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내면 여순자 어르신(1944~)

 

“엄마!”

마당을 가로질러 걸어오는 단발머리 여학생이 환하게 웃는다. 많이 본 얼굴 우리 큰 딸 형숙이와 너무 닮았다. 코앞에 닿으니 우리 동네로 이사 온 우리 큰 딸 형숙이가 맞다. 단발머리 여학생이던 형숙이와 쉰을 넘긴 형숙이. 세월을 타고 나이 들어가지만 내 눈에는 여전히 단발머리 예쁜 딸 그 모습 그대로다. 반찬을 만들어 달랑달랑 들고 나를 찾는 우리 큰 딸은 삼성에 다니던 사위가 은퇴하고 우리 동네로 이사를 왔다. 예쁜 집에서 텃밭 대신 꽃 가꾸며 따뜻하게 사는 우리 형숙이. 아, 큰딸을 지척에 두고 친구처럼 노년을 보내는 이 행복한 일상이 내 것이라니...

주말이면 달그락달그락 그릇 부딪치는 소리, 손자들 웃음소리로 적막강산 같던 집은 시끌벅적 사람 사는 집이 되어 반가운 손님을 맞는다. 별거 없는 닭도리탕인데 할머니 닭도리탕이 제일 맛있다고 땀을 뻘뻘 흘리며 먹는 우리 손자들 다들 젓가락 드나들기 바쁘다. 시골 할미라 묵은김치 깔고 고추장 풀어 만든 투박한 솜씨에도 맛있다며 빈말해 주는 손자들이 내 기쁨이다. 걱정이 없는 요즘이다. 이제 뜨거운 폭염을 지나고 새벽이면 이불을 끌어다 슬그머니 배 위에 얹어야 하는 때가 왔다. 귀뚜라미 소리도 저녁이면 제법 암팡진 울음으로 귓전을 때린다. 우리의 인생도 그러하듯이. 귀뚜라미 소리도 절정일 땐 소음처럼 요란하지만, 폭염을 뚫고 저녁 바람결에 한두 소절씩 들려주는 귀뚜라미 울음소리는 반가운 손님이 아닐 수 없다. 아, 이제 살 거 같다며 마음속으로 찌르르 찌르르 그 장단을 맞춘다.

7남매로 자랐고 7남매를 키웠다. 옥천군 동이면 남곡리 살던 그 유년 시절 개미재 살골 목사리 마을 이름도 정다운 곳들이다. 갈래머리 소녀 적 순자로 돌아가 본다. 1944년생 우리 나이로 일흔일곱이 되었다. 옛날엔 할머니 소리 듣기 십상이었지만 지금은 시절이 좋아져서 우리 나이는 할머니 축에도 못 낀다.

나 어릴 적 우리 7남매 그땐 쑥버무리만으로도 배불렀고 죽 끓여 나눠 먹으면서도 정다운 인정으로 허기를 채우곤 했다. 금자 언니, 순길이 오빠, 나는 셋째, 넷째 인복이, 인식이, 인용이, 인숙이 막내 인숙이는 이름이 여인숙이라 조카들이 간판 보면서 엄마 이름이라고 한 번 더 불러주곤 했다. 형제들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본 지가 언젠지. 죽 끓여 먹고 살았으니 어려운 살림이었지만 그 시절도 그리우니 우리네 인생이 그렇듯 버릴 게 없다.

10살쯤 되면 동네 아이들은 어른들 따라다니며 농사일을 도왔다. 풀 뽑기부터 시늉만 낼 수 없어서 오빠들 거들며 내 밥값을 했다. 오빠도 간간이 이겨 먹느라 어른들 몰래 오빠한테 슬쩍슬쩍 한 대씩 맞기도 하면서 머슴아 같이 자랐지만 책임감은 오빠 못지않았다. 6.25 난리 중에 할머니의 자식 사랑을 고스란히 느꼈다. 우리 형제들만 안남 갈마골로 피난을 보내셨다. 돌아앉은 동네라 피난처로 좋다고 외갓집으로 따로 피난을 보내셨던 할머니. 그 마음을 할머니가 된 지금 손자를 보면서 내 새끼 챙기는 그 깊은 속을 알게 됐다.

21살에 고모님의 중매로 군 복무 중이던 25살 남편을 만나 결혼했다. 남편은 밀양 박씨. 박 명창, 큰아들이라 듬직했고 성품이 좋았다. 남편은 결혼 후에 나한테 넌지시

“임자, 선볼 때 시계 빌려 차고 옷도 빌려 입고 나갔어. 선보는 자리라 후줄근하게 그냥 나갈 수는 없었지.”

웃어넘겼지만 어려운 시절이었고 예의를 지키려던 그 마음을 결혼 후에도 잃지 않으려던 좋은 사람이다.

시댁도 어려운 살림이라 산골짜기에 가서 묻혀 살겠다는 마음으로 시집갔지만, 산골이나 시내나 시집살이는 같다. 남편은 결혼하는 날 구들차(온돌을 실어 나르는 차 )에 몸을 싣고 우리 집에 도착했다. 인생의 큰 갈래 길에서 어설픈 첫날을 시작했다. 시집갔을 때 시누이는 10살쯤 되었다. 내가 키우다시피 했고 나를 잘 따르는 어린 시누이한테 정 주면서 시댁이 식구로 바로 다가왔고 시집살이 어려움에 시달리지 않았다. 큰딸에 아들 하나 낳고 딸들을 줄줄이 낳느라 시아버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아들 기다리는데 딸을 셋이나 낳아서 우리 애들 천덕꾸러기로 자라지 않게 하려고 마음고생은 많이 했다. 시아버님이

“ 지지배만 퍼질러 낳아서 어디에 쓸 거냐? 행상 뒤에 손자가 따라가야 하는데 이 일을 어쩌냐?”

시아버님 말씀은 내 속을 타게 만드셨다. 호롱불에 불 밝히며 공부하면 지지배들이 공부해서 어디에 써먹을 거냐 시며 불호령을 내리셨다. 그나마 위로가 된 건 아이들이 가방 메고 학교 가면서

“어머니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그 뒤통수만 봐도 배부르고 온갖 시름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큰아들 큰딸이 동생들 잘 챙겨서 이만큼 다들 살고 있는 거다. 학교 다니느라 천동에서 방 한 칸에 남매들끼리 옹기종기 살 때 큰아이들이 동생들 잘 챙겼다. 어려운 살림에 육성회비 안 밀리게 해줬다고 고맙다는 딸이다. 쌍둥이 일순이 이순이 낳고 막내아들이 태어났을 때 경사 난 듯이 온 가족이 기뻐했다. 우리 집에서는 금덩어리 같은 아들이었다.

그 시절의 살림 밑천이었던 담배 농사는 나라에서 전매를 해주니 먹고 사는 데 힘은 보탰지만 참말로 세상의 제일 힘든 농사가 담배 농사였다. 한여름 뙤약볕에서 그 끈끈한 진액에 땀이 비 오듯이 흐를 때는 숨이 턱턱 막혔다. 아이들이 손이라도 보태겠다고 낑낑거리느라 잠도 제대로 못 잤다. 다들 착해서 옷도 언니 옷 물려받아서 닳도록 입었다. 쌍둥이들이 호롱불 밑에서 공부하고 상 받느라 내미는 손을 보면 소매가 너덜너덜해서 가슴이 찢어졌다. 읍내 가서 예쁜 옷으로 사 입혀서 입성 좋게 해주면 더 기운 날 텐데 그걸 못 해줘서 마음 한편이 아직도 아리다. 애미 마음이 미안하고 가슴 아팠지만, 불평 없이 자라준 아이들이 고맙다. 어려운 살림에 부모속이나 썩혔으면 그 애간장 타는 속은 어디서 달랬을까 싶다.

농사가 먹고 살 거리였을 땐 뙤약볕도 찬바람도 다 애물단지였는데 지금은 소일이 돼서 수확하는 대로 아이들 집마다 나눠주는 재미가 끝이 없다. 비닐봉지에 고추 한 봉지 상추 두 봉지 깻잎장아찌 담아두고 아이들을 기다리는 그 맛이 일품이다. 오는 대로 하나씩 들려 보내는 그 맛에 이 더운 여름에도 농사를 놓을 수 없다.

학교 친구 임복재 언니도 세월 속에서 만나 느지막하게 친구가 되었다. 같은 값이면 언니라고 불러주면 좋아한다. 이젠 학교 동무들이 좋은 친구들이다. 무더운 여름을 보내고 마을 앞 코스모스가 기지개를 켜는 가을이다. 내 인생의 지금처럼 편안한 계절이 찾아왔다.

올 추석은 다른 해 보다 더 일러 수확의 기쁨도 보름달의 상서로운 기운도 더 빨리 맞이하게 됐다. 지금의 내 인생은 추석처럼 풍요롭고 한가위 같다. 가을처럼 곱고 풍성한 누이가 거울 앞에 섰다. 이름은 ‘여 순 자’

* 이글은 옥천닷컴(http://www.okcheoni.com)과 제휴한 기사입니다. 

편집 : 김미경 편집위원

 
김경희 옥천신문 시민기자  minho@o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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