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통의 메일이 왔다. 양상우 한겨레 대표이사가 “2004년 겨울, 침몰하는 한겨레를 구하려 ‘혹한의 겨울 바다’로 뛰어든 노선배가 한겨레에 진 신세를 갚겠다며 가산을 정리한 돈을 내놓으셨다”며 사내 구성원들에게 11일 오전에 보낸 것이다. ‘박화강의 1억, 그리고 두 개의 편지봉투’라는 제목의 글은 한겨레 30돌을 맞은 지난 달 15일에 있었던 일을 소개했다.

2004년 11월 한겨레 경영 위기로 비상경영체제가 들어서자 광주지역에서 일한 박화강 기자는 당시 양상우 비상경영위원회 노조측 위원장을 찾아와 “한겨레신문은 내게 늘 기쁨이었고 희망이었고, 행복이었다”며 “능력이 부족해 1등 신문 못 만들고 떠나 미안하다”며 사직서가 든 봉투를 내밀었다.

그랬던 그가 한겨레 서른살 생일날 다시 한겨레를 찾은 것이다. “오늘 아침에 30년 전 창간호 1면을 그대로 실은 창간 30돌 기념호를 보고 가슴이 먹먹해졌다. 나는 한겨레에 정말 많은 신세를 졌다. 진실과 정의를 가슴에 품을 수 있었던 내 삶은 한겨레가 있어 가능했다”며 1억원이 든 편지봉투를 양 대표이사에게 건넸다. 그는 “한겨레에 내놓으려고 한다. 지금껏 한겨레는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이 아니라고 믿어왔다. 사회를 위해 존재하는 조직이었고, 앞으로도 그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거듭 말하지만 나는 한겨레에 너무 많은 신세를 진 사람이다. 이 돈, 꼭 한겨레를 위해 써달라”고 말했다.

[관련기사 보기] http://www.hanion.co.kr/news/articleView.html?idxno=5735

양 대표이사는 “박 선배의 뜻을 가장 오랫동안 한겨레가 기릴 수 있는 방안이 무엇일지 임원들과 함께 고민하고 우리사주조합과 논의한 끝에 박화강 선배가 기부한 1억원을 우리사주조합에 출연해 후배들이 회사 주식을 더 보유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그는 또한 “박 선배가 달리고 싶었으나 더는 달리지 못한 길을, 젊은 ‘후배들’이 힘껏 이어 달리도록, 그 험한 여정에 ‘박화강 주식’은 나침반이자 지도이자 등불이 되기를 바란다”며 “우리사주 지분율은 한겨레 지배구조의 근간으로 회사도 박화강 선배의 뜻을 깊이 새겨 늦어도 다음달부터는 오랜 기간 미뤄온 우리사주 지분율 방어를 위한 논의를 우리사주조합과 적극 모색해나가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양상우 대표이사 편지 전문 보기]

'박화강의 1억, 그리고 두 개의 편지봉투'

창간 30돌 기념일이었던 지난달 15일 오후, 머리가 하얗게 센 노 선배가 사장실 문을 열고 들어오셨습니다. 박화강 선배였습니다. 많은 사우들은 박 선배를 잘 모르실 겁니다. 제게, 아니 많은 사우들에게, 박 선배는 한겨레란 무엇인지 한겨레인은 어떠해야 하는지를 새삼 깨닫게 한 화인(火印)같은 존재입니다.

지난 2004년 한겨레호는 침몰을 눈 앞에 둔 경영위기를 겪고 있었습니다. 당시 한겨레 임직원은 생살을 찢듯 사랑하는 동료 선후배들을 ‘희망퇴직’으로 떠나 보내며 한겨레호의 무게를 줄였습니다. 두 번 다시는 겪지 말아야 할, 이른바 ‘비경위(비상경영위원회)’ 시절이었습니다.

한겨레 창간위원이자 편집국의 어른이었던 박화강 선배는, 매서운 초겨울 바람이 광장을 휩쓸던 그해 11월11일 오후 광주에서 상경해 용산역 앞 한 찻집으로 저를 불러냈습니다. 당시 저는 비경위의 노조쪽 공동위원장이었습니다. 박 선배는 제게 백척간두에 놓여 있던 회사 사정을 걱정하며 이것 저것 물으셨습니다. 그리고선 “당신을, 당신들을 믿는다”며 편지봉투를 건네셨습니다.

저는 편지봉투에 회사 일에 쓰라는 ‘촌지’가 담긴 줄 알았습니다. ‘받지 않겠다’는 제게 반강제로 봉투를 맡긴 박 선배는 다시 기차역으로 바쁜 걸음을 재촉했습니다. 회사로 돌아오는 차 속에서 편지봉투를 열었습니다.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했습니다. 그리고는 쏟아지는 눈물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편지봉투 안에는 사직서가 들어 있었습니다.

‘어제 사직서를 냈습니다. 직원으로서는 마지막일지도 몰라 회색빛 건물도 보고, 정든 얼굴들도 만나 보기 위해 회사를 찾아갈까도 싶었으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눈물부터 보일 것 같아 다른 직원 편에 사장 앞으로 사직서를 보냈습니다.

사직서를 품에 담고 기차를 타고 서울로 가는 길은 고통이면서도 아름다웠던 추억들로, 지난 16년만큼이나 멀고도 길었습니다. 추수가 이미 끝나고 새떼까지 떠난 초겨울 빈 들판은 바로 저의 모습이었습니다. 비바람과 눈보라, 태풍 속에서도 아름다운 들판을 만들어 보려다가 지치고 힘 떨어지고 어느새 늙어 망연자실 홀로 서 있는 농부는 바로 저였습니다.

한겨레신문은 저를 사람다운 사람으로 사람답게 살게 했습니다. 늘 기쁨이었고 희망이었고, 행복이었습니다. 오래 오래 함께 걸어가고 싶은 동반자였습니다. 거기서 만난 사람들은 세상에서 내가 만난 사람들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능력이 부족해 1등 신문 못 만들고 떠나 죄송합니다.

가을바람에 단풍이 들면 잎이 떨어지고, 육신도 세월이 가면 힘도 떨어지고 기웁니다. 빈 들판, 빈 가슴으로 지리산에나 다녀와서 비록 작지만 다른 2막이 있는지 찾아보겠습니다. 한겨레신문사에서 행복했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04년 11월12일 오후 4시, 한겨레 사람들은 박화강의 전자우편을 받았다. ‘정든 회사를 떠나며.’ 전자우편 제목을 보고 놀라 기사 마감과 신문 제작도 잠시 멈추었다. (* 한겨레20년 사사 <희망으로 가는 길> 중에서)

 

그로부터 14년이 흐른 지난달 15일, 창간 30돌 행사로 마음이 급한 저를 붙잡고 박화강 선배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아침에 30년 전 창간호 1면을 그대로 실은 창간 30돌 기념호를 보고 가슴이 먹먹해졌다. 말도 나오지 않았다. 나는 한겨레에 정말 많은 신세를 졌다. 진실과 정의를 가슴에 품을 수 있었던 내 삶은 한겨레가 있어 가능했다.”

그러고는 박 선배는 “요즘 회사 사정이 어떠냐?”고 물었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갔습니다. 중간에 한숨도 뒤섞였습니다. “고생하는 거 잘 안다. 자잘한 분란에 신경 쓰지 말고 꿋꿋하게 회사를 잘 이끌어주면 고맙겠다”는 말씀과 함께 박 선배께서는 편지봉투를 하나 내놓으셨습니다. 14년 만에 다시 한 번 받아 든 편지봉투였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사직서 대신 1억원이 담겨 있었습니다. “한겨레에 내놓으려고 한다. 지금껏 한겨레는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이 아니라고 믿어왔다. 사회를 위해 존재하는 조직이었고, 앞으로도 그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거듭 말하지만 나는 한겨레에 너무 많은 신세를 진 사람이다. 이 돈, 꼭 한겨레를 위해 써주면 고맙겠다.”

2004년 겨울, 침몰하는 한겨레를 구하려 ‘혹한의 겨울 바다’로 뛰어든 노선배가 한겨레에 진 신세를 갚겠다며 가산을 정리한 돈을 내놓으셨습니다. 저는 몸들 바를 모를 정도로 부끄러웠습니다. 거듭 말씀드렸습니다. “당당하게 어려움을 헤쳐나가겠습니다. 남아 있는 후배들이 무슨 면목으로 이 돈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라며 번의를 부탁 드렸습니다. 하지만 박 선배는 뜻을 접지 않으셨습니다. 박 선배와 저 사이엔 무거운 침묵이 흘렀고, 창간 30돌 행사장으로 떠나야 할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오늘은 창간 30돌 행사 탓에 더는 말씀을 나누기 어려우니 이 1억원은 일단 회사 금고에 보관해두겠습니다. 행사를 치르고 나서 광주로 찾아 뵙겠습니다.” 그날 박 선배와 그렇게 헤어졌습니다. 목이 메고 눈물이 쏟아져 작별 인사도 제대로 나누지 못했습니다. 창간 30돌 행사장에서 환영사를 읽는 제 표정이 행사 취지에 걸맞지 않게 밝지 않고, 목소리 또한 쉰 듯 갈라지고 낮았던 게 그저 피곤함이나 당시 시한폭탄처럼 시시각각 조여 오던 ‘회사 현안’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인간 박화강’이 남긴 감동은 제 마음을 크게 흔들어 놓았습니다.

창간 30돌 행사를 치르고, 5월17일 박 선배께 전화를 드렸습니다. 광주로 찾아 뵙겠다고 했습니다. “부끄러워서 도저히 받을 수가 없으니 뜻을 거둬주시면 고맙겠습니다”라고 거듭 말씀드렸습니다. 박 선배는 예의 그 사람 좋은 목소리로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하게 저의 광주행을 막으셨습니다.

“생각을 바꾸지 않겠다. 그러니 광주에 내려오지 마라. 바쁠 텐데 한겨레 일이나 열심히 해라. 다 내가 좋자고 내놓는 돈이다. 한겨레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면 좋겠다. 한겨레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고 역사적 소명을 다하려 노력하는 데 이 돈이 작은 씨앗, 자극이 된다면 나는 더 바랄 게 없다. 오직 한 가지 조건이 있다면, 혹여 라도 내 이름을 건 상 같은 건 절대 만들지 마시라. 더 할 말이 없으니 전화 끊겠다.”

그 날 이후, 저는 ‘박화강의 1억원’을 어떻게 할지 내내 고민했습니다. 박 선배의 뜻을 가장 오랫동안 한겨레가 기릴 수 있는 방안이 무엇일지 임원들과 함께 고민하고 우리사주조합과 논의한 끝에 한 방안을 마련해 박 선배의 뜻을 여쭸습니다. 사주조합이 제안하고 회사가 합의한 이 방안은 박화강 선배가 기부한 1억원을 우리사주조합에 출연해 후배들이 회사 주식을 더 보유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는 먼저 재직중인 정규직 사원들이 회사 주식을 구매하면 이에 매칭해 ‘박화강 주식’을 배분하고 남는 주식은 1998년 이후 입사한 사우들에게 고루 나누는 것입니다. 박 선배도 좋은 방안이라며 반기셨습니다. 이에 따라 이번주 중 회사는 박화강 선배가 기부하신 1억원을 우리사주조합에 출연할 예정입니다.

박화강 선배는 2004년 겨울, 침몰 위기의 한겨레를 살리고자, 심청이 인당수에 뛰어든 심정으로, 한겨레를 떠나셨습니다. 그리고 14년이 흐르도록 늘 한겨레를 잊지 않으셨습니다. 아니 누구보다 열렬히 사랑하셨습니다.

박 선배가 달리고 싶었으나 더는 달리지 못한 길을, 젊은 ‘후배들’이 힘껏 이어 달리도록, 그 험한 여정에 ‘박화강 주식’은 나침반이자 지도이자 등불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사주 지분율은 모든 사우들이 아시다시피 한겨레 지배구조의 근간입니다. 회사도 박화강 선배의 뜻을 깊이 새겨 늦어도 다음달부터는 오랜 기간 미뤄온 우리사주 지분율 방어를 위한 논의를 우리사주조합과 적극 모색해나가겠습니다.

한겨레 동료 여러분 가운데는 박 선배의 기부를 받았어야 하느냐부터 용처가 적절한지 등에 대해 다양한 의견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경영진의 부족한 상상력을 너그러이 이해해주시기를 부탁 드립니다. ‘아낌 없이 주는 나무’를 떠올리게 해주신 ‘참 선배님’ 박화강 선배께 진심으로 머리 숙여 감사 드립니다.

2018년 6월 11일

대표이사 양상우 두 손 모아 드림

 

※ 편집국 호남팀의 안관옥 기자가 알려온 박화강 선배의 근황을 덧붙입니다.

박화강 선배는 수년 전 고향인 전남 보성에 ‘불이학당’(不二學堂)이란 이름의 자그마한 학습과 명상의 공간을 마련해 기거하고 계십니다. 박 선배는 1988년 창간 때부터 창간위원과 초대 광주 지역기자로 한겨레에 몸담은 뒤 2004년 12월까지 재직했습니다. 퇴직 뒤 노무현 정부 시절에는 국립공원관리공단 이사장을 역임하며 국립공원 입장료를 폐지했고, 비무장지대를 남북평화공원으로 만들자고 제안했습니다.

박 선배는 7남매 중 맏형입니다. 여섯 동생 중 고 박기순 열사가 있습니다. 박기순 열사는 1978년 전남대 재학 중 광주 광천동 들불야학에서 일하다 불의의 사고로 숨진 ‘들불열사’입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이 박기순 열사와 5·18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들불야학 강사 출신)의 영혼결혼식에 바쳐진 노래입니다.

박 선배는 <전남매일> 기자로 일하던 1980년 5·18 민주화운동을 보도하려다 해직됐습니다. 관련 기사가 지면에 실리지 못하자, 박 선배는 바로 사표를 냈습니다.

“보았다. 사람이 개 끌리듯 끌려가 죽어가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그러나 신문에는 단 한 줄도 싣지 못했다. 이에 우리는 부끄러워 붓을 놓는다.”

동료기자들은 이 사표를 복사해 유인물로 만들어 광주 시민들에게 돌렸습니다. 당시 박 선배의 사표는 반려됐지만, 전두환 신군부는 끝내 박 선배를 해직시켰습니다.

 

이동구 에디터  dongg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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