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살면서 고민에 잠기거나 고통을 겪는 것을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보다는 어떤 긍정적인 기대나 희망을 품고 살기를 바라며 되도록이면 행복감을 느끼고 살아가기를 원할 것이다.  여행을 한다는 건 그런 행복감을 갖게 하기에 딱 어울리는 행위 중의 하나이다. 더구나 그것이 해외여행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해외로 가는 여행 일정을 미리 잡을수록 여행에 대한 기대는 커지기 마련이다. 가고자 하는 나라에 대해 이것저것 알아보기도 하고,  막연히 알고 있던 그 나라가 실제로 어떤 모습일지 사뭇 기대를 하며 지내게 된다. 여행은 설렘 그 자체이다. 해외여행만큼 사람을 설레게 하는 것도 그리 많지 않다.  그 나라의 경치와 풍물에 대한 기대는 물론이고 그 나라 음식이나  문화에 대한 관심도 그에 못지않다. 그중에서도 나는 그 나라의 국민들에 대한 관심도 적지 않은 편이다. 그 나라에 직접 방문하는 것만큼이나  그 나라 사람들을 특정하여 관찰할 좋은 기회는 없기 때문이다.

아내의 환갑을 맞이하여 환갑 기념으로 해외여행을 계획한 건 올해 3월경이었다. 10여 년 전에 동유럽을 여행하고 5년 전쯤에 북유럽을 여행한 이후 코로나를 겪으며 몇 년간 해외여행에 굶주려 있던 아내는 이번에는 이탈리아에 가고 싶다고 했다. 바로 이탈리아로 가는 여행 패키지를 예약했다. 무더위를 피해 가을에 가기로 날짜를 잡았다. 몇 개월의 기다림 끝에 10월하고도 개천절에 즈음하여  로마행 아시아나 비행기에 올랐다. 

'스페인 언덕'이라 불리우는 로마 시내의 언덕길
'스페인 언덕'이라 불리우는 로마 시내의 언덕길

승객들은 대부분 한국인이었다. 이탈리아로 향하는 여행객들이었다. 그래도 이탈리아인들이 더러 있지 않을까 살펴봤더니 내가 앉은 맞은편 맨 앞쪽에 서양 여성들 두세 명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승객들이  짐가방을 짐칸에 올리느라 부산한 가운데 창가에 아내가 앉고 나는 창가 옆에 앉았는데 복도 쪽 옆자리가 비어있다. 아직 비행기에 타지 않은 것인지 빈자리로 가는 것인지는 좀 더 두고 봐야 알겠지만, 비행기가 만석인 걸로 봐서 빈 좌석으로 가지는 않을 것이다. 누가 내 왼쪽 옆자리에 앉을지 궁금해진다. 거의 12시간이 걸리는 비행이기에 이왕이면 인상 좋은 사람이 타기를 바라는 것은 인지상정일 것이다. 

나는 비행기에서 옆자리 앉은 사람에 대한 각별한 기억이 있다.  싱가폴을 거쳐 동남아 여행을 할 때였는데 옆자리에 일본 여성이 있었다. 얼핏 보기에 한국인과 비슷해서 한국인인 줄 알았는데 옆 사람과 대화하는 걸 들으니 일본인이었다. 일본인들을 많이 본 것도 아니지만 바로 가까운 옆자리에서 일본인을 본 건 처음이다. 그래도 옆자리에 앉았는데 인사라도 해야 하나 망설이고 있었다. 상대가 일본인이기 때문은 물론 아니다. 일본이라는 나라에 대한 감정을 일본인에게 대입시킬 필요는 없다. 그 여성 또한 시간을 내서 여행을 하고 있는 여행객일뿐이다. 

얼핏 보니 60대가 넘어 보이는 여성으로 지성미가 있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당시 내 나이가 40대 후반이었으니 상대적으로  젊어보였을 것이다. 일본 여성에게 아는 체를 하며 나는 한국인이라고 밝혔다. 여인도 미소를 지으며 반갑게 인사를 했다. 미소짓는 얼굴이  곱상하다.  한창 젊었을 때는 미모가 뛰어났을 거라고 짐작되었다.  목소리도 낭랑했고 표정은 대체로 귀여운 편이었다.  서로가 못하는 영어로 몇 마디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녀는 작가였다. 유명 작가는 아니지만 작가로서 활동하며 지낸다고 했다.

나의 질문에 수줍은 표정으로 답변하는 모습에서 소녀다운 감수성을 엿보기도 했다.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 더 이상의 기억은 없다. 한가지는 기억에 남는다. 그녀는 tomorrow라고 말해야 할 상황에서  yesterday라고 말했다.  그녀가 당황해서 그런 건지는 몰라도 적어도 명색이 작가인데 어제와 내일이라는 영어단어를 잘못 알고 있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곧이어 그녀는 단어를 정정해서 말했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그 여성은 재미있다는 듯 깔깔대며 웃었다. 웃는 모습이 십대의 소녀처럼 해맑았다. 여자는 나이가 들어도 이렇게 귀여울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아울러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지만  일본인과도 인간적으로는 이렇게까지 친밀감을 느낄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인들은 개인적으로는 예절도 바르고, 인간미도 있다고 한다. 그런데 왜 집단이 되면 민족성이 돌변하는 걸까.  연구 대상이 아닐 수 없다. 

일본 여성과의 짧은 대화였지만 유쾌한 기억으로 아직까지 남아 있다.  그 이후로도 다른 여행 일정의 비행기에서 두세 명과 나눈 대화가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 있다.  여행을 마치고 귀국행 비행기 옆자리에서 어느 개그맨의 아내를 만난 기억과 미국 여행중에 만난  흑인 여성과의 대화가 바로 그러했다.  

 

편집 : 심창식 편집위원

심창식 편집위원  cshim77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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