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독립운동가 최운산 장군 22. 봉오동 수남촌 라철룡 촌장

최성주 주주통신원l승인2017.10.10l수정2017.10.10 1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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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9월 작은오빠와 나 그리고 막내동생이 함께 봉오동을 찾았다. 1945년 20대의 아버지가 봉오동을 떠나신지 70년 만이었다. 우리 가족사가 살아있는 곳, 생각만 해도 가슴이 아파오는 봉오동전투의 현장에 우리 형제들은 마치 비밀의 문을 열기 위해 큰 결단을 내리듯 첫 걸음을 내디뎠다. 1992년 우리나라와 중국이 수교를 하고 마음만 먹으면 찾아갈 수 있는 곳이 되었어도, 아버지가 태어나고 자란 봉오동은 우리 형제들에게 여전히 먼 이국땅 만주, 공산국가 중국에 속한 미지의 고향이었다.

사람들은 왜 산 증인인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왜곡된 만주 무장독립운동사를 재정립하지 않았느냐고 묻곤 한다. 우리 형제들에게 가장 아픈 질문이다. 1960년 아버지가 첫 서훈신청을 하고 그후로 16년이 흐른 1977년에야 최운산 장군이 독립유공자로 공식 인정을 받으셨다. 가장 기뻐하셨을 할머니도 1975년 노환으로 돌아가셨고, 상을 치른 5개월 후 어머니마저 갑자기 우리 곁을 떠나셨다. 어머니와 아내를 한 해에 떠나보내고 경제적으로도 가장 어려웠던 시기였다. 

최운산 장군이 독립유공자로 서훈되기까지 아버지의 마음 고생을 아는 우리는 이제 한 고비는 넘었으니 아버지 홀로 지셨던 짐을 내려놓으시고 조금은 편안해지시기를 바랐다. 비록 대한민국의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자랑스러운 가족사를 가슴 깊이 품었지만 어려웠던 가정형편 탓에 각자 홀로서기를 해야 했던 우리 형제들은 아무도 그 일에 천착하는 사치를 누리지 못했다. 

무심히 세월이 흘렀다.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의 주역인 최운산 장군의 역사를 사회적으로 정리할 힘이 없는 후손이 선택한 최선의 방어는 왜곡된 역사를 잠시 외면하는 것이었다. 아버지도 우리도 최선을 다 했으니 아무에게도 죄가 되는 일은 아니라는 핑계로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리고 기다렸다. 학자들의 연구의 폭이 넓어지면 자연스럽게 봉오동의 역사가 세상에 드러나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1910년대 후반 중국정부는 도문시의 수도 공급을 위해 물이 맑은 봉오동 계곡을 막아 댐을 쌓았다. 계곡 아래 하촌은 물에 잠겼고 주민들은 모두 흩어졌다. 수자원보호를 위해 댐 위의 산길은 출입이 통제되었다. 그 후로 봉오동전투의 현장을 찾는 역사학자와 한국의 언론은 모두 봉오동댐 위에 올라 봉오동전투의 현장은 다 물에 잠겨버렸다는 안타까움만을 토로하고 돌아오곤 했다. 그렇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우리에게도 봉오동은 물에 잠긴 고향이었다.

그런데 우리가 봉오동을 방문하기 전 연길에서 만난 연변대학교 역사학자로부터 봉오동 입구에 ‘수남촌’이라는 조선족 마을이 남아있으니 그 마을의 촌장을 한 번 만나보라는 조언을 들었다. 그러나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 그곳에서 봉오동의 역사를 아는 누군가를 만날 수 있으리라 기대하지 않았다. 봉오동은 우리가 가지 않으면 안 되는 아픈 곳이었다. 우리 집안의 역사이자 봉오동의 역사를 찾으려면 그곳에서 다시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찾아가야 하는 곳이었다.

▲ 봉오동전투 현장 답사팀을 안내하는 라철룡 촌장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지주였던 최운산장군의 집안도 청산을 피해 갈 수 없었다. 점점 심해지는 핍박에 고모들과 삼촌은 모두 봉오동을 떠나 다른 도시를 전전해야 했다. 그리고 문화혁명을 겪으며 살아남기 위해 최운산 장군과 관련된 것은 모두 숨기고 불태워야 했다. 오래 전 한국으로 이주한 삼촌과 고모를 통해 이미 봉오동에는 우리 집안과 관계있는 것은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들었다. 그러나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마음이 설렜다. 혹시 우리 집안의 역사를 기억하는 사람이 봉오동에 남아있을지 모른다고 기대하기도 했다.

우리는 봉오동 입구 마을 수남촌을 찾았고 라철룡 촌장을 만났다. 수남촌을 조선족 전통마을로 지정받는 일과 봉오동전투의 역사를 알리는 일에 앞장서고 있는 그는 봉오동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었다. 젊은 시절엔 돈벌이를 위해 북한과 러시아를 넘나들며 밀무역을 하는 등 거친 삶을 살기도 했지만 항일 무장독립운동의 전진기지 봉오동이 그를 다시 불러들였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와 정착했다. 사실 처음엔 최진동 장군 형제들을 잘 몰랐다. 그러나 봉오동의 역사를 공부하면서 봉오동을 건설한 최씨 가문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아가기 시작했고 연변역사학자들이 역사적 자료를 제공해주었다.

우리를 처음 만났을 때 그도 최진동 장군의 동생은 알았지만 최운산이란 이름을 잘 몰랐다. 사실 대부분의 마을 사람들은 최진동과 최운산을 구별하지 못했다. 그들에게 이미 신화적인 존재였던 최씨 형제들은 모두 최진동 장군이었다. 사실 최진동 장군을 보았다고 증언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1930년 이후 출생이다. 어린 시절 마을에서 그들이 보았다는 최진동 장군은 1945년까지 그 마을에서 살았던 최운산 장군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미 당시부터 대부분의 마을 사람들이 그렇게 알고 있었으니 어린 그들도 자신들이 보았던 최운산을 최진동으로 믿었을 것이다. 

1920년 봉오동 청산리 전투 후 연해주와 북만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1920년대 후반에 봉오동으로 돌아와 재혼을 하고 1932년 봉오동을 떠나 도문에서 살다가 1941년 돌아가신 최진동 장군의 얼굴을 마을 사람들이 알아보았을 가능성이 거의 없다. 그들이 기골이 장대하고 척 보면 무관의 풍모를 느낄 수 있는 분이었다고 증언하는 인물은 바로 최운산 장군이다. 큰할아버지 최진동 장군은 동생보다 키가 많이 작으셨다.

우리를 처음 만난 라철룡 촌장은 이 마을의 창시자인 최씨 집안에 대해 열정적으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지주 집안이라 청산을 당했고 모두 봉오동을 떠났지만, 그들은 조선 동포들이 간도에 정착해서 살게 해준 고마운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지주라고 다 같은 지주가 아니다. 최씨 집안은 달랐다. 자신의 재산을 모두 독립운동에 쓴 이런 훌륭한 지주들에 대해서는 재평가해야 한다."고 했다. 봉오동 주민의 후손인 그로부터 그런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 정말 반갑고 고마웠다. 그는 독립운동과 봉오동의 역할에 큰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사실 당시 봉오동의 젊은이들은 대부분은 봉오동전투에 참전했던 독립군들이었다.

그는 마을 어른들로부터 들었던 할아버지와 관련된 일화도 들려주었다. 마을 노인들이 밭에서 일을 하고 있으면 지나가던 최진동 장군이 말에서 내려 노인들에게 인사하고 안부를 묻고 나서 다시 말에 올라 길을 갔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우리 삼남매는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많은 사람들이 최진동 장군으로 착각하고 있는 그 분, 인품이 훌륭했다는, 많은 동네 노인들이 어려서 보았다고 증언하는 바로 그분은 바로 당시 수남촌에 살면서 봉오동을 관리하셨던 최운산 장군이시다. 

그리고 그는 아주 중요한 이야기를 했는데 “왜 한국에서는 봉오동전투의 현장이 모두 수몰되었다고 이야기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아마 현장을 모르는 사람들이 댐이 생겼다고 하니까 그렇게 상상하고 잘못 전해주었을 거다. 댐을 건설하면서 계곡 아래 마을이 수몰되긴 했으나 봉오동전투의 현장은 산 위에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고 했다. 북로독군부의 본부가 있던 상촌은 댐에서 10km 정도 더 안으로 들어간 곳에 있고, 그곳을 둘러싼 여러 개의 산이 바로 봉오동 전투의 현장이라는 것이다.

▲ 상부에서 입구를 향해 바라본 봉오동 댐

그는 상촌 마을의 흔적이 아직 남아있고 산 위에는 독립군이 팠던 참호도 그대로 있다고 했다. 어릴 때 그 참호 근처에서 탄피를 주워 학용품이랑 과자와 바꿔 먹었다고, 마을 아이들이 너무 열심히 탄피를 주우러 다녀서 지금 남아있는 것이 없어 아쉽다고 했다. 그 말을 듣자마자 우리는 혹시 그곳으로 데려다 줄 수 있는지 물었다. 그는 수자원 보호구역이라 일반인이 마음대로 출입할 수 없는 곳이지만 나중에 자신이 안내해 주겠다고 하면서 자신이 몰래 보관하고 있는 수류탄과 탄피 등 현장에서 발견한 몇 가지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는 우리에게 최진동 장군의 외손자인 고종6촌오빠가 아직 봉오동에 살고 있는 것도 알려주었다.

▲ 증조부 연변 도태 최우삼 비석 제막식
▲ 비석을 세우고 첫 절을 올리는 후손들

그를 만난 덕분에 고종 6촌오빠도 만나 증조할아버지 산소도 찾을 수 있었고, 봉오동전투의 진실을 찾는 일이 훨씬 빠르고 구체적으로 전개되었다. 젊은 시절의 아버지가 죽음을 피해 떠난 지 70년 만에 찾은 아버지의 고향에서 봉오동전투의 역사를 증언하는 것을 자신의 소명으로 생각하는 사람, 수남촌이라는 작은 조선족마을을 지키기 위해 봉오동전투의 역사가 제대로 복원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는 사람, 그를 위해 계속 공부하고 현장을 지키는 사람이 최운산 장군의 마을 수남촌을 지키고 있었다. 첫 방문에서 그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정말 큰 행운이었다.

▲ 최운산장군기념사업회 창립식

변화된 미디어 환경 덕분에 한국으로 돌아온 나는 그와 카톡으로 계속 대화할 수 있었다. 세상이 달라진 것을 실감하면서 문자로 안부를 나누다 중요한 사안을 의논할 때면 통화 모드로 전환해서 얼마든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라철룡 수남촌장 덕분에 봉오동에 두 번 다녀오는 것으로 증조부 묘소에 비석을 세울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 한국에서 역사학자들과 함께 최운산장군기념사업회를 창립했다. 어린 시절 봉오동전투의 현장을 놀이터 삼아 뛰어다녔던 그의 안내가 있어 역사학자들과 함께 봉오동전투의 현장을 답사하고 역사를 재확인할 수 있었다.

▲ 최우삼 비석 제막식에서 인사말 하는 라철룡 수남촌장

201년 10월 9일 최운산장군기념사업회의 윤경로 이사장과 라철룡 수남촌장이 앞으로 봉오동전투 전적지의 역사문화를 보존하고 선양하기 위해 함께 노력한다는 협약식을 가졌다. 앞으로 최운산 장군의 역할과 만주의 항일 무장독립운동사가 다시 정립되고 잊혀졌던 봉오동전투의 진실이 역사의 무대에 제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후손들이 모두 떠난 봉오동을 지키고 있는 수남촌 라철룡 촌장이 없었으면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의 역사를 찾아 떠났던 우리의 여정이 더 길고 어려웠을지 모른다. 그는 오늘도 봉오동 조선족 전통마을 수남촌을 지키고 있다.

▲ 협약식 후 기념촬영

 

편집: 양성숙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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