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고대사-6] 유물 이야기(마지막 편)

인장과 봉니 김동호 객원편집위원l승인2018.05.14l수정2018.05.14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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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한국고대사를 쓰면서 많은 자료들이 얼마나 사실에 가까울까? 기록은 진실일까? 라는 의문을 가졌습니다. 판문점에서 남북정상이 동일한 언어로 이야기를 나누고, 모두가 보고 듣는 상태에서 합의를 하여도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정 반대로 기록합니다.

하물며 천 년 전, 2천 년 전의 역사를 하나의 관점으로만 평가를 한다는 것 자체가 잘못된 신념이고, 사이비 종교의 맹신과 같은 위험요소라고 생각합니다.

이 지구상에는 많은 종족들이 여러 곳에서 흥과 망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그리고 다양한 종류와 수많은 유물을 남겼지요. 그 유물을 보면서 후손들은 상상도 하고, 많은 이야기도 만들었습니다. 그런 이야기들을 살펴보면 흥망성쇠가 일정한 패턴을 이루면서 반복됩니다. 거친 환경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문명이 탄생하고, 안정과 정착이 오래되면 새로 일어난 집단에 의해 또 망합니다. 결국 영원한 1등 국가는 존재할 수가 없지요.

천년설이 쌓여있는 곤륜산을 발원으로 흐르는 황하는 중국문화의 뿌리입니다. 사시사철 흐르는 물과 비옥한 퇴적층은 농경사회에 더없이 좋은 환경이지요. 하지만 폭우로 물이 넘치면 그 재앙은 너무도 큽니다. 강줄기가 갑자기 바뀌기도 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기도 하지요. 물을 다스리는 험난한 치수사업을 통해 중국의 중원문화는 다른 곳보다 앞서갔습니다. 더 좋고, 더 넓은 땅을 차지하려는 욕심은 숱한 전쟁과 많은 왕조를 등장시켰지요.

하, 상, 주를 지나 춘추전국시대를 거치면서 중원은 힘이 지배하는 사회였기에 폭력과 공포 그리고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날들이 이어졌습니다. 전쟁의 참화를 피해 중원을 떠나는 사람들도 있었고, 안빈낙도를 꿈꾸며 길을 떠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진시황이 6국을 정복하여 천하를 통일하자 수만 명이 동이로 이주를 하였다고 기록합니다. 요동이나 한반도에는 진나라 통일 이전부터 이주민들이 들어왔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요.

사람들이 이주할 때는 가장 중요한 물건들을 가지고 갑니다. 일제치하에서 함경도와 그 밖의 여러 곳에서 많은 백성들이 압록강을 건넜습니다. 값이 나가는 귀중품, 먹을 곡식과 추위를 막을 이부자리는 반드시 챙겨야할 품목이고, 만약 소달구지라도 끌고 갈 형편이면 대대로 내려오던 맷돌과 절구통도 우선순위였지요. 그렇게 고국을 떠난 조선인들은 요령성, 길림성, 흑룡강성에 자리를 잡았고, 소련연방으로 이주한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그들이 머물렀던 곳에는 이주민이 거주했던 시기보다 훨씬 오래전 유물들도 함께 남겼습니다. 그러한 유물들은 꼭 정복과 피정복을 의미하지는 않지요. 그들이 임종을 하면 전통양식으로 장례를 치르고 자손들이 있는 곳에 매장을 합니다.

1970년대 일본을 여행했던 한국인들의 쇼핑목록에 코끼리 밥솥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동남아 전역으로 한국의 압력밥솥이 퍼져나가고 있지요. 수년전 중국 남부 심천에 살 때였습니다. 한국을 여행하는 대부분의 중국인들이 압력밥솥을 사가지고 옵니다. 여러 가지 기능이 있는 고가의 밥솥, 중국어 사용설명서도 없어서 수시로 나에게 사용법을 물어오곤 했지요.

중국 전역에 수백만 개의 한국어가 새겨진 밥솥이 퍼졌을 것입니다. 천 년, 2천년 후에 유물이 되어 발견된다면 후세 역사가들은 중국 전역을 한국인이 통치하였다고 주장하지 않을까요?

사실 유물은 전쟁보다도 교류에 의한 이동이 훨씬 광범위함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경우는 인적 교류가 없어도 전파가 됩니다. 불교예술의 정화라고 꼽히는 석굴암 본존은 인도를 정복한 알렉산더 대왕의 영향으로 헬레니즘 문화와 인도문화가 만나 형성된 간다라 양식입니다. 신라의 석공들은 만난 적도 없고, 가본 적도 없는 지역의 문화를 구현하였습니다.

▲ 중국에서 발굴된 봉니. 왼쪽 위; 어사대부(御史大夫)봉니. 왼쪽 아래; 遼東 대신 ‘潦東守印’이라고 되어있음. 오른쪽; 다양한 형태와 글자체의 봉니 사진: 爾雅書坊

대동강 유역에서 중원의 유물이 많이 발견되면서 한사군 재 평양설의 유력한 증거로 거론이 되고 있습니다. 신라와 당의 연합군에 의해 660년 백제가 멸망하고, 소정방은 의자왕과 태자 융을 포로로 잡아 낙양으로 호송시키고, (唐朝“以其地置熊津、马韩、东明、金连、德安五都督府.)백제에는 웅진, 마한, 동명, 금련, 덕안의 5도독부를 설치합니다.

668년 평양성을 함락시키고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나라는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고 도호 설인귀와 휘하 2만의 병력을 주둔시켜 고구려를 통치합니다. 668년부터 676년까지 안동도호부가 평양에 존치되었지요. 9년간 통치하고 2만의 병력이 주둔하였다면 승전국으로서의 우월한 지위와 정확한 역사적 사실로 많은 당나라 유물이 남아있어야 정상입니다. 하지만 불확실한 800여년 앞선 진, 한 대의 유물은 나오는데, 더 많은 군이 주둔한 당나라 유물 이야기는 없지요.

당나라의 야욕을 눈치 챈 신라와 고구려 부흥운동 세력의 강력한 저항으로 안동도호부는 676년 요동성으로 물러났다가 1년 후 신성으로 옮겨 699년까지 존치되고 그 이후 유주로 물러납니다. 막강한 군사력으로도 민족이 다른 한반도와 요동반도를 지배하는 일이 그리 만만치 않았습니다.

한사군 재 한반도 평양설의 가장 유력한 증거로 언급되는 유물이 봉니(封泥)입니다. 봉니는 진나라부터 널리 유행하던, 서신이나 귀중품을 안전하게 전달하기 위한 검인도구입니다. 서신이나 귀중품을 묶은 후에 찰흙으로 끈이나 뚜껑을 봉한 후 음각을 한 인장을 찰흙위에 누르면 양각의 글자체가 나옵니다. 그 찰흙을 말리거나 구운 것을 봉니라고 합니다.

봉니가 처음 출토된 시기는 200년 전인 1822년 사천성에서 농부가 약초를 캐다가 발견합니다. 가치를 알아본 학자들이 돈을 주고 수집하자 가짜들도 많이 나돌았습니다. 마치 갑골문이 새겨진 갑골을 구매하자 농부들이 무더기로 만들어 가져왔던 사례와 유사합니다. 대동강 부근에서는 일제 강점기에 200여점이 출토되었다고 합니다.

인장은 권력과 신분을 나타냅니다. 전국시대 강대국 진나라의 침략을 막으려면 종으로 6국이 연합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전설의 유세객 소진이 6국의 재상이 되었는데, 그가 6개의 상인(相印, 재상의 인장)을 가슴에 품고 다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진의 통일 이전에는 관청의 인장이나 개인의 인장을 모두 새(璽)라고 불렀습니다. 진나라가 6국을 통합한 후 규정을 두고 황제의 인장만을 璽라고 부르게 했고, 일반 신민의 인장은 인(印)이라고 부르게 했습니다. 한나라 때에는 제후국 왕이나 태후의 인장도 璽라고 하였으며, 장군의 인장은 장(章)이라고 불렀습니다. 인(印)과 장(章)은 문과 무처럼 구분되어 사용했으나, 후에 도장을 통칭하는 의미가 되었습니다. 당나라 측천무후 때는 새(璽)의 발음이 사(死)와 혼동이 되어 보(寶)로 바뀝니다. 그 이후 청나라 때까지 새와 보를 함께 사용하지요.

인장의 초기 용도는 봉니에 사용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남북조를 지나 수와 당대에 이르자 종이가 보편화되고 인주를 사용하면서 봉니는 역사에서 사라집니다. 그리고 음각의 인장도 인주를 발라 종이에 직접 찍는 형태가 되자 오늘날과 같은 양각의 인장으로 변모합니다.

전설로 전해졌던 황제의 권위 진시황의 옥새인 ‘전국새’는 유방, 왕망, 광무제, 원술, 조조, 5호 16국을 거쳐 후진에 이르러 사라졌다고 합니다. 후대에 만든 전국새는 양각으로 되었으나 엄밀하게 따지면 갑골과 같은 음각이어야겠지요.

옥새나 관인 혹은 장군의 인장은 권위와 정통성을 나타냈습니다. ‘전국새’를 얻은 원술이 황제라 칭하기도 하였지요. 전쟁이 나면 왕은 옥새를 들고 도망가고, 승자는 먼저 옥새를 탈취합니다. 따라서 옥새나 인장 봉니가 출토된 곳과 만들어진 곳이 반드시 일치한다고만 할 수는 없지요. 대한민국 우표가 아프리카 우간다에서 나왔다고 하여 대한민국 우표를 우간다에서 만들었다고 볼 수 없습니다.

후대에 출토된 대다수의 봉니는 무덤에서 나온 순장 유물입니다. 아마도 죽은 사람의 신분을 남기기 위한 목적이나 극락왕생의 희망 또는 당시의 유행에 따른 순장품목중의 하나였을 것입니다. 사자에게 관대한 풍습으로 보아 관직이나 신분은 부풀려졌을 수 있고, 당시의 선진 강대국의 풍습을 모방하였을 수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사실과 다른 봉니가 중국에서도 많이 발견되었습니다. 요동어사라고 새겨진 봉니는 ‘遼東御史’가 아니라 ‘潦東御史’로 표기되어 요동의 실체와 봉니의 역사적 가치를 절대화할 수 없음을 증명하기도 합니다.

▲ 왼쪽; 일제 강점기 대동강 유역에서 출토된 봉니(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글자 중에서 印을 유심히 보면 마치 한 사람이 만든 듯 유사하다. 오른쪽; 서안에서 출토된 봉니. 다양한 소재와 글자체. 사진: 위키피디아

또 하나 대동강유역에서 출토된 봉니만을 보면, 모두 일제 강점기에 주민들에게 돈을 주고 사들였다는 점을 강조하는데, 이는 일본인들이 위조하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함은 아니었을까? 그리고 봉니의 글자체나 형태, 흙의 재질이 모두 유사하여 조작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낙랑대윤(樂浪大尹)이라는 직함도 실제와는 다르고요.

봉니가 주로 무덤에서 출토된다는 점을 보면 낙랑군 치소가 대동강 유역에 있었다는 가설은 더욱 거리가 있습니다. 전승국의 장병들이 임지에서 죽을 가능성도 희박하고, 설사 죽었다고 해도 가족과 후손이 제사를 지내줄 고향으로 가지요. 선인들은 객사를 가장 두려워하였습니다. 영혼이 구천에서 떠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일제치하 이토 히로부미나 역대 조선총독들, 일본인 간부들 무덤이 하나라도 한반도에 남아있습니까? 대동강유역에서 출토되는 유물들은 한사군 훨씬 이전부터 이주한 이주민들의 유품으로 보아야지 낙랑군 치소로 볼 수 없습니다.

한국 고대사를 쓰면서 양심과 사실에 한 점 어그러짐이 없기를 간구하였습니다. 하지만 제가 한국인임을 의식에서 지울 수 없었음 또한 부인하지 못합니다. 아마 사마천이나 다른 역사가들도 그리하였을 것입니다.

이상으로 한국 고대사를 마칩니다.

편집 : 김태평 객원편집위원

김동호 객원편집위원  donghokim01@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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