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사관, 동북공정프레임, 그리고 갇힌 역사학자들

고대사를 둘러싼 역사논쟁이 뜨겁고 분분하다. 바른 역사로 가기 위해 거쳐야할 과정이라면 반갑고 바람직하다.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응하여 설립된 동북아역사재단이 그려낸 BC 1~2세기 지도에서 중국(漢)은 한사군을 앞세워 옛 고조선의 강역으로 깊숙히 파고들고 있다. 더구나 낙랑Lelang은, 평양은 물론 황해도를 완전히 잠식하였으니, 우리나라 주류사학자들의 이른 바 '낙랑평양설'과 같은 맥락이다. 이에 대하여 재야사학자들은 이른 바 '낙랑요동설'을 내세워 주류사학과 동북아역사재단이 중국의 동북공정에 동조하였다고 맹렬하게 비난한다. 한민족의 안방(한반도)조차 중국에게 내주어버리는 역사지도를 받아들이기 어려운 우리로서는 재야사학에 열렬한 박수를 보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재야사학의 논리를 음미해보자.

'한사군(낙랑)이 요동에 있었으므로 요동까지는 중국 땅이다.'

우선 이 문맥에서 첫번째 떠오르는 의문은 '만리장성'이다. 중국은 오랜 옛날부터 서쪽 자위관에서 동쪽 산해관까지 무려 6000km에 달하는 장벽을 쌓아 여러 오랑캐족들과의 경계로 삼았는데, 어찌하여 새로운 경계선을 긋는단 말인가.

두번째 의문은 한사군의 정체다. 과연 한나라의 사군-낙랑 진번 임둔 현도-은 조선총독부와 같은 식민수탈기구였을까. 우리에게 잘 알려진 '한서지리지'를 보자.

현도玄菟와 낙랑樂浪은 무제武帝 때 설치되었으니, 조선朝鮮 예맥濊貉 구려句驪 만이蠻夷를 획일화[皆]하였다. 은殷나라의 道가 쇠衰하자 기자箕子는 조선으로 가서{안사고 가로되 「사기史記」에 이르기를, “(주나라)무왕武王이 주紂를 토벌하고 기자箕子를 조선에 책봉하였다”하였으니, 이 글과 같지 않다} 그 백성들에게 (예禮와 의義를)가르쳐서 예禮와 의義로써 지위표지[織]를 사냥[田]하고 노동[作]의 가치를 잠식[蠶]하였으니, 낙랑樂浪이 8조를 범犯하여 (모방을)금기[禁]하매 조선백성들은 ‘8조의 금기[禁八條]’를 침범[犯 모방]하였다.[敎其民以禮義田織蠶作 樂浪朝鮮民犯禁八條] {안사고 가로되, '8조'는 차별화[見]를 구비[具]하지 못하였다.}

'한서지리지'는 낙랑의 정체를 (은밀하게)드러내고 있다. 낙랑은 무엇인가? 기자箕子(기자의 이름을 앞세운 제자들)가 하느님말씀(예禮와 의義)를 가르치는 '예배당'이다. 그런데 한서지리지를 열심히 읽은 학자들은 왜 '낙랑=예배당'임을 알지 못하였을까? 우선 그들이 착각한 것은 '무제武帝'다. 학자들은 의당 '한나라 무제'라고 이해하지만, {안사고의 힌트}는 '주나라 무왕武王'이 곧 '무제武帝(책봉하는 왕은 황제이므로)'라고 암시하고 있지 않는가. 그 착각의 원인은 맥락을 무시한 데 있었으니, 맥락에 눈감은 학자들은 '주제'를 파악하지 못하고 '한서지리지'가 고조선에 '팔조법금[犯禁八條]'이 있었음을 증언한다고 한다. 그러나 '한서지리지'의 주제는 문화변동이다. 고조선은 '팔조八條'라는 법률(형법)의 나라였는데, 기자箕子(또는 낙랑)에 의하여 '법도[禁八條 삼강오륜 같은]'의 나라로 바뀌었다는 말이다.(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조선의 영혼은 살아있었다.) 

이제 독자들은 낙랑의 정체를 어느 정도 이해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한사군=중국땅'이라는 엉터리지도와 바보역사학을 간파했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시작은 이제부터다. 낙랑을 이해함으로써 중화의 정체를 간파하고, 그 중화를 거부하며 수천년 동안이나 투쟁해온 자취를 더듬어 바보역사가들이 묻어버린 위대한 역사를 찾아야 할 것이니 말이다.

기자는 왜 동쪽으로 갔을까?

한서지리지는 "은나라의 도道가 쇠衰하자 기자箕子는 조선으로" 갔다고 한다. 중화의 도道가 쇠퇴한 것이 은나라 멸망의 원인이며, 중화의 도道를 쇠퇴하게 한 근원이 고조선임을 암시한다. 은나라는 자유분방한 풍조가 만연하여 멸망하였다고 하지 않던가. 아버지가 하나이듯이, 오직 한 명의 군주를 섬기고 한 명의 지아비를 섬기던 중화의 백성들은 저 동방의 단군조선에서 불어오는 자유와 풍요의 바람(한류)에 매료되어 반란이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러자 무왕은 선수전략으로 '무도한 주왕'을 죽이고 새로운 중화(주나라)를 건설하였지만, 고조선의 자유분방한 풍속을 그냥 둔다면 주나라의 사직 또한 오래가지 못할 것이기에, 기자箕子를 조선으로 가게 하였고 그곳에서 찬란한 중화의 문물을 선전케 하였던 것이리라.

그렇다면 800여년 후 위만은 왜 조선으로 갔을까?

위만조선이 세워지고 100여년 후 한무제는 왜 조선으로 갔을까?

그 후 다시 800여년 한나라 수나라 당나라는 왜 왕조의 몰락을 감수하면서까지 기필코 고구려를 무너뜨려야 했을까?

도대체 고조선과 고구려의 정체가 무엇이기에(후편에서 논한다).

편집 : 김태평 객원편집위원, 심창식 부에디터

오순정 시민통신원  osoo200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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