적이고 치욕스럽다.

<민주시민교육>을 반대하는 토론회가  2022년 11월 21일 국민의 힘 국회의원, 한국 교총, 한국교육정책연구소를 중심으로  개최한 포스터(출처 : 국민의 힘 국회의원 김기현, 김원태 학교시민교육연구소장 제공)
<민주시민교육>을 반대하는 토론회가 2022년 11월 21일 국민의 힘 국회의원, 한국 교총, 한국교육정책연구소를 중심으로 개최한 포스터(출처 : 국민의 힘 국회의원 김기현, 김원태 학교시민교육연구소장 제공)

하루빨리 차별과 배제, 경쟁 교육이라는 정글을 벗어나서 존중과 협력, 그리고 공감과 연대의 정신을 길러내는 학교 민주시민교육을 뿌리내려야 한다. 시간이 없다.

편집 :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김미경 편집장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ethics6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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