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공자왈맹자왈을 매질하라

잠시 1화 2화를 환기한다. 동북공정과 그 대응과정에서 불거진 고대사논쟁 제1의 이슈는 '낙랑'이다. 강단사학자들은 중국측 주장과 비슷한 낙랑평양설에 입각하여 고대 중국의 영토를 한반도까지 확장한다. 반면 재야사학은 '낙랑요동설'을 내세워 광대한 고조선과 고구려를 주장하지만, 역시 '낙랑=중국땅'이라는 프레임에 매몰되어 있다. 낙랑은 식민통치기구가 아니라 중화(유교)를 전파하는 예배당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들은 그것을 전초기지삼아 바람에 흔들리는 버들꽃 세상 '유화문명'을 무너뜨리는 중화의 문화전략으로 활용하였으니, 우리는 끊임없이 그들과 투쟁하며 살아야 했던 것이다.

일찍이 안시성이 함락된 이후 유화의 영혼은 서서히 꺼져가고 있었기에, 일연은 그 잃어버린 역사를 기억Renaissance해내고자 삼국유사를 쓴다. 제1편 '왕력王曆'이 고구려 신라 백제 가야왕의 연표라면, 사실상 서막이라 할 수 있는 제2편 '기이紀異(다양성을 기원하다)'에서 제1성으로 다음과 같은 폭탄선언을 터뜨린다.

"나[余]는 공자왈맹자왈[曰]을 매질[又≒攴]하노라."

학자들은 "서문[叙]에 말[曰]하노라."라고 해석하지만, 일연은 결코 서문에다가 '서문에 말하노라'라고 말하는 바보는 아닐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하에서 일연은 중국 삼황오제의 탄생신화들을 조롱하며 우리 신화는 그들과 차별화[異]되는 '다양성[異]의 신화'라 하였으니, 전후맥락에 비추어 일연은 '공자왈맹자왈과의 전쟁'이라는 삼국유사의 취지를 제1성[叙曰]에 집약하였으리라. 일연이 역사의 맥을 더듬어 재구성한 유화문명 제1의 신화 '단군신화'의 한 장면을 보자.

{서두 생략: 환웅이 태백산 신단수 아래로 내려와 신시神市(신의 도시)를 각성[謂]시켜 인간의 도시로 부활하는 이야기}

획일화[一]하던 곰과 획일화[一]된 범이 같은 (중화의)동굴에 살며 항상 신인 환웅께 기도하여 (곰은)사람으로 부활[化]하고 (범은)사람대접[爲]받기를 원하였다.

때마침 신인[神]이 영험한 쑥 한 줌과 마늘 20개를 던져주며 말하였다.

“너희가 이것을 먹고 중화[日]의 빛[光]을 차별화[見]하지 않으면, 하얀 깃털[白日]을 유정유일[一]하던 편便이 사람들의 프레임[形]을 깨우치리라.”

곰과 범은 그 말귀를 (각자의 수준에서)이해[得]하였으니, 그것을 먹으며 ‘왕을 죽이고 거듭나기[三七日 중화를 부활하는 '음양'을 말한다]’를 금기[忌]한 곰은 여자의 몸을 得하였으나, 범은 불능不能이 금기[忌]하였으므로 사람의 몸을 得하지 못하였다.

곰이 겁탈(획일화)한 자들은 (중화라는 남편을 버린 지조없는 여자와)짝짓기를 기피하며 도리[故]와의 결혼을 위하였으니, (웅녀는)매일 신단수 밑에서 문화를 저주[呪有]하며 임신을 기원[願孕]하였다.

수컷[雄]들은 마침내 변화[化]를 받아들여[假] 그녀와 혼인하였으니, 웅녀는 잉태해서 아기를 낳아 단군왕검壇君王儉이라 불렀다.

'중화라는 이름의 동굴을 탈출하라.'

이것이 신화의 요지이다. 곰은 육식 초식을 겸한 잡식동물로서 양쪽-의식세계와 물질세계, 존경욕구와 생존욕구-을 넘나드는 지식인을 비유한다.(주몽신화에서는 물과 땅을 오고가는 자라를 지식인에 비유한다.) 범은 용감무쌍하게 욕망을 추구하는 자연인이다.(무용총수렵도의 범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곰이라는 지식인이 중화에 부역하여 호랑이백성들을 획일화하였으니, 소인배라고 멸시당하는 범은 사람대접을 받으며 살기를 소원한다. 마침 환웅이라는 신인이 내려와 천지를 개벽한다는 소식을 들은 곰은 그 동안의 과오를 참회하며 자기가 획일화해버린 인간들을 부활하겠다고 기도한다. 환웅의 미션을 따라 부활에 성공한 것은 곰. 그러나 곰이 인간의 편으로 돌아와 휴머니즘을 널리 전파한다면 범 역시 잃어버린 인간을 회복하리라.

중화와의 차이를 음미하라.

중국의 신화들은 모두 선민사상에 입각하였으니, 중국의 삼황오제는 비루한 인간의 아들이 아니라 하늘 용 무지개 따위의 아들들이다. 그러나 단군은 웅녀와 이름모를 어떤 남자-환웅이 아니다-의 아들이었으니, 서두의 "신시神市(신의 도시)를 각성[謂]시켰다[謂之神市]"와 더불어 휴머니즘의 발로가 아닌가. 르네상스 내지 휴머니즘이란 서구의 역사에서 '신神으로부터의 독립'이었으니 말이다. 주체적 인간을 위하여 환웅은 어떻게 "신시神市를 각성[謂]"시켰는지 다시 '생략된 서두'를 보자. 

"(환웅이)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가 임금[穀]과 명命, 병病, 형벌, 선악을 주재하는 것을 척결[將]하매, 범인凡人들은 인간의 360여 가지 일을 주재함으로써 세속[世]을 좇아[在] 교화[化]를 제도[理]하며 충족[有↔금기]의 씨를 뿌렸다."[將風伯雨師雲師而主穀主命主病主刑主善惡 凡主人間三百六十餘事 在世理化時有]

그러나 학자들은 "환웅은 풍백風伯·우사雨師·운사雲師를 거느려 곡식·수명·질병·형벌·선악 등을 주관하고 모든 인간의 360여 가지 일을 주관하여 세상을 다스리고 교화하였다."라고 가르쳤으니, 인간본위의 단군신화는 神본위의 신화로 완전히 뒤집혀버린 게 아닌가.

단군은 말한다. 중화의 동굴을 탈출하라. 주체를 회복하라. 공자 맹자가 주입한 선악을 폐기하고 각자가 주체로서 선악(가치)을 창조할 때, 인간으로부터의 '가치의 하늘(상부구조)'이 열릴 것이니단군신화가 선언한 것은 곧 인내천人乃天이 아닌가.

그렇다면 중화문명은 신학의 세계, 유화문명은 철학의 세계라고 말할 수 있을까? 주역 시경 서경 논어 맹자 중용 대학 도덕경 장자 묵자 등을 재고하시라. 철학자들은 그것들을 뭉뚱그려 철학이라고 하지만, 그 중에는 철학이 있고 반철학이 있음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슬퍼런 공자 맹자를 향하여 맹렬한 공격을 퍼부었던 노자 장자 등의 위대한 혁명가들이 있었음을. 그런데 왜 중국에는 공자 맹자의 나라만 있고, 노자 장자의 나라는 보이지 않는 것일까? 여기에 생각이 미친다면 또 다른 역사를 마주할 수 있으리라. 기자가 동쪽으로 가고 한나라가 사군을 설치한 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위만은 왜 동쪽으로 갔을까?'라는 화두를 말이다. 이제 '단군신화' 첫구절을 보시라.

"위서魏書에 이르기를, 마침내 2천년을 지나 단군왕검壇君王儉을 ‘부활·계승[有]’하여 아사달阿斯達에 도읍을 세우고 나라를 열어 ‘조선朝鮮’이라 불렀으니…"[魏書云 乃往二千載有壇君王儉 立都阿斯達]

생략된 주어는 누구일까? 다름 아닌 '위만魏滿'이다. 일연은 위만조선에서 단군조선을 추적하였으니, 역사란 과거에서 현재를 바라보고 현재로부터 과거를 성찰하는 게 아닌가. 그러나 학자들은 "‘위서魏書’에 이렇게 말했다.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에 단군왕검이 있었다. 그는 아사달에 도읍을 정하고…"라고 왜곡하고서는 도대체 '위서魏書' 어디에 그런 말이 있느냐고 일연을 타박한다. 그러니 위대한 중국철학자들 덕택에 우리가 단군의 영혼을 회복하였다는 일연의 취지는 완전히 실종될 수밖에. 일연은 말한다. 주나라가 일어나고 기자가 동쪽으로 와서 중화문명의 씨를 뿌릴 때, 단군(의 영혼)은 주나라(장단경)로 가서 유화문명의 씨를 뿌렸다고. 동쪽으로 간 기자, 본국에 남아 찬란한 중화를 건설한 주공씨의 힘으로 한 동안 잘 나가던 주나라가 서서히 기울어가며 중국민중의 황금시대가 열렸으니, 다름 아닌 춘추전국시대(BC8~3세기)다. 노자 장자와 같은 철학자들은 조선과 같은 상생화생의 나라를 꿈꾸었으리라. 그러나 진나라 한나라로 이름을 바꾸어가며 거듭 부활하는 중화의 망령을 바라보며 '백성의 나라 중국'의 꿈을 잃어버린 혁명가들은 중국을 떠날 수밖에 없었으리라. 위만처럼 말이다. 그 중국판 엑소더스의 물결 속에서 위만조선이 세워지고, 더불어 마한馬韓이라는 나라가 탄생하였으니, 이 지점에서 또 하나의 화두를 생각하시라.

우리는 왜 '한韓겨레'인가? 4화를...

편집 : 김태평 객원편집위원

오순정 시민통신원  osoo200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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