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머물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집은 편안하고 안락하며,  그 누구도 의식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자신만의 생각에 잠길 수 있기 때문이다. 생각 속에서 그는 아련한 과거에 대한 회상에 잠길 수도 있고,  무한한 미래를 향한 꿈을 꿀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문득 그는 미지의 세계로 여행을 떠나고 싶어 할지도 모른다. 자신이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세상을 구경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 미지의 세상을 엿보며 미처 몰랐던 생의 기쁨을 맛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아내의 환갑 기념 여행으로 인천공항을 출발하여 로마행 비행기에 오른 지 12시간이 지나 로마 피우미치노 레오나드도 다빈치  공항에 도착한 것은 저녁 7시경이었다.  공항 이름에 왜 세계적인 거장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이름을 넣었을까. 그냥 로마 공항이라고 하는 것보다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인물의 이름을 넣는 것이 공항 홍보에 좋다고 판단한 듯하다. 이것은 나중에 이탈리아 현지 가이드로부터 확인한 사실이기도 하다. 그런 발상이라면 한국의 인천공항도 세종대왕 공항으로 이름을 바꿔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공항에서 입국 수속을 마치고 나오니 공항 안에 작은 카페 겸 편의점이 눈에 띄었다.   내부 시설이 그리 넓지 않았고 다소 협소한 편이었다.  목도 마르고 1유로 코인도 바꿀 겸 해서  물 한 병을 골라 카운터에서 계산을 했다.  20유로를 냈더니 계산대에 있는 여직원의 표정이 밝지 않다. 물병은 1.3 유로이고 20유로 정도면 그리 큰 액수는 아닌 듯한 데 여인의 눈빛이 심상치 않다. 키가 크고 근무 경력이 꽤나 있어 보이는 30대의 이탈리아여인이  거스름돈을 줄 생각은 안 하고 나를 쳐다보는 눈빛이 뭔가를 하소연하는 듯하다. 이태리어로 혼자 중얼거리는데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으나 나로서는 당혹스럽기까지 하다. 그녀의 눈빛은 이런 게 아닐까 싶었다.  차마 이탈리아를 방문한 외국인에게 짜증을 낼 수는 없지만 손님이 알아서 잔돈을 내라는 눈치 같았다. 나는 잠시 망설였다.  이탈리아에 막 도착한 외국인에게 좀더 친절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아차! 하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나 같은 외국인이 많은가 보다. 물 한 병 사면서 단위가 큰 유로 지폐를 1유로 코인으로 바꾸려는 사람들 말이다. 유럽을 여행하려면 화장실에 갈 때도 1유로 코인이 필요하고, 호텔에서 묵은 다음 날에도 1유로 코인을 남겨야 하기 때문에 1유로 코인은 늘 몇 개씩 지니고 있어야 한다. 얼른 마음을 고쳐먹었다. 지갑을 열어보니 5유로 지폐가 보였다. 20유로를 거두고 5유로를 건네자 그제야 여직원의 표정이 밝아지며 살짝 미소를 짓기까지 했다. '진작에 그럴 것이지'하는 자기만족의 미소였다. 불과 30초 사이에 벌어진 일이다. 나는 물병을 사고 1유로 코인도 챙겼고 여직원도 만족스러운 눈치였다.  20유로 지폐를 받고 난감해하는 이탈리아 카페 여직원의 눈빛은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다. 이탈리아에서 내가 직접 대면한 첫번째 아탈리아인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남자와 여자는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방식에 미묘한 차이가 있다. 남자들은 직장이나 대인관계에서 상대방의 눈치를 살피는 데는 일가견이 있다. 상대방이 우호적인지  아니면 적대적인지 즉각 알아차리고 바로바로 대응한다.  남자들이 겪는 생존경쟁의 세계에서 적대적인 상대방에 대한 대처는 극히 단순하다.  상대방이 지닌  파워를 자신과 견줘보며 상대방에게 복종할 것인가,  아니면 그를 자신에게 복종시킬 것인가의 선택과 판단이 있을 뿐이다. 그 중간의 타협은 없다. 타협하는 대신 결별이 있을 뿐이다. 

그러던 남자들이 집에만 들어오면 그 감각이 많이 떨어진다. 아내가 눈으로 말하는 걸 즉각 알아채는 남자들은 많지 않다. 한참을 지나서 알기도 하고 한참을 지나도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다. 부부 사이가 좋을 때야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이다. 사이가 벌어져 아내의 눈빛이 차갑고 싸늘하게 변할 때가 문제인 것이다. 여인의 눈빛이 차가운데도 그 눈빛의 의미를 읽는 데 실패한 남자는 그 때부터  살아도 산 게 아니다.  기이한 것은 여자들은 말보다는 눈빛으로 말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이다. 눈빛으로 말할 때 남자들이 그걸 읽어주길 바란다. 그 눈빛을 읽는 데 20년이 걸리기도 하고 30년 이상이 걸리기도 한다. 아무리 오래 같이 살아도 영영 그 눈빛을 읽지 못하고 저세상으로 가는 남자들도 많다. 

니폴리의 정경
니폴리의 정경

아무리 그렇다 해도 머나먼 이국땅 이탈리아에서 아내와 이탈리아 여인이 눈빛으로 기싸움을 벌일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이탈리아 3대 미항으로 불리는 나폴리에 갔을 때의 일이다.  이탈리아 여행 이틀째였다. 나폴리는 이탈리아반도 서쪽 티레니아해에 있는 남부 도시로 세계 3대 미항 중 하나로 꼽힌다.  ‘나폴리를 보고 난 후에 죽어라’라는 속담이 전해올 만큼 세계적인 관광도시의 하나이다. 해변을 따라 남동쪽으로 베수비오 화산을 바라보는 나폴리는 해변을 감싸듯이 조성되어 있어 전형적인 항구도시의 모습을 보인다.  항구 자체는 그다지 미항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주변의 카프리섬이나  해안 절벽에 옹기종기 붙어있는 아기자기한 마을이 멋진 경관을 이룬다. 주변의 해안도로를 드라이브하며 지중해를 음미할 수 있다. 

나폴리항은 한때 너무도 아름다운 곳으로 유명했지만 요즈음에는 현대화 추세에 밀려  유명세가 한 풀 꺾였다고 한다. 그렇다 해도 항구는 관광객들로 넘쳐나고 있었고 마침 점심때가 되어 항구에서 가까운 음식점으로 들어갔다.  음식점은 유럽 관광객들이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고 거기에 한국 관광객들이 들어서니  혼잡스럽기까지 했다. 

우리 부부는 빈자리를 찾아 4인용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2인용 테이블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60대쯤으로 보이는 남자 종업원이 합석할 것을 권유했다.  자리가 부족하니 한국인들끼리 같이 합석하라는 것이었다.  테이블 건너편에는 한국인 관광객 부부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나는 앉으려다 말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일어서려고 했다.  그런데 아내가 이동을 거부했다.  손가락으로 우리가 앉았던 테이블을 가리키며 그냥 앉겠다는 의사 표시를 했다. 그러자 또다른 남자 종업원이 오더니 건너편 한국인 부부를 가리키며 같은 한국인이니 한국인끼리 동석할 것을 강권했다. 거의 강압적인 분위기였다.  이쯤되니 나도 약간 기분이 상했다. 아내는 여전히 모른체 하고 앉겠다는 의사표시를 했다. 

나폴리항 에서
나폴리항 에서

 

분위기가 묘하게 돌아가자 음식점의 총괄 매니저로 보이는 정갈하게 생긴 중년의 마담이 다가왔다. 아내는 그 여인에게 여기에 앉을 것이며 다른 데로 이동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태도를 보였다. 아내의 눈빛과 이탈리아 마담의 눈빛이  불꽃을 튀고 있었다. 일촉즉발의 상황을 맞이하여 나는 사태를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여차직하면 내가 나설 참이었다. 마담이 만약 '합석하지 않으면 여기서 나가달라'고 말할 경우를 대비해야 했다. 바야흐로 소리없는 총성이 음식점 내부를 뒤흔들고 있었다. 다른 종업원들도 사태가 어떻게 전개될지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었다.  눈빛의 내공을 걸고 동양 여인과 서양 여인간에 기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기싸움은 험악하다기보다는 조용하고 은밀한 형태를 띄고 있었다.  마담은 온화한 얼굴이었고 남자 종업원들과는 달리 아내와 나를 동양인이 아닌 한 인간으로 대우하고 있는 듯한 태도였다.

우아한 분위기의 마담이 말없이 아내와 눈빛으로 대화를 나누면서  마담이 다른 테이블을 눈으로 가리키자  아내가 우리가 앉은 테이블을 바라보며 눈빛으로 응수했다. 마담이 아내의 눈빛을 잠시 그윽하게 바라보더니 눈을 내리깔며 고개를 끄덕였다.  테이블에 앉아도 좋다는 신호였다. 그러면서 다른 남자 종업원들에게 그렇게 하라고 지시했다. 아내는 그것보라는 듯 승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종업원들의 태도가 관광지라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우리가 동양인이라서 이탈리아인들이 우리를 앝잡아봐서 그런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나중에서야 알았다. 이탈리아 여행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 티브이에서 유럽 여행 프로그램을 봤더니 유럽에서는 손님이 왕이 아니라 종업원이 왕이었다. 손님은 종업원의 지시에 순응해야 하는 게 손님으로서의 매너라는 것이다. 

우리 부부는 원하는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고, 아내와 눈빛을 주고받은 미모의 마담이 메뉴표를 가져다주었다. 나는 보란듯이 피자와 파스타를 1세트씩 시켰고, 값나가는 와인과 음료수도 시켰다. 도합 60유로에 가까운 주문이었다. 마담은 흡족한 듯이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주문을 받았다. 아내와 나는 여유롭게 식사를 마치고 카드로 계산을 했다.  둘이서 음식값으로 60유로(한화로 환산하면 약 9만원)을  지불했으니 4인용 테이블에 앉은 값을 충분히 치르고도 남은 셈이다. 마담이 아내에게 '땡큐!'를 연발하며 감사를 표했다.  우리도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음식점을 나왔다.  마담의 환대를 받으며 밖으로  나오니 나폴리 항구가 더없이 정답게 느껴졌다.  

나폴리 항의 여행객들
나폴리 항의 여행객들

아내의 눈빛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은 아주 기분 좋은 일이다. 나폴리에서 아내의 눈빛이 이탈리아 여인의 눈빛을 조용히 제압한 이후 나는  아내의 눈빛을 다시 보기 시작했다. 그 눈빛은 아내만이 지닌 고유의 부드러우면서  카리스마 있는 눈빛이었다. 나는 한때 그 따스하고 그윽한 눈빛에 열광하기도 했지만  나를 향한  눈빛이 냉정하고 차갑게 변할 때는 그로 인해 한없이 절망하기도 했다. 그렇게 부부로서 산 지 30년을 훌쩍 지나 이제서야 아내의 눈빛이 지닌 가치를 알아보게  되었다는 것은 늦었지만 다행이 아닐 수 없다. 남편으로서 아내의 눈빛을 읽는다는 것은 그만큼 내공이 쌓이지 않고는 절대 가능하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칼릴 지브란이 '여인은 자신의 얼굴을 한자락의 미소로 가릴 수 있다'고 말했지만 모나리자의 미소만큼이나  신비하고 오묘한 것은 여인의 눈빛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편집 : 심창식 편집장

심창식 편집장  cshim77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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