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넘도록 신문을 거의 정독한다. 마흔을 넘길 때까지 사설을 깊이 읽었다. 마치 교실에 앉은 학생의 심정으로 말씀을 새겨 담았다. 사설이 마지막에 실리는 것은 결론에 이른다는 뜻이다. 나와 비슷한 공감의 일치에 누군지 모를, 사설을 쓴 주인공과 연애하는 기분까지 들었다. 쉰을 넘으면서 어느 시점부터 사설이 그저그런 뻔한 것이었다. 읽으나마나한 사족이 지겨워 점점 멀어졌다. 아마 세상물정을 알만큼 안다는 교만이었으리라. 예순을 막 넘긴 근래 들어 다시 사설이 사랑스러워졌다. 비린 세상의 맛을 씻어주는 따끈한 한 잔의 커피처럼 달달해졌다. 맛있는 사설의 글맛은 하루가 행복해진다.

오늘 사설 끝꼭지 '우선 순위 실종된 "대통령 외교"' 를 읽으며 마음이 평온해진다. (관련사설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editorial/687456.html)
강도가 격심한 인터넷 댓글들을 맘껏 읽을 수 있어 통쾌하지만 때로 단순무치의 지나친 편협함 때문에 불편하다. 오늘 이 사설처럼 왜인지에 대한 예를 들어 명확한 부당성을 지적하는 합리성 참 좋다. 이토록 침울한 현실에서 이렇게 명랑한 또는 맹랑한 글이 귀하다.

그리고 이완구를 좋아할 이유가 없지만 빗속에 있는 사람에게 우산을 내미는 건 사람의 당연한 행위다. 아무도 나서는 이 없었다는 후문에 마음이 무척 언짢다. 죄는 죄고 그래도 그러면 안 된다. 내가 대접 받고 싶으면 상대를 대접할 줄 알아야. 정부의 잘못된 처사가 분노스럽지만 그렇다고 빗속에 있는 이를 외면하는 것도 도리가 아니다. 잘못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건 감화다. 이제 곧 낙화가 될 입장이 되니 주위의 동료들이나 아래사람들까지 그런 대접을 하는 것 같아 더욱 씁쓰레하다. 그날 치 신문의 핵심인 사설도 이렇게 사람의 기본적 도리에 기반을 두는 감동을 지녔으면 싶다. 미운 놈 떡 하나의 효능을 모르다니. 할 건 하고 죽일 건 죽이고.

또 하나 간과할 수 없는 사퇴 문제. 대통령도 비켜서고 새누리당도 핑계삼는 이 일을 야당이 손수 설거지한다고 팔 걷어부치는 건 바보다. 거의 기정사실인 일에 마치 야당이 밀어내서 어쩔 수 없는 지경은 대통령과 새누리의 책임회피를 돕는 꼴이다. 손 안대고 코를 풀려는 저의가 빤한데 순진하게도 야당이 총리의 코를 움켜쥐다니. 거기다 별도의 4·19 행사도 싫다. 누군들 완벽히 금권정치의 덫, 그 죄에서 가볍지 않을 것이다. 싫어도 봐야할 현실이다. 소꿉놀이에서 삐친듯 소아병적인 외면 참 미성숙하다. 중도성향의 부동층을 겨냥하는 새누리의 책략에 우리 신문도 휘말리지 않기를.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 두고 보겠다는 말이 더 무서운 법이다.

이미진 주주통신원  lmijin047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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