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이후 해외여행의 풍속도가 많이 달라졌다. 전자 여권이 일반화되어 휴대폰에 저장된 비행티켓 인증 사진만 제시하면 긴 줄을 서지 않고도 수하물을 자유롭게 부칠 수 있고, 제반 출국 수속 절차를 빠르게 진행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아내는 나보다 디지털 시대에 대한 적응이 빠르다. 새로움에 대한 적응력과 순발력에서는 내가 도저히 아내를 따라잡을 수 없다. 아니, 나는 따라잡을 생각이 없다. 그저 아내가 하자는 대로 따라 하는 게 속이 편하다. 그런 점에서  나는 과거지향적 인간형이고 아내는 미래지향적 인간형일지도 모른다.

그런 아내에게도 과거의 습성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게 한 가지 있다. 그것은 해외여행할 때마다 아내만이 느끼는, 아내의 해방구가 있기 때문이다. 출국 수속을 마치면 비행 탑승시간까지 시간이 남는다. 그 시간은 전적으로 아내의, 아내에 의한, 아내를 위한 시간이다. 나는 해외여행의 대상이 되는 나라에 대한 생각에 잠기기도 하고,  출국장에서 대기하는 비행기들을 보며 오랜만에 한국을 벗어나 여행하는 것에 대한 감회에 젖어있을 동안 아내는 그런 감회에 젖을 시간이 아깝다는 듯이 바쁘게 움직인다. 아내의 해방구가 바로 눈앞에 전개되어 있기 때문이다. 국내에서  해외로 가는 그 첫걸음은 비행기가 아니다. 출국 수속을 마치고 검역대를 통과하면 비행기 탑승 게이트에 다다르기 전에 펼쳐지는 거리가  있다.  각종 국제적인 유명 브랜드 상품이 즐비한 면세점이다.  바로 그 면세점 거리가 아내의 해방구이다.

여행에 대해 설레는 감정이 작용하는 것은 남녀 간에 똑 같을까 아니면 어떤 차이가 있을까.  차이가 전혀 없는 줄 알았다. 인간이 느끼는 보편적 감정이 남녀 간에 다를 거라고 생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몇 번의 해외여행을 하면서 어느 순간 나는 남녀 간에 차이가 있다는 것을 인지하기 시작했다. 이는 아내의 입을 통해 확인한 사실이었다.  설렘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는 것을 내가 어찌 짐작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해외여행에 대한 일반적인 기대나 설렘은 차이가 없지만 여자에게는 한 가지가 더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출국장 면세점에 대한 설렘이었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해외 명품 브랜드에 대한 설렘이다. 그리하여 해외여행을 간다고 하면 벌써 면세점부터 떠올린다는 것이다. 30여 년 전에 동남아 여행할 때부터 그런 아내의 행동을 살짝 눈치채기는 했지만 설마 그 정도인 줄은 미처 몰랐다.

하지만 말이 그렇지 아내는  마구 명품을 사재끼는 부류와는 거리가 멀다. 아내는 공항 출국장의 면세점에서 아이쇼핑하는 것을 무척이나 즐거워했다. 아니 즐거워하기 이전에 설레는 마음으로 얼굴 표정마저 상기되어 이리저리 둘러 보곤 했다.  비싼 것을 사달라고 요구하지는 않았지만 해외 명품백이나 유명 브랜드를 구경하며 가격도 물어보곤 하였다. 마치 명품 브랜드의 가격 추이라든지 디자인의 변화와 유행 트렌드를 조사하는 시장 조사원이라도 되는 것처럼 꼼꼼히 명품점들을 순회하며 둘러본다. 어쩌면 구매 행위보다는 아이쇼핑할 수 있는 그 분위기를  즐거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느 명품점에서 아내가 발길을 멈추고 안으로 들어선다. 

"이 가방, 어때?"

아내가 갑자기 나에게 질문을 한다. 그 명품백이 마음에 들어 사달라는 걸까.

"저번에 교회 권사 김 모씨가 이 가방을 들고 왔더라구. 예쁘긴 한데, 나하고는 안 어울리네."

그러면서 가격표를 슬쩍 보며 가게밖으로 나간다.  그때 알았다. 아내가 아이쇼핑하는 목적에는 다른 지인들이 갖고 나온 명품이나 귀금속이 얼마짜리인지를 알아보려는 목적도 있다는 것을 .  그렇게 아이쇼핑을 즐기다가  때로는 나를 놀리기도 한다.

"내가   비싼 명품  사달라고 할까봐 겁나지?"

나의 얼굴에서 그런 표정을 읽은 걸까. 나도 모르게 아내의 아이쇼핑하는 모습을  떨떠름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던 걸까. 나의 속을 들키기라도 한 것처럼 나는 얼른 부인한다. 

"정말 사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 !"

일단 큰 소리를 치고 본다. 그래봐야 아내가 비싼 명품을 사달라고 하지는 않을 거라는 나름대로의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자 아내가 다시 나를 놀린다.

"정말 사도 돼?"

그러면서 슬며시 나의 눈치를 본다.

"그럼! 어여 골라봐!"

여기서 물러나면 앞으로의 여행 일정이 시작부터 비끄러진다.  

"됐어~!"

아내는 이미 나의 마음을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비싼 명품브랜드에게서 등을 돌린다.    이걸 다행이라고 여겨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잠시 갈등하는 내 마음이 우습기도 하다. 이번 이탈리아 여행을 시작하면서 거의 똑같은 패턴이 반복되었다.  이번에는 환갑 기념 여행인지라 아내가 어떤 기대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도 그럴 경우에 대비하여 마음 준비를 단단히 했다.  하지만 나의 준비가 무색하게 아내는 별다른 요구 없이 나에게 느닷없이 선글라스를 사라고 한다.

"당신이 쓰고 다니는  선글라스  말야. 그거 20년이나 지난 거야. 구닥다리 선글라스야."

"아직 이십 년까지는 안됐고, 한  십 오륙 년쯤 되었을 거야.  그래도 그거 쓰고 다니면 나를 영화에 나오는 스파이 같다며 멋지다고 말하는 친구들이 있어."

"당신 친구들이니까 그런거지. 누가 선글라스를 몇 십 년씩이나 쓰고 다녀?"

그러면서 나를 선글라스 판매점이 있는 곳으로 끌고 간다. 나를 생각해서 하는 말은 고맙지만 이건 나를 무시하는 언행으로 받아들여질 소지가 다분히 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사소한 감정을 내비칠 때가 아니다. 그저 나를 생각해 주는 아내의 선심성 발언에 감지덕지하고 아내의 말에 순종해야 할 때이다. 비싼 명품브랜드를 사달라는 것도 아니고 나의 선글라스를 새로 장만하라는 건데 그 말에 시비를 걸었다간 잘못하면 뼈도 못 추스리고 초전부터 박살 나는 수가 있다. 이건 다년간의 경험에 의한  본능적인 직감이다. 

언덕에서 내려다 본 피렌체 시의  정경
언덕에서 내려다 본 피렌체 시의  정경

선글라스 판매점은 두 군데가 있었다. 한 곳은 해외 브랜드였고 다른 한 곳은 국내 브랜드였다.  국내 브랜드는 일이십만 원대였고, 해외 브랜드는 사오십만 원 이상 가격대였다. 나는 해외브랜드를 둘러보다가 국내 브랜드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나의 갈등을 알아차린 건지 아내가 잠시  나에게 생각할 시간을 준다.

"나, 저쪽에 가서 둘러보고 있을테니 잘 골라봐~"

그래, 나에게 시간이 필요하다. 어떤 물건을 사는 행위의 선택과 결정은 가격대가 차이가 나는 두 판매점 앞에서 쉽게 이루어지기 어려울 듯 하다. 브랜드냐, 실용성이냐. 하지만 선글라스야 다 비슷한 거지 국내 브랜드와 해외 브랜드가 실제적인 기능이나 작용 면에서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그야말로 브랜드 때문에 해외 것이 두세배 비싸다는 것을 누가 모르겠는가.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아내 있는 쪽을 바라봤다. 아내가 천천히 걸어오더니 나의 표정을 살핀다.

"결정했어?"

"글쎄. 생각 중이야."

그러면서 나는 국내브랜드 판매점의 선글라스를 써보면서 어떠냐고 물었다. 그러자 아내는 말없이 나의 손을 잡고 해외 브랜드 쪽으로 끌고 가더니  판매점 여직원에게 나에게 맞는 선글라스를 추천해달라고 한다. 

"아까 이 손님이 이걸 마음에 들어 했는데요." 하면서 구찌 선글라스를 골라준다. 내가 마음에 드는 선글라스인 건 맞다. 하지만 가격대가 마음에 들지 않아 포기한 선글라스다.

"이걸로 해주세요."

아내가 대뜸 결정해버린다. 여직원이 기다렸다는 듯 얼른 대답한다.

"알겠습니다. 바로 포장해 드리겠습니다."

이상한 상황이 연출되고 있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이게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가. 여직원 앞에서 아내에게 따져 묻기도 민망한 처지가 되었다. 나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건지 아내가 다짐을 하며 말했다.

"당신이 언제 구찌 물건 사보겠어. 이럴 때 하나 장만하면 앞으로 또 몇 십 년을 쓸거 아냐. 그러면 본전을 뽑고도 남을 거야."

아내의 말에 일리는 있었다. 아마도 본전을 실컷 뽑고도 남을 것이다. 한 번 물건을 사면, 더구나 비싼 가격으로 산 물건이라면 그 기능을 상실할 때까지 웬만해서는 버리지 않는 나의 성향을 아내는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기능 면에서 전혀 차이가 없고 디자인도 별 차이가 없는 선글라스를 해외브랜드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삼십만원 정도를 더 비싸게 구매해야 할 이유를 나는 내 머릿속에서 아직 찾아내지 못했다. 그런 와중에 여직원은 이미 물건을 포장하여 나에게 내밀고 있었다. 

"여기 있습니다.  구찌 회원으로 등록해서 10프로 할인 들어간 가격으로 해드렸습니다."

내가 반격할 시간이 없었다. 거기에  여직원의 상술이 더해졌다.

"감사의 의미로  스타벅스 커피 구매권 2만 원짜리 쿠폰도 서비스로 드릴게요."

아내가 여직원에게서 냉큼 쿠폰을 받아들며 만족스러운 듯 활짝 미소를 짓는다. 여자들이 할인 쿠폰이나 서비스 상품에 약하다는 것을 판매 여직원이 귀신같이 알고 아내의 마음을 파고든 것이다. 아까 구매를 망설이던 나의 마음을 되돌리지 못하게 쐐기를 박는 상술이  아닐 수 없다. 아니나 다를까. 아내의 성화가 이어졌다. 

"얼른 계산하지 않고 뭐 해."

아내의 재촉에 나는 하는 수없이 지갑을 꺼내들었다. 빼도 박도 못하는 지경에 이르러 나는 꼭두각시가 된 기분이 들었지만, 이처럼 되돌리기 어려운 상황에 급작스럽게 몰린 이유와 원인을 분석할 시간조차 나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나를 위한다는 명분 아래 행해지는 아내의 일방적인  언행을  따질만한 시간적 여유와 틈이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나는 아내가 하자는 대로 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내가 계산을 하자 아내가 알듯 모를 듯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는 그 미소의 의미를  피렌체에 도착하고 난 이후에야 알게 되었다. 

선글라스는 품격 있어 보이는  안경집에 들어있었고 여직원은  그 안경집을 아주 우아하고 멋진 청색 실크 주머니에 넣어 주었다. 그 주머니가 너무 고급스럽고 촉감도 좋았다. 사람이나 물건이나 포장이 좋아야 한다는 것을 새삼 실감했다. 실크 주머니에는 구찌 브랜드가 선명하게 인쇄되어 있었다. 

"아! 이 값이구나. 이것 때문에 비싼 거였어."

이왕 구매한 것이니 좋게 생각하기로 마음 먹었다. 내 나이가 육십 대 중반을 넘기고 있으니 어쩌면 내 생애 마지막 선글라스가 될지도  모른다. 게다가 이 선글라스를 쓰고 다닐 때마다  자기 덕분에 명품 브랜드의 선글라스를 쓰게 되지 않았냐며 아내는 생색을 낼 것이며, 나는 ' 당신 덕분에 내가 복이 터졌다'라고 장단을 맞추게 될 것이다. 안락한 노후 생활을 위해 그 정도의 립 서비스는 할 준비가 되어 있다. 어디 그뿐인가.  나는 아내의 환갑 기념 여행 때 장만한 선글라스라는 것을 회상하며  뿌듯한 감정에 사로잡힐 것이며, 선글라스를 실크 주머니에서 꺼낼 때마다 명품 브랜드에 대한  만족감에 잠기기도 할 것이다. 팔자에도 없는 명품 브랜드 선글라스를 우발적으로 구매하게 된 나는 의도치 않게 명품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사람의 행동 하나하나에는 그렇게 된 배경과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아! 여자들이 명품을 왜 그렇게도 좋아하는지 그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여자들만의 오묘하고 변화무쌍한 세계를 내가 어찌 다 헤아릴 수 있겠는가마는  어느 정도 미루어 짐작하는 단계는 된 듯하다. 명품의 가격이나 비용 여부를 떠나서 아내의 환갑 기념 여행을 하면서 미처 몰랐던 여자들의 세계, 나아가 아내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억만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값진 경험을 한 건지 모른다.  그렇게 위안을 삼으며 면세점에서의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뒤로하고 로마행 비행기에 올랐다. 

편집 : 심창식 편집위원, 김동호 편집위원

심창식 편집위원  cshim77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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