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일본에서 기술을 배워왔다는 주장을 펴는 사람들이 있다.

과연 우리가 일본에서 기술을 배워 왔을까?

전혀 그렇지를 않다. 대다수의 국민들은 일본은 우리에게서 기술을 배워갔다고 알고 있다. 그런데도 일본의 기술이 우리에게 전해졌다고 말을 하는 사람 중에는 식자층이 더 많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누구보다 더 많은 공부를 하였으면서도.....,

일본의 기록에서도 그렇지 않다는 것을 다 알 수 있는데, 그러한 주장을 펴는 사람들은 친일파일까? 아니면 눈치를 보면서 아부하고 시키는 대로 하던 36년이 모자라서일까? 의문이 생긴다.

일본이 우리에게서 배워간 것들을 보면 기원전 27(왜(倭) 수인(垂仁) 3년)년에 신라 왕자 천일창(天日槍)이 일본에 사신으로 갈 때 수행을 하였던 도공 행기보살(行基菩薩)이 일본사람들에게 배감(坏坩 기와를 굽는 가마) 만드는 법을 가르쳤다고(임하필기11권 문헌지장편) 하였으며, 일본의 응신 천황 14년(283)에 궁월군(弓月君)이 백제의 120 현민(縣民)을 거느리고 일본으로 귀화하려고 하였으나 신라 사람들이 방해하여 모두 가라국(加羅國)에 머물러 있었고, 3년이 지나도록 가지 못했다.

120의 현민들은 모두가 기술을 가진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일본은 정병을 보내면서 침략을 해서라도 궁월(弓月)의 백성들을 데리고 오라고 하였다. 얼마나 목마르게 갈망을 했으면 침략을 해서라도 데려오라고 하였을까?

응신 천황 15년(284) 8월에는 백제의 왕명에 의해 아직기(阿直歧, 古事記에는 阿知吉師라고)가 일본을 갈 때 역경(易經), 효경(孝經), 논어(論語), 산해경(山海經)과 양마(良馬) 2필을 가져가게 하였다.

▲ 사진 : 한국관광공사

왕명으로 일본에 건너간 아직기는 일본 왕에게 말 2필을 선사한 후 말 기르는 일을 맡아보았다. 즉 말을 관리하는 일을 하였다. 일본 왕은 그가(아직기) 경서(經書)에 능통한 것을 보고 태자(太子:道稚郞子)의 스승으로 삼았다.

응신 천황이 처음으로 경전을 배우게 되면서 아직기에게 너희 나라에는 너보다 더 뛰어난 박사(博士)가 있는가? 라고 묻자 아직기는 왕인(王仁)이라는 사람이 저보다 더 뛰어난 수재라고 말을 하자, 황전별(荒田別)과 무별(巫別)을 백제에 파견하여 왕인을 불러오게 하였다. 다음 해 봄에 왕인이 천자문(千字文)을 가지고 갔다. 태자(토도아랑자, 菟道稚郞子)가 왕인을 스승으로 모시고(285년 2월) 여러 전적(典籍)을 익혀 통달하지 않은 것(이칭일본전,異稱日本傳)이 없었으며 응신 천황 15(284)년에 비로소 백제를 통하여 문자가 들어왔다고 일본서기는 기록하고 있다.

이렇듯 우리에게서 모든 것을 배워간 일본이 오늘에 와서는 우리를 앞섰다. 왜 그랬을까 깊이 생각해보아야 할 일이다. 누구의 잘잘못을 따지기에 앞서 우리가 왜 뒤졌는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정치판에 그 이유를 묻는다면 기업이 안일한 생각을 가지고 대처하지 못했다고 그 책임을 기업에 떠넘길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물론 기업에 책임이 전혀 없다고는 말할 수가 없지만, 기업들은 예나 지금이나 국민은 안중에도 없고 파벌싸움이 무엇보다 앞서있는 정치권의 눈치를 보느라 그리했을 것이다.

편집 : 김동호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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