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8년 안내면 정호택

장자의 소요유(逍遙遊)편에 굽은 나무이야기가 있다. 쓸모없어서 목수가 베어가지 않는 나무. 하지만 그 나무 그늘에서 많은 사람들이 쉬며 한숨을 돌린다. 세상에 쓸모없는 존재는 없다 라는 장자의 사상이다. 어르신이 그런 분이셨다. 사나이가 무엇일까. 남자들은 ‘사나이’라는 올가미에 갇혀 힘든 인생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 눈물을 보여서도, 약한 모습을 보여서도 안 된다는 누가 심어놓은 진리인지 알 수 없지만 벗어날 수 없는 창살 없는 감옥이었다. 섬 마을의 영특한 소년이었고 세상에 나가 큰 꿈도 펼쳐보고 싶었지만 세상만사 뜻대로 되지 않아서 굽은 나무로 살아보니 그 존재감을 뒤늦게 깨달으셨다며  “지금 이대로가 좋아”라고...


■ 육지속의 섬마을 막지리 섬 소년 

우리 어린시절에는 안내면 막지리라고 불렀다. 군북면으로 행정구역이 바뀌었고 보리농사 조금 지어먹으면서 근근이 끼니를 연명하고 있던 집안의 8남매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도 글을 좀 아는 분이라 나는 어렸을 때부터 중용이며 한학 공부를 즐겨 했었다. 대단하지는 않지만 학교에서 공부도 잘했던 아이다.

우리 고향은 백사장이 너무 고와서 가끔씩 눈을 감고 80년 전을 떠올리면 길다란 백사장 길에서 노는 아이들의 모습이 그려진다. 물론 그 그림 속에는 나도 있고 친구 종수, 영춘이, 대식이도 있다. 지금은 다들 하늘나라로 먼저 떠나 나만 덩그러니 서 있는 외로운 그림이다. 여덟 살 꼬마는 아침마다 장고개에 올라 “나는 여기를 떠날거야” 라며 혼자서 큰소리 뻥뻥 치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산을 내려와 꽁보리밥을 몇 술 뜨고 책보를 매고 학교로 달려가던 아이였다. 다들 가난하게 살아서 우리 우물안 개구리들은 세상이 그렇게 생긴 줄만 알았다.


■ 나를 낳아주신 부모님, 세상에 눈을 뜨게 해주신 작은 아버지

유년의 나는 작은 아버지가 보시기에 시골에 두기에는 아까운 아이였다. 청주에 계신 작은 아버지가 아버지께

“형님 호택이는 제가 데리고 가서 공부 시키겠습니다”

얼마나 반가운 소리인지 시골에서 그냥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열두 살, 나는 새로운 세상에 나간다는 마음에 청주로 떠나기 전날 밤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새벽녘 한숨소리에 툇마루에 나가보니 어머니께서 휘영청 뜬 달을 물끄러미 올려다보고 계셨다. 

“어머니 뭐하세요?”

“너는 좋냐? ”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 때는 그 속 깊은 심정을 다 알 수 없었지만 당신 자식을 시동생에게 맡길 수밖에 없는 궁색한 형편에 가슴이 찢어지신 것이다. 어머니 마음까지 들여다보기엔 어렸고 다음날 아침 떠나오는 길 어머니가 손 한번 잡아보자며 내 손을 꽉 잡으셨다.

아... 생각해보니 어머니의 손을 잡아 본적이 한 번도 없었다.

밭일이며 집안일, 할아버지 병수발까지 물기 마를 날이 없던 어머니의 손은 여자 손이 아니었다. 거친 나무껍질 같던 어머니의 손을 지금도 기억한다. 


■ 우물밖으로 나왔지만 세상은 호락호락 하지 않았다

청주로 나가 작은 아버지 집에 기거하면서 청주중고등을 거쳐 충북대학교를 다녔다. 작은 어머니께서 고생이 많으셨다. 작은 아버지의 쥐꼬리만한 교사 월급으로 6남매에 나까지 덤으로 졸지에 7남매를 키우게 되셨다. 시골집에서 간간이 쌀가마니가 왔지만 작은 집 생활에 얼마나 보탬이 됐을지는 나도 모른다. 한창 먹을 나이였지만 밥상에서 눈치 보면서 밥을 먹고 나로 모르게 주눅이 들었다. 여섯 명의 사촌들과 모두 잘 지낼 수 없어 간간이 불협화음도 있었지만 그 속에서 타협하는 방법도 배워나갔다.

방학이면 집에 돌아와 부모님 일손도 돕고 친구들과 백사장에서 회포를 풀기도 했다. 친구들은 섬마을에서 다시 부모의 농사일을 물려받고 그렇게 작은 마을을 지키는 이름 없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들 눈에는 내가 대단해보였지만 나도 결국 눈칫밥 먹으면서 공부라는 허울 좋은 명분을 갖고 시골을 떠나있던 그저 그런 사내였다.

영어교사가 되어 동료교사인 아내와 만나게 됐다. 그 시절에 연애라는 것을 했다. 아내는 인사성이 아주 바르고 야무진 후배교사였다. 마음에 들었지만 바로 호감을 표시하기에는 내가 짊어진 짐이 많았다. 동생들 그리고 부모님, 아내는 양조장 하던 집의 막내딸이었다.

어느 날 아내가 내 책상위에 쪽지를 두고 갔다. 몇 시에 어디서 만나자고...  

아내는 대단했다. 나는 약속 장소에 나갔고 내가 먼저 프로포즈를 못해서 미안하다고, 내 형편이 당신한테 관심을 표명하기에 너무 부족하다고. 적나라한 나의 여건을 모두 털어 놓고 아내의 처분만 기다렸다. 아내는 이미 나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있었다. 고마운 사람.

고향집에 인사드리러 가던 날 작은 배를 타고 마을을 들어가면서 아내는 한숨을 쉬었지만 우리 어머니를 보자마자 아내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고생 많은 어머니를 알아차린 아내가 너무 감사했다. 50호 정도 시골마을에 호택이 결혼할 여자가 온다니 동네가 난리가 났다.

더군다나 청주에서 선생하는 여자라니 장가 잘가게 됐다고 아내를 구경 온 동네 사람들로 우리 집 싸리 대문 앞이 북적거렸다. 싫은 내색 안하는 아내가 고마웠고 아내는 내 유년시절을 눈으로 보고 청주로 돌아왔다. 청주로 돌아오는 길, 우리는 덜커덩 거리는 버스 안에서 손을 꼭 잡았다.

우리 결혼의 걸림돌은 처갓집이었다. 시골태생에 농사나 겨우 짓고 근근이 먹고 사는 8남매의 장남한테 시집보내려니 양조장집에서는 못마땅한 것이 당연하다. 아내는 금지옥엽같은 딸이었다. 병원집과 중신이 오가고 있었는데 학교에서 연애를 걸어 박봉의 동료 교사를 인사 시키러 데려 왔으니 장모님의 불만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나한테 눈길한번 안주시는 장모님이 서운했지만 장인어른이 내 품성이 좋아 보인다고 모주를 건네주셨다. 시골에서 많이 먹던 모주, 막걸리 찌끼미에 한약재를 타서 아버님이 해장술로 드시던 술이다. 장인어른과 나눈 모주 한잔에 그날의 서운함이 사라졌다. 시작부터 삐거덕 거리는 결혼이었지만 장인어른의 배려로 우리는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우리도 4남매를 낳고 부부교사로 평범한 시민의 삶을 살고 있었다. 시골에 남은 동생들도 배움은 많지 않지만 농사일이며 목수일로 다들 밥벌이를 하면서 자기 자리에서 다들 무탈한 일상을 살고 있었다.

방학이면 아이들을 데리고 시골에 가서 며칠씩 있다 오곤 했다. 우리 아이들도 착해서 아이들은 “할머니가 만들어 주는 수제비와 만두가 너무 맛있다”며 불편한 시골집에 가는 걸 꺼려하지 않았다. 특히 우리 막내딸은 할머니가 너무 좋다며 늘 땀에 젖어 쿰쿰한 냄새 나는 우리 어머니 품에서 “할머니 냄새 좋다”고 애교를 부리기도 했다. 천성이 착한 아이였다.

부부교사시절 우리 뒷모습이 아름답다고 동료교사가 찍어준 사진
부부교사시절 우리 뒷모습이 아름답다고 동료교사가 찍어준 사진

 
■ 가장 가혹한 날, 피붙이의 죽음


우리 막내딸이 고등학교 1학년 때 아침 밥상에 나타나지 않았다. 아직 잠들어 있나 싶어 딸 방으로 가보았더니 우리 아이가 핏기 없이 고개를 옆으로 떨군채 누워있었다. 순간 숨을 쉴 수 없었다. 머리끝이 쭈뼛해지면서 다리가 후들거렸다. 딸 방은 이미 문을 열자마자 연탄가스 냄새로 자욱했다. 아! 딸은 그 밤에 연탄가스를 맡고 하늘나라로 먼저 떠나버리고 말았다. 오빠들은 셋이 방을 같이 쓰고 고명딸이라 혼자 방을 쓰게 했었다. 아내의 절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손녀딸을 땅에 묻은 어머니의 통곡은 피가 말라버리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우리 가족은 막내의 죽음 앞에서 망연자실했고 일상으로 회복하기 까지 오랜 시간을 견뎌야 했다. 딸을 보내고 그 이듬해 간암으로 복수가 차올라 숨을 쉬기도 어려웠던 어머니의 상여를 매고 선산에 올라야 했다. 사랑하는 피붙이를 떠나보내는 날은 정말 너무 가혹하다.

아내는 딸을 보내고 너무 힘든 나머지 결국 학교를 퇴직하고 한동안 우울증에 시달려야 했다. 우울증으로 힘들던 아내는 결국 치매라는 불청객과 만나게 되었다. 아내의 치매는 나 스스로 자괴감에 빠지게 되는 심리적인 압박감으로 너무 힘들었다. 부잣집 딸이었던 아내, 나를 만나지 않았으면 장밋빛 인생이었을 텐데 나를 만나 고통스런 삶을 사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에서 멈추면 나또한 견뎌내기 힘들었다.

친구들
친구들


■ 굽은 나무 

지금은 우리 부부 고향 안내로 돌아와 작고 예쁜 집을 짓고 나는 아내를 돌보며 지내고 있다. 주말이면 아이들이 손주를 데리고 찾아와 아내를 기쁘게 하지만 아내는 사실 그 아이들이 누구인지 잘 모른다. 그저 자주 보는 아이들이라 아내도 덩달아 기뻐하지만 아내의 기억은 이미 소실되었다.

나만 알아보는 아내, 둘째 며느리가 우리 딸을 많이 닮아서 인지 영주야 영주야 부르며 좋아하는 아내를 보면 가슴이 찢어지지만 나는 정신을 놓을 수 없다. 나도 하루하루 기력이 쇠하지만 지금 소원은 아내와 같이 손잡고 먼 여행을 떠나면 바랄 것이 없겠지만 그런 축복이 나에게 찾아올까? 아내보다 하루 더 늦게 여행 떠나는 소원만 남아 있다.

결국 시골을 떠나 큰 세상에 나가 꿈도 펼치고 싶었지만 고향으로 돌아와 시골마을의 이름 없는 할아버지가 되었다. 아픈 아내를 보면 가슴이 찢어지지만 아내와 산보하고 며느리들이 냉장고 칸칸이 쌓아놓은 반찬들을 내 손으로 꺼내서 아내와 겸상을 하는 이 하루하루가 이토록 귀한 줄 이제 알게 되었다. 울창한 숲의 우뚝 선 나무는 아니지만 오래도록 그 숲을 지키는 굽은 나무가 되어보니 목수의 도끼질도 두렵지 않고 바람 냄새, 풀 냄새, 흙냄새까지 향기롭다. 나의 묘비명은 [굽은 나무로 살다 아내 손을 꼭 잡고 다시 흙으로 돌아가 그리운 이들을 만나는 소망을 간직했던 凡夫(범부)]

※ 이 기사는 옥천신문과 제휴한 기사입니다. 
기사 원문 보기 : http://www.okcheoni.com/news/articleView.html?idxno=12357

편집 : 김미경 편집위원

김경희 옥천신문 객원기자  minho@o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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