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건 아닌 의료가 수명을 좌우한다고 믿는 한국 의사의 착각
의료가 돈벌이 수단인 줄로 아는 함익병은 돈 가지고 사람 차별해
자식과 모친을 의료비에서만 차별하고, 식비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법 있나
의사 수 증원과 무관하게 과잉진료는 지금도 발생 중

함익병 라이브(비온뒤) 의대 정원 1,000명 확대? 잘못된 정책인 이유(사진출처: 화면캡쳐, https://m.youtube.com/watch?v=lm0P6OvU_2U)
함익병 라이브(비온뒤) 의대 정원 1,000명 확대? 잘못된 정책인 이유(사진출처: 화면캡쳐, https://m.youtube.com/watch?v=lm0P6OvU_2U)

피부과 의사 함익병에 의하면, 한국 의료가 다른 곳보다 우수한데, 이는 한국인의 평균(혹은 기대)수명이 OECD 평균수명(81.0)보다 높다는 데 근거한 평가이다. 의사 수가 적은 일본의 평균수명(84.4)과 한국의 평균수명(83.3)이 OECD의 평균보다 길다는 사실에서 함익병은 의사 수가 적어서 사회적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결론을 끌어냈다. 의사 숫자가 적어도 한국 의사가 유능해서 좋은 의료환경을 구축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참조, 함익병피부과, 의대정원 1,000명 확대? 잘못된 정책인 이유, https://m.youtube.com/watch?v=lm0P6OvU_2U)

여기서 함익병은 비약과 오류를 범하고 있다. 평균수명이 의사 수, 나아가 의사의 유, 무능 여부와 관련 있다고 본 것이 그러하다.

함익병에 따르면, 한국의 현재 의사 수(2.5명/ 인구 1천 명당)는 OECD 평균(3.6)보다 더 적은데, 한국인 기대수명은 1970년 대비 2019년에 이르러 급격하게 늘어났다고 한다. OECD 국가에서는 의사 수가 한국보다 더 많지만, 평균수명이 한국만큼 늘어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는 한국에서 수명이 상대적으로 더 늘어났으니, 의사 수를 늘리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 또 의사 수가 더 많아도 평균수명이 늘어나지 않은 국가의 의사들은 무능한 것이고, 무능한 의사들은 많아 봐야 쓸모가 없다고 결론지었다. 반면, 한국의 의사들은 소수이지만 유능한데, 평균수명이 늘어난 것을 보면 안다는 것이다.

평균수명을 첫째, 의사 수, 둘째, 그 능력 유무와 연결시키는 함익병의 지론은 치명적 오류를 범하고 있다. 첫째, 의사 수가 적은데 평균수명이 늘어났으므로, 의사 수를 더 늘릴 필요가 없다는 논리는 의사가 평균수명을 관장한다는 전제가 성립되어야 가능하다. 그러나 그런 전제는 성립되지 않는다. 의사는 병을 고치는 일을 하지만, 평균수명은 병을 고침으로써 늘어난다기 보다 오히려 병을 앓지 않는 사람이 많을 때 늘어나기 때문이다. 의사는 한 사회의 평균수명을 관장하는 이가 아니다.

수명은 의료의 수준이나 의사 수와 무관하게 증감한다. 섭생 수준이나 환경, 노동의 강도 등이 건강에 크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남한에서 수명이 크게 는 것은 의사의 노력 때문이라기보다 보건 생활환경의 변화에 크게 기인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북한 의사 수 3.3명에 평균수명이 73.5세라는 사실 역시 의료의 질보다 섭생의 수준 등 생존환경에서 더 크게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

둘째, 함익병은 평균수명, 혹은 사망률 등을 의사의 능력 및 효율성 등과도 연관 지었다. 의사 수가 적어도 유능한 곳에서는 평균수명이 올라가고, 반대로 의사 수가 많아도 무능한 곳에서는 평균수명이 떨어지게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 같은 지론에 따르면, 미국과 스위스의 의사가 한국보다 더 무능하고 하릴없는 이가 되어버린다.

미국의 경우, 의사 수(2.6)는 OECD 평균보다 낮고, 한국(2.5)과 비슷하지만, 평균수명은 78.9세로서, 한국의 83.3세에 못 미치기 때문이다. 스위스에서는 사망률이 한국, 일본과 같이 낮은데, 의사수는 4.4명으로서 한국보다 더 많다.

미국에서는 한국과 의사 수는 비슷한데 평균수명이 더 짧고, 스위스에서는 의사 수는 한국보다 더 많은데 양국의 사망률이 비슷하니, 미국과 스위스 의사가 한국 의사보다 더 무능한 것이 되나? 아니다. 이같이 들쑥날쑥한 지표는 오히려 평균수명이나 사망률 여부를 의사 수와 연결시키는 담론 자체가 성립하지 않음에 대한 반증이다.

여기서 눈여겨볼 것은 함익병의 지론이 의사의 유, 무능 여부 담론에서 비용 문제로 넘어간다는 점이다. 그에 따르면, 한국의 평균수명이 늘어난 것이 유능한 소수의 의사들 덕분이므로 의사 수를 늘릴 필요가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줄여야 한다. 의사가 늘면 GDP에서 의료비가 차지하는 부담이 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함익병이 평균수명 혹은 기대수명 등을 빌미로 의사 수 증원에 반대하고 오히려 줄여야 한다고 보는 주요 근거는, 의사의 유, 무능 여부보다 의료 비용에 있음을 보게 된다. 이는 의료의 작동 기제에서 돈의 편익성이 우위에 있음을 뜻한다.

실로 함익병은 의료행위의 주요 목적은 돈을 벌기 위한 것이라고 단언한다. “인간은 모두 이기적이다”, “히포크라테스의 선서를 지키려는 의사는 하나도 없다. 의료는 돈벌기 위해 하는 것이다”, “소득이 1,000만 원이라면, 아이를 위해서는 500만 원을 쓸 수 있으나, 모친을 위해서라면 100만 이상 못 쓴다. 아이는 미래의 인력이지만, 모친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등 취지의 발언이 그러하다.

여기서 함익병은 다시 두 가지 치명적 오류를 범하고 있다. 첫째, 의사가 수명, 사망률 등 인간의 생존권을 좌우할 수 있다고 본 것, 둘째, 돈을 가지고 사람을 차별한 것이다.

위 첫째, 의사가 수명, 사망률 등 인간의 생존권을 좌우한다는 사고는 삶, 혹은 건강의 유지에서 의료는 보충적이라는 점을 망각한 것이다. 한 예로, 일본은 한국과 같은 의사 수(2.5)에, 평균수명(84.4)은 한국(83.3)보다 더 길다. 그러면, 함익병의 지론에 따라, 일본 의사는 한국 의사보다 더 유능하고 효율적이라는 결론이 나오나? 아니다. 오히려 일본은 의료가 삶을 좌우하는 사회가 아니라는 데 방점이 있다. 적극적 의료 개입 이전의 1차의료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의료는 그 다음 단계로서 보충적으로 개입한다.

1차 의료란 약물, 수술이 개입하기 전, 자택에서 하는 완화치료, 돌봄, 개호(介護: 개별보호, 자가)예방을 뜻한다. 여기서는 의사의 의료행위가 일일이 개입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한국에는 1차의료가 존재하지 않고, 건강보험 혜택은 반드시 병원과 의사의 손을 통해야 받을 수 있다. 그래서 병원과 의사의 의료행위는 권력이 된다.

OECD 지표에서 일본과 한국이 의사 수가 같다는 것은, 함익병이 주창하는 바, 의사의 유, 무능 여부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일본에서는 1차의료가 존재하므로 의료행위의 개입 필요성이 더 적은데도 의사 수가 한국과 같다는 것은, 일본의 의사가 상대적으로 더 여유가 있다는 뜻이 된다. 또 일본의 수명이 한국보다 더 길다는 것은, 함익병이 강변하는 바의 의료행위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의료 개입 이전의 자가(개호)의 예방적 의료가 병원 및 의사에 의한 의료행위보다 더 효과적이라는 사실의 반증이 될 수 있다.

둘째 오류는, 함익병이 돈의 가치를 가지고 사람을 차별하고, 또 사람의 가치를 생산성을 기준으로 평가한 것이다. 자식 위해서는 의료비 500만 원도 쓸 수 있는데, 모친 위해서는 100만 원 이상 못 쓴다고 하는 함익병의 사고가 문제가 되는 것은 의료비에서만 그런 것이 아닐 것이라는 점이다. 한 예로, 식비의 지출에서도 이 같은 차별은 존재할 것이 분명하다. 자식을 위해서는 얼마만큼의 경비를 감수할 수 있는데, 모친을 위해서라면 그 1/5 이상은 쓸 수가 없다는 논리가 성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혹여 함익병이 식비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주장할 수도 있겠으나, 그 말을 곧이듣기도 어려울 것 같다. 자식과 모친을 차별하는 근거로서 자식은 미래의 인력이지만, 모친은 그렇지 않다고 하기 때문이다. 그라면 의료비뿐 아니라 식비에서나, 또 다른 모든 경비에서도, 당연히 미래의 인력이 될 자식에게 5배쯤은 더 많은 돈을 쓴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 함익병의 주장에 따르면, 늙고 돈 없으면 죽는 수밖에 없는 것이 된다. 이는 ‘미래의 인력’도 아니고, 또 생산성도 없는 노인에 대한 현대판 고려장에 다름 아니다.

한편, 함익병은 의사 수가 증원되면, 소득이 줄게 되고, 그러면 소득을 늘리기 위해 갖가지 방법(과잉진료)을 동원하게 되므로 의료비는 줄어들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과잉진료에 대한 함익병의 이 같은 염려는 의사 수가 증원되고 난 다음이 아니라 바로 현재 의료계의 관행으로서 이미 존재한다.

함익병 자신도 토로하듯이, 경제의 다른 분야에서는 수요가 공급을 창출하지만, 의료계에서는 공급이 수요를 창출한다. 새 의료기술이나 새 장비가 들어오면, 그것이 수요를 창출하게 되고, 찍지 않아도 될 MRI를 찍어댄다고 한다. 환자의 필요가 아니라 의사의 필요에 의해서 하지 않아도 될 검사를 남발한다는 뜻이다. 지금도 과잉진료가 차지하는 비율은 전체 진료에서 30%를 웃도는 것으로 회자한다.

 

최자영 객원편집위원 (그리스 이와니나대학교 의과대학 보건학부 박사)

최자영 객원편집위원  paparuna999@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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