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모성애를 능가하는 살신성인

녀석들의 침투와 탈출경로는 주위를 둘러보면 쉽게 알 수도 있는 것인데 관심이 부족했던 것뿐이다. 자유분방형의 수컷들 중에 일부가 모험을 감행하여 에어컨 실외기의 파이프를 타고 아파트 내부에 침입하여 사람들을 당황하게 하지만 극히 이례적인 경우이다. 녀석들의 침투와 탈출은 목숨을 건 여정이다. 녀석들은 삶에의 의지가 이렇듯 강하고 번식력도 대단하다. 그런데 녀석들의 행태를 보면 그런 치열함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초연한 모습으로 유유히 사람 주변을 배회한다.

또 다른 의문도 있다. 인간의 피를 원하는 것은 암컷들이다. 수컷은 식물의 즙만 먹는 채식주의자이다. 암컷은 사람들이 사는 아파트로 침투하여 죽을지 살지 알 수 없는 살얼음판의 길을 가야하는 숙명을 안고 있다. 하지만 수컷은 굳이 그럴 필요가 없기에 정화조 밖으로 나가 식물이나 숲속을 찾아가면 될 일이다. 그런데도 암컷과 함께 아파트로 들어와 사람 주변을 얼쩡거린다. 그 배경은 무엇일까?

녀석들을 잡고 나면 수컷들이 종종 눈에 띈다. 잡기 전에 그 크기로 짐작할 수도 있지만, 잡고난 후에 피가 보이나 안보이나를 확인해보면 안다. 왜 수컷은 암컷을 따라 식물의 즙도 제공되지 않는 아파트 안으로 따라온 걸까? 왜 살해당할 위험을 무릅쓰고 암컷을 따라 인간세계에 들어오는 걸까?

어차피 정화조에서 태어난 암컷들은 다른 선택의 여지없이 인간계에 들어가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자신들을 보호하거나 위험에서 구해줄 수컷들의 역할이 필요하다. 그래서 본능적인 교감을 통해 교미 후에도 암컷을 져버리지 않고 인간계에 침투하여 정화조로 복귀할 때까지 자신을 엄호해줄 수컷을 배우자로 선택하는 것이다.

이것은 실제 사례로 입증되고 있다. 수컷은 저녁 무렵 사람의 관심을 끌기 위해 거실에 등장하여 마음의 준비를 시키고 암시를 주기도 한다. 새벽 무렵 피를 빨릴 것이라는 암시. 그리고 사람이 녀석을 잡으려고 허둥거리면 조용히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녀석을 잡으려고 의욕이 앞섰던 사람은 머쓱해서 소파의 자기 자리로 돌아간다. 수컷의 삐끼 역할이다. 한밤중에 사람의 피를 빠는 과정에서도 수컷들의 역할이 확인된다. 수컷들은 보디가드처럼 암컷을 보호하고 자기 새끼들이 무사할 수 있도록 제 역할을 다하고 죽는 것이다. 실로 암컷의 모성애 못지않은 살신성인의 자세가 아닐 수 없다.

모기의 세계에는 개미나 벌처럼 여왕모기도 없고, 일모기나 병정모기도 없다. 개미나 벌처럼 수직적인 조직이 아니라 수평적인 평등 조직이다. 배우자와도 각자의 역할에 충실할 뿐이다. 딱 한 번 교미할 뿐이니 사랑싸움을 할 이유도 없다. 암컷은 새끼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고, 수컷은 암컷을 도와 번식을 용이하게 한다.

녀석들의 영리함은 그런 모성애와 살신성인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녀석들의 기발한 작전을 모방하여 나온 전투기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모스키토'라는 별명을 가진 영국의 뛰어난 목제 경폭격기 DH-98 모스키토였다. 모기의 신출귀몰한 침투와 목적완수를 감행하는 전술을 영국 공군이 롤 모델로 삼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녀석들은 기이한 순간에 등장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도 한다. 대만에서 있었던 모기앵커 사건이 그렇다. 대만에서 모기 한마리가 생방송 TV 뉴스를 진행 중이던 경력 10년 차 여성 앵커의 기관지로 날아 들어가 생방송이 중단되고 앵커는 병원 응급실로 실려가 입원하는, 대만 방송 사상 초유의 사고가 발생했다. 2010년의 일이다.

녀석들은 글의 소재로 등장하기도 한다. '모기와 하루살이'에 대한 글이다. 생긴 건 비슷하지만 운명은 다르다. 모기와 하루살이가 하루 종일 노닥거리며 놀다가 헤어질 때가 되었다. 모기가 무심코 '내일 보자'는 한 마디에 하루살이가 뒤집어졌다. 하루살이에게는 내일이라는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글의 주제는 오늘 하루의 소중함일 것이다. 우리는 당연히 내일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하루를 보낸다. 과연 내일은 올까? 내일이 있는 오늘과 내일이 없는 오늘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 우리는 그 차이를 애써 무시하며 살아간다. 아무리 백세시대라 해도 죽을 사람은 죽는다. 죽음은 절망이기도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희망이기도 하다.

모기를 소재로 한 동화도 있다. 동화 <모기소녀>는 섬뜩하면서도 곤충과 동물들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교훈적인 동화이다. 어느 날 모기를 때려잡은 소녀가 저주에 걸려 모기로 변하는 이야기다.

작가는 수정란을 갖게 된 암컷 모기만이 자신의 난자를 성숙시키기 위해 동물성 단백질을 필요로 하며, 번식을 위해 두려움과 위험을 무릅쓰고 인간에게 달려든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이 동화를 썼다고 한다.

녀석들은 적과의 동침을 넘어 일상생활 속에서 교훈을 주는 존재로 거듭나고 싶기라도 한 걸까? 녀석들이 모성애로 인해 사람 피를 노린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녀석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달라지고 있는 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과의 동침을 원하지는 않기에 녀석들이 타도의 대상에서 제외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러한 이율배반은 녀석들과의 협상이 결국 한계가 있을 것임을 예고하는 것이다.

<계속>

편집 : 박효삼 부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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