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버지를 잘 모른다. 아버지와 16년밖에 살지 못했고, 아버지는 자신에 대해 거의 말씀하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어릴 때 아버지는 만날 신문이나 책만 보았다. 우리 4남매 일에도 거의 관여하지 않았다. 입학과 졸업식에도 함께 하신 적이 없어 우리와 찍은 사진 한 장이 없다.

부모님 약혼사진
부모님 약혼사진

나는 어려서 아버지가 어려웠다. 그건 내 탓이 크다. 엄마는 내가 아기 때부터 말썽을 피웠다고 했다. 걷지도 못하면서 걷겠다고 성화여서 한시도 눈을 뗄 수 없었고, 말문이 트이면서는 ‘왜’를 달고 사는 따지기 명수였고, ‘하면 안 돼’라는 것은 기어이 해봐야 직성이 풀리는 아이였다. 아버지는 그런 나를 한 번도 꾸중한 적이 없다. ‘골치 아픈 녀석’을 대하는 엄한 눈으로 가만히 보기만 하셨다. 만날 큰소리로 나를 혼내는 엄마는 무섭지 않았지만, 말없이 보기만 하는 아버지는 무서웠다.

아버지는 시대가 달라졌다며 딸도 제사에 참여해 절하고 술도 올리게 했다. 하지만 ‘조신한 여자’와 ‘활달한 남자’라는 고정관념은 버리진 못하신 것 같다. 무모발랄한 말썽을 피우거나 한편으로는 신박하게 재미있는 장난을 치는 나에게 아버지가 허허~~ 하고 웃어주신 기억이 한 번도 없는 걸 보면….

초등학교 5학년이 되면서 나도 변했다. 지속된 꾸지람에 기가 죽었거나, 에너지 총량의 법칙에 의하여 원없이 뛰고 놀아서 동적 에너지가 소진되어 차분해졌는지도 모르겠다. 날뛰고 놀기보다 더 재미있는 것이 책 속에 있음을 발견했는지 동화책을 들고 있는 날이 많아졌고 공부에도 취미를 붙였다. 이때부터 아버지가 나를 보는 시선이 달라졌다.

임진강을 헤엄쳐 건너온  아버지는 수영을 좋아했다.
임진강을 헤엄쳐 건너온  아버지는 수영을 좋아했다.

아버지는 김일성 대학 입학을 버린 능력자다. 북한 체제가 싫어 임진강을 헤엄쳐 남하한 용자(勇者)다. 그런 아버지가 한국 사회에서 잘 지내셨을까? 아니다. 고향 친구 대부분은 서북청년단에 가입하셨지만, 아버지는 서북청년단 가입을 거절했다. 그로 인해 왕따를 당했다. 회사에서는 노조설립 발기문 등을 써주다가 쫓겨나 직장을 자주 옮기셨다, 날개가 잘린 우울한 아버지를 보는 날들이 많아졌다.

중학교 때부터 아버지의 한탄이 들리기 시작했다. 저녁 식사에 반주 한잔하시면 “유신헌법은 박통이 죽을 때까지 대통령 하려고 만든 법이다”, “이러면 남한도 북한과 매한가지다” 등 무서운 말씀도 하셨다. 내가 귀를 쫑긋하고 들었는지 단둘이 있을 때면 더 많은 이야기를 해주셨다. 중3 때 등소평의 실각과 복권을 설명하며 “남북한 모두 정적을 죽인다. 중공은 아니다”, "등소평은 큰일을 한 인물이다.”고 했다. 그 당시 중공은 빨갱이 국가였기에 ‘울 아버지, 간첩인가?’하는 생각도 했다. 후에 <전환시대의 논리>를 읽고 아버지 말씀이 그 책에 다 있다는 것을 알았다. 엄마 말씀으로는 리영희 선생님을 좋아하셨다니 아버지도 그 책을 접하셨지 싶다.

고1 때 박통을 옹호하는 선생님과 ‘장기 집권과 단기 집권 문제’로 시작하는 날 선 논쟁을 벌였다. 엄마가 호출당했다. 선생님은 내가 ‘고교생 이념서클’에 가입했다고 의심했다. 아버지는 그 이후로 더 이상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았다. 1년 후 아버지는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가끔 꿈에 나를 찾아오셨다. 웃음기 없는 검고 깡마른 얼굴, 남루하고 얇은 옷차림, 항상 돈을 벌기 위해 추운 곳에서 일하시다 왔다고 했다. 막노동을 하며 집도 절도 없이 떠돌며 사시는 것 같았다. 아버지의 초라한 모습에 마음이 아파 가지 말라고 울며 붙잡았지만, 다시 가야 한다며 가셨다. 돌아가신 지 20년 지나 아버지가 밝게 웃으며 오셨다. 아버지가 빛이 나는 것 같았다. 처음으로 아버지 사는 곳으로 나를 데려갔다. 병풍 같은 바위를 뒤에 두고 산 중턱 평지에 햇살이 환히 비치는 아담한 초가집이었다. 집 앞에 널찍한 마당이 참으로 편안해 보였다. 집이 무척 마음에 들어 좋아라했다. 드디어 따뜻한 곳에 가셨구나~~ 이후 다시는 아버지 꿈을 꾸지 않았다. 이생에서 못 이룬 것에 대한 아쉬움, 어린 우리를 두고 가버린 恨이 다 풀리지 않았나 싶었다. 그런 아버지를 꿈에서 본 후 아버지를 생각하면 메던 목이 더 이상 메지 않았다.

“아버지! 곧 아버지 기일이 돌아오네요. 아버지 생각이 나서 몇 자 적어보았어요. 제가 성인이 된 후 엄마는 제가 아버지를 많이 닮았다고 해요. 저는 그런 생각을 한 번도 한 적이 없는데... 천방지축 말썽꾸러기 제가 정갈한 선비 같은 아버지를 닮았다니…. 근데 저는 그 말이 참 좋아요. 

"아버지! 아버지가 출세보다 동료들 삶에 더 무게를 두고 사셨다는 걸 커서야 알았어요. 그래서 우린 좀 고생했지만 그렇게 살아주신 것 고맙습니다. 한국 사회는 아버지 살던 시대보다 좋아졌어요. 좀 늦게 태어나셨다면 아버지 생각을 조금이나마 펼치셨을 텐데 그게 항상 안타까워요. 살아계셨으면 ‘한겨레 창간주주’도 되고, ‘한겨레 벗’도 되셨겠지요.

아버지! 이제 저도 산 날이 살날보다 훨씬 더 많은 나이가 되었습니다. 곧 뵐 날이 오겠죠. 그때까지 이생에 저에게 주어진 일 나 몰라라 하지 않고 잘 마치고 가겠습니다.”

 아버지와 군대 동료들. 아버지는 군대를 두 번 가셨다. 일제강점기 때 한 번, 한국전쟁 때 또 한 번. 두 번을 살아남으셨으니 운 좋은 사나이였는데.... 
아버지와 군대 동료들. 아버지는 군대를 두 번 가셨다. 일제강점기 때 한 번, 한국전쟁 때 또 한 번. 두 번을 살아남으셨으니 운 좋은 사나이였는데.... 

 

편집 : 김미경 객원편집위원, 심창식 편집장

김미경 객원편집위원  mkyoung6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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