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정리 이정희어머니 83세

이 강산 낙화유수 흐르는 봄에 
새파란 잔디 엮어 지은 맹세야
세월에 꿈을 실어 마음을 실어
꽃다운 인생살이 고개를 넘자
낙화유수 네 글자에 마음이 살짝 흔들린다 
어여쁘던 꽃이 물위로 진다.
결 따라 흘러간 꽃잎은 어디로 갔나 

이정희 어머님이 소녀시절부터 잘 부르시던 남인수 선생님의 ‘이 강산 낙화유수’ 노랫말이다. 어머니께서 세월의 질곡과 무게를 알기 전부터 유난히 좋아했던 노래였다. 당신의 삶을 예견이라도 한 것처럼... 열 살 무렵 무심코 흥얼대던 노랫말처럼 인생이 흘렀다. 질곡의 삶을 견뎌내고 이제 석양의 노을처럼 아름다운 황혼을 만끽하고 계신다. 점심선약이 있으셔서 짧은 시간 들려준 어머니의 이야기는 노을처럼 지고 있지만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 목소리를 가둬놓아서 예전 노래 소리가 그립다 

기억은 왜 그리 아플까, 추억은 그립고 따뜻한데 ….

영동이 고향인 나는 영동 중앙동 읍내에서 성장하면서 영동여고까지 다녔다. 꿈이 너무 컸던 시골 아가씨라 스물두 살에 시집을 가는 것은 나에게 처음으로 닥친 위기였다. 아무것도 몰랐던 때이기도 하지만 왠지 고단한 인생이 펼쳐질 것 같아 선뜻 내키지 않은 결혼을 하게 됐다.

돌이켜보면 우리 동년배들의 결혼이라는 것이 자기 결정권은 존재하지 않았다. 신랑 얼굴 구경도 못하고 첫날밤을 맞이한 이들도 있으니 나는 싫다고 마음의 감정을 드러낼 수 있던것 만으로도 위안 삼아본다.

꿈 많았던 정희가 결혼이라는 소용돌이에 빠지면서 인생의 굴곡을 맞게 된다.
내 유년의 뜰에는 예쁜 꽃만 심었다. 노래 잘해서 콩쿨에 나가 상도 타고 뜀박질도 성큼성큼 잘했다. 남한테 지는 거 싫어해서 공부도 곧잘 했고 못 하는 게 없었다.

땅거미가 지면 학교 강당으로 달려가 혼자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면서 사춘기 소녀의 꿈을 키웠다. 밤이면 부모님 몰래 촛불 켜놓고 공부하던, 꿈으로 꽉 찬 10대의 꽃다운 시절이 있었다. 무심한 세월은 소리도 없이 70년을 달려와 어느 결에 8학년 3반 이정희라는 명찰을 달았다.

 


■ 결혼으로 좌절된 스물두 살 시골 아가씨의 꿈

친정은 먹고 살만한 집이었다. 부모님은 농사도 짓고 어머니가 요식업을 하셨다. 내가 ‘잔치방’을 하면서 한 시절을 풍미할 수 있던 것도 어머니의 손맛을 대물림 받은 것이다.

우리 친구아들이 결혼식한다고 청주에서 잔치방을 불렀는데 음식을 먹어보니 ‘이 정도쯤이야’ 라는 자신감이 생겨서 나도 잔치방을 열게 되었다. 지역의 유명인사들 잔치에도 음식을 내고 잔치를 돋보이게 만들어주었다. 내 손맛과 솜씨로 잔치를 풍성하게 만들어주는 보람도 컸고 뿌듯했다. 

꽃다운 나이, 22살에 결혼했다. 결혼 전 나는 여고를 졸업하고 구세군 영동 종합병원에 원서를 내고 원무과에 합격한 상태였다. 사회생활을 시작한다니 유교문화에 젖어있던 부모님들은 ‘바람난다는’ 말로 나의 직장생활을 반대하셨다.

부모님은 여자는 집에서 조신하게 신부 수업하다 결혼하는 것이 여자의 길이라고 결정하셨다. 꿈이 좌절되는 고통과 하고 싶지 않은 결혼을 해야하는 고통이 맞물려 갓 스무 살이 넘은 내가 만난 운명의 올가미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다. 

우리 이웃의 피복사 하는 언니의 시동생이 우리 영감님과 군대 동료라 중신을 섰다. 휴가 때 같이 나와서 우리 집에서 묵게 되었다.

우리 어머니는 사윗감이 마음에 쏙 들었다. 인물이 훤칠하고 이북에서 내려와 혈혈단신이었지만 외동딸이던 내가 층층시하 시집살이 안해도 된다며 어머니가 더 애가 닳았다. 나는 힐끗 얼굴을 보니 인물은 준수했지만 썩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그러나 영동에서 나고 자라 대전도 나가보지 않았던 내가 서울 가는 열차에 올라 버스를 다시 갈아타고 엉덩이가 들썩이는 시골버스로 강원도 화천이라는 곳으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부대 앞 마을에 단칸방을 얻어서 살림을 차리고 사과 궤짝위에 그릇을 오종종 올려놓고 소꿉장난 하듯이 신혼 생활을 시작했다. 아궁이 불을 떼면서 피어오른 연기 속에 내 타는 속과 눈물이 같이 묻혀 버렸다. 혼자만의 가슴앓이가 시작되었다. 그나마 연기처럼 사라져 아무도 내 마음을 몰랐다. 

약혼사진 하나 찍고 고향에서 천리 길을 떠나왔다. 화천은 유난히 추운 곳이라 겨울에는 3시만 되면 해가 떨어지고 영동에서 눈 구경 제대로 못하던 시절에 눈이 무릎까지 빠지는 그런 곳이었다.

내가 부모님 성하에 마지못해 결혼한 것을 남편도 알고 있는지라 남편도 나에게 데면데면 했다. 내내 겉도는 남편을 바라보면서 외롭고 쓸쓸한 하루하루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뱃속에 아이가 태동을 시작하면서 마음의 소용돌이는 더 커졌지만 나는 아내가 아닌 엄마로서 견뎌내야 할 몫이 또다시 주어졌다. 입덧이 심해 고향으로 잠시 내려왔다. 


■ 운명이라는 올가미 

남편도 상처가 많은 사람이라 나를 보듬고 챙기기에는 본인 마음의 짐이 더 컸다. 남편은 회오리바람 같은 청년기를 군에서 보내면서 가정은 등한시 하고 겨우 3천500원이던 월급도 제때 주지 않아서 나는 생면부지 강원도에서 젖동냥까지 하게 되었다. 몸과 마음이 너무 힘들었던지 젖이 나오지 않았다.

우는 아이를 달래면서 젖동냥 하는 속은 새까맣게 타들어갔고 내 운명은 도대체 어디로 흘러가는지 알 수 없어 그저 안개 속 같았다. 끝이 보이지 않는 아니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운명 앞에서 망연자실했다. 어머니에 대한 원망도 있었지만 어머니에게 힘든 내색을 할 수는 없었다.

연년생으로 아기가 생겨 어머니가 우리 큰애를 데리고 갔다. 외갓집에서 큰 아들이 성장해서 어머니도 힘들고 간간이 친정 가서 아들을 보면 우리 아들이 할아버지로 뒤로 숨으면서 나를 어려워 할 때는 마음이 다 무너져 내렸다.

아버지는 손자가 안쓰러워서 밥이 식을세라 밥그릇도 품속에 품었다가 먹여주셨다. 멀쩡한 부모가 살아 있음에도 할아버지랑 소풍을 다녀야하는 아들의 마음에 일었던 파문을 진정시켜주지도 못했는데 이제 환갑을 맞는 우리 아들은 부모를 잘 챙겨준다. 미안하고 고맙다는 말밖에 다른 말을 찾을 수가 없다. 

남편은 어느 날 발가벗겨져 담요에 쌓인 아이를 안고 들어왔다. 아이를 보니 어찌나 불쌍한지 원망도 미움도 없이 그저 불쌍했다. 진위여부는 둘째 문제, 그저 그 아이가 안쓰러워서 키울 생각이었다.

그 일로 남편은 군 생활에도 위협을 당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우선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려고 도움을 요청하고자 친정으로 가는 길은 혀 깨물고 죽고 싶은 마음밖에 없었다. 이모의 도움으로 한고비 넘기게 되었다. 억장이 무너졌지만 다시 강원도 집으로 돌아와 보니 그새 아이가 없어져 절규 할 수밖에 없었다. 


한 사람으로 인해 기구한 운명의 덫에 걸린 사람들이 여럿이었다.

비단 우리 영감님뿐만 아니라 그 시절의 남정네들은 어쩌면 그리도 무심하고 여인네들 속을 다 타버리게 만들었는지...세월이 야속해서 힘든 시절을 살다보니 남자들은 내 설움 니 설움 술로 위로받고 순간순간에 원치 않은 일들에 휘말리곤 했다.

그러려니 하기엔 너무 힘든 나날이었지만 나는 한 고비 한 고비 넘기며 살아내고 있었다. 

결국 내 운명은 내가 열어야 한다는 결심을 낳았고 돈벌이 일터에 나가야 했다. 도로공사 현장에서 박스에 흙을 하나 채우면 표를 하나 준다. 밀가루 배급 받을 수 있는 표였다. 쌀집마다 외상값 있어서 도로위에서 몸으로 부딪치면서 밀가루를 얻어 겨우 끼니를 때웠다. 

학생들 하숙도 쳐보았고 과수원에 가서 나무도 잘라주고 벽돌도 져서 나르면서 품팔이를 할 수밖에 없었다. 동네에 해삼 팔러 오는 아주머니가 “삼을 받아서 한 번 팔아보라”고 권하기도 했다. 몸이 힘들어도 가리지 않았다.

화장품 외판원을 하면서 돈을 좀 만져보기도 했다. 구루무만 바르던 여자들 보다 요정 아가씨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다 보니 짭짤한 수입이 되기도 했다. 말 그대로 안 해본 게 없는 여자다. 우리 아이들에게 엄마로서 부채의식이 있어 몸이 힘들어도 부끄럽지 않게 살았다.

 

■ 모든 것은 다 지나간다 

고난의 시간들이 지나고 관광업을 하던 남편 따라 옥천에 와서 노년을 보내고 있다. 몸이 불편한 남편은 내 젊은 날 나를 담금질 시켰지만 나는 그이의 동반자로 해로 하고 있다.

운명이라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다.

어쩔 수 없지만 받아들이고 또 그 과정에 연민이 싹트고 그리고 동행을 하게 된다.
모든 부부가 사랑의 운명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숙명 앞에서 측은지심으로 함께 하는 것도 거스를 수 없는 인연이다 나는 운명에 순응했다.

이제 8학년 3반이지만 아직도 노다지 외식하기 바빠서 우리 영감님한테 미안하기도 하다. 

나이 들어 사회활동도 많이 하고 소녀시절 못 이룬 꿈들을 나이 들어서 하나씩 풀어가고 있다. 젊은 시절에는 여든이 넘은 나를 상상하기조차 싫었다. 이렇게 편안한 노년의 안식이 찾아오다니...

휴... 그래, 모든 것은 다 지나간다.

 

* 이 글은  옥천닷컴(http://www.okcheoni.com)과 제휴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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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 김미경 편집위원

김경희 옥천신문 시민기자  minho@o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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