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한반도 대전환 시대의 위기 : 한일 갈등에 관해

이재봉 주주통신원l승인2019.09.17l수정2019.09.17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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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한반도 대전환’에 관한 글을 썼었다. 2018년 4월 남북정상회담과 6월 북미정상회담을 계기로 73년짜리 분단체제가 무너지고, 70년짜리 북미 적대관계가 변하며, 65년짜리 한국전쟁 휴전 또는 정전체제가 허물어지고, 25년짜리 북핵문제가 풀리기 시작했다는 내용이었다.

겨우 반년이 흐른 2019년 9월 현재 한반도 안팎에 위기가 겹치고 있다. 미국과 중국 간의 무역전쟁이 격렬해지고, 북한과 미국의 협상이 진전되지 않고 있으며, 남한과 북한 관계는 후퇴하고, 한국과 일본 사이엔 갈등이 커지고 있는 것이다. 이 가운데 최근의 현상인 한일 갈등에 관해 살펴본다.

한일 갈등의 근원과 배경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국제관계의 속성과 미국의 대외정책 변화를 알아야 한다. 국제관계를 공부하는 데는 식상할 정도로 널리 쓰이는 말이 있다. “국제관계에서는 영원한 적도 없고 영원한 친구도 없다. 어제의 적이 오늘엔 친구가 되고, 오늘의 친구가 내일엔 적이 되는 게 국제관계의 현실이다”는 말이다.

1941년 일본이 미국을 침공해 ‘태평양전쟁’이 시작됐다. 미국은 일본과 전쟁을 벌이면서 소련에게 지속적으로 도움을 요청했다. 소련이 미국의 요청을 받아들여 1945년 8월 일본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곧 일본이 항복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다. 미국은 일본을 통째로 점령했고 한반도를 소련과 함께 나누어 점령했다.

소련이 동유럽에서 영향력을 확대하자 미국은 서유럽을 지키기 위해 반공정책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트루먼 독트린 (Truman Doctrine)과 마샬 플랜 (Marshall Plan)이다. 나아가 유럽에서는 북대서양조약기구 (NATO)를 만들고 아시아에서는 일본을 동맹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일본과 싸울 때는 소련을 끌어들여 친구가 되고, 일본을 무찌른 뒤 소련이 힘을 키우자 소련을 겨냥해 일본을 친구로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한일협정의 배경과 과정

1950년 2월 소련과 중국이 동맹을 맺고,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전면전으로 치닫자, 미국은 전쟁에 뛰어들어 일본의 도움을 받으며 중국과 싸웠다. 이때부터 자본주의 미국+일본+남한이 한 편이 되고, 사회주의 소련+중국+북한이 다른 한 편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국+미국+일본의 삼각공조를 구축하는 데는 걸림돌이 있었다. 일본이 1910년부터 1945년까지 35년 동안 조선을 식민통치한 데 따른 한국인들의 반일감정이었다. 미국은 한국전쟁 중이던 1951년 일본과 안보조약을 맺고 한국을 끌어들이기 위해 한일협상을 주선하고 개입하며 압력을 행사했지만 이승만의 완고한 반일정책에 막혔다.

이승만이 1960년 사월혁명으로 쫓겨나고 일본군 출신 박정희가 1961년 5.16쿠데타로 정권을 잡자, 미국은 1962년부터 한일협정을 “미국정부의 최고 관심사” 또는 “가장 급선무”로 삼고 한국과 일본을 거세게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한국은 협상에 적극 응했지만, 야당과 대학생들의 저항과 반발이 몹시 컸다. 박정희 정부는 1964년 6월 3일 서울에 계엄령을 선포해 일체의 집회와 시위를 금지하고 모든 대학의 문을 닫아버렸다. ‘6.3 사태’다.

이런 과정을 통해 1965년 타결된 한일협정은 야당과 대학생들의 주장대로 몹시 “민족 반역적이고 굴욕적이며 졸속적”인 것이었다. 첫째, 일본이 35년간의 식민통치에 대한 사과나 배상을 전혀 하지 않았다. 한국에 유상과 무상채권을 포함해 모두 8억 달러를 건넸는데, 식민통치에 대한 배상이나 보상이 아니라 ‘독립 축하’ 및 ‘경제 협력’ 명목이었다. 아직도 일본의 식민통치가 한국의 발전에 도움이 됐다고 주장하는 한국의 ‘토착왜구’ 정치인, 언론인, 교수들이 적지 않은데, 당시 일본 정치인들이야 오죽했겠는가.

둘째, 독도 영유권, 징용자, 위안부, 원폭 피해자, 약탈 문화재 등에 관한 문제를 모두 덮어버렸다. 예를 들어, 독도 문제로 협상이 진전되지 않자 한국의 협상대표였던 박정희의 조카사위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은 독도를 폭파해버리자는 망언을 내놓기도 했다. 독도 문제가 아직까지 해결되지 않고, 징용자와 위안부 문제 등이 최근에야 불거지게 된 배경이다.

한일 위안부 협정과 군사정보 보호협정의 배경

그로부터 꼭 50년이 흐른 2015년 박정희의 딸 박근혜 정부가 일본과 “최종적이고 불가역적” 위안부 협정을 맺었다. 일본이 10억엔 (약 100억원)을 건네기로 했는데, 1965년 그랬던 것처럼 배상이나 보상 명목이 아니라 ‘인도적 지원’ 명목이었다. 나중에 문제가 될까봐 위안부 문제를 마지막으로 되돌릴 수 없이 해결한다고 선언하고, 앞으로 유엔이나 국제사회에서 이를 빌미로 비난이나 비판을 자제하자고 합의했다.

반세기가 흐른 뒤에 이렇게 또다시 “민족 반역적이고 굴욕적이며 졸속적”인 한일협정이 되풀이된 것은 여전히 미국의 압력 때문이었다. 급속도로 떠오르는 중국을 견제하고 봉쇄하기 위해서다.

중국이 1978년부터 개혁개방을 시작하며 무서운 속도로 성장하자 미국은 1990년대부터 일본과의 동맹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1996년 일본과 안보공동선언을 발표하고, 1997년 일본과 방위협력지침을 개정했다. 일본 자위대가 주변 해역까지 나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2000년대 중반부터 일본의 재무장을 막고 있는 ‘평화헌법’을 수정해 군대를 기잘 수 있는 ‘정상국가’가 되도록 촉구했다. 일본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안보리) 상임이사국으로 진출하도록 지원했다. 2015년엔 일본과 방위협력지침을 다시 개정하고, 2016년엔 일본 안보법제를 개정하도록 이끌었다. 일본 자위대가 해외로 진출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에 맞서 중국이 러시아와 손잡고 대규모 합동군사훈련을 벌이는 등 군사협력을 강화하자, 미국은 다시 한국+미국+일본의 삼각공조를 강화하기 위해 한국에 압력을 행사했다. 독도 문제나 위안부 문제 등 껄끄러운 문제를 털어버리고 일본과 협력을 강화해 중국을 견제하고 봉쇄하는 데 적극 동참하라는 것이었다.

이런 배경과 과정에서 추진된 것이 크게 세 가지다. 첫째, 앞에서 얘기한대로 2015년 한국과 일본 사이에 “최종적이고 불가역적” 위안부 협정이 맺어졌다. 둘째, 2016년 미국과 한국이 고고도미사일방어망 (THAAD) 배치를 발표했다. 겉으로는 북한을 겨냥한다고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중국을 봉쇄하기 위한 것이다. 셋째, 한국과 일본 사이에 요즘 흔히 ‘지소미아 (GSOMIA)’라 불리는 군사정보 보호협정이 체결되었다. 한국과 미국 사이에 그리고 미국과 일본 사이에 군사정보가 자유롭게 교류되고 있어서 미국에 굳이 필요한 게 아니지만, 한국과 일본이 더 가까워지도록 한 조치였다. 거듭 강조하건대 이 모두 중국을 견제하고 봉쇄하기 위한 미국의 전략에 따른 것이었다.

그런데 2017년 들어선 문재인 정부가 이른바 ‘촛불 민심’을 바탕으로 2018년 위안부 협정을 사실상 파기했다. “위안부 피해자들이 인정하고 국민이 동의할 수 있는 수준의 합의”를 이끌어내는 것은 그의 대선 공약이었다. 한일군사정보 보호협정의 효용성을 검토하고 연장 여부를 결정하겠다는 것도 2017년 대선공약에 포함된 것이었다. 이와 아울러 한국 대법원은 2018년 일제 징용피해자에 대한 배상을 판결했다.

아베의 보복에 대한 창의적 대응과 미중 패권경쟁에 대한 건설적 대응을

이에 아베 일본 총리가 2019년 6월 오사카에서 열린 G20 정상회의에서 문재인 대통령과만 정상회담을 하지 않는 등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출했다. 7월부터 문재인 정부에 대한 비난과 함께 한국에 대한 경제보복을 시작했다.

여기서 우리는 바림직한 대응을 위해 아베가 도발하는 배경과 이유를 더 크고 넓게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베의 불만과 분노가 섞인 도발엔 남한에 대한 경계와 증오뿐만 아니라 중국에게 추월당한 충격과 좌절, 그리고 북한 및 한반도 평화 문제에서 소외당하는 불안과 초조함이 곁들여져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일본은 1970년대부터 독일을 제치고 세계 제2의 경제대국 지위를 지켜오다 2010년 중국에 추월당했다. 2등자리를 중국에 내주고 3등으로 밀린 것이다. 일본은 1894-95년 한반도에서 중국과 전쟁을 벌여 물리친 데 이어 1931년부터 중국 대륙을 침략하고 점령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짓밟히고 쪼개졌던 중국에 1949년 사회주의 정부가 들어서서 1964년 핵무기를 개발했으며 1971년엔 유엔에 가입해 대만을 밀어내고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까지 되었다. 그래도 경제적으로는 형편없던 후진국이 1978년부터 개혁개방으로 무려 30-40년 동안 지속적으로 연평균 10% 안팎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하며 2010년 국내총생산 (GDP)과 무역 규모에서 일본을 앞질러버린 것이다. 일본은 중국이 급성장하면 동북아 안정과 세계 평화에 위협이 될 것이라는 ‘중국 위협론’을 2000년대 초부터 제기하며 몸부림쳤지만 말이다. 핵무기도 갖지 못하고 안보리 상임이사국의 꿈도 실현시키지 못해 군사력으로나 외교력으로 중국에 밀리던 일본이 경제력에서도 뒤지게 되면서 얼마나 크게 충격 받고 좌절했을지 짐작해보기 바란다.

나아가 2018년 4월 남북정상회담으로 시작된 한반도 대전환 시대에 남북한 및 주변 4강대국 중에서 일본만 소외되었다. 북한을 중심으로 다양하고 활발하게 정상회담이 열리면서 김정은은 문재인과 3회, 트럼프와 3회, 시진핑과 4회, 푸틴과 1회 만났다. 그러나 아베와는 단 한 번도 만나지 않았다. 아베의 요구에도 매몰차게 거절한 것이다. 남북관계가 진전되면 한반도가 지리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가까운 중국 대륙과 연결될 텐데 그게 실현되면 섬나라 일본은 더욱 고립될 것이다. 아베가 남북관계 진전을 방해하는 이유 아니겠는가.

요약하자면, 중국을 견제하고 봉쇄하기 위한 한국+미국+일본의 삼각공조 강화를 추진해온 미국의 전략에 따라 박근혜 정부는 일본과 “민족 반역적이고 굴욕적이며 졸속적”일뿐만 아니라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인 위안부 협정 및 군사정보 보호협정을 맺었다. 문재인 정부가 이를 바로잡으려 하자 아베가 도발했는데, 여기엔 일본이 이미 중국에 추월당한 충격과 앞으로 통일 한반도에도 추격당할지 모를 위기감도 배어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일본제품 불매운동을 비롯한 창의적 대응방안뿐만 아니라 군사동맹 미국과 제1무역상대 중국 간의 무역전쟁 및 패권경쟁에 대한 건설적 대응방안도 함께 찾는 게 바람직하지 않을까.

[편집자주] 이재봉 주주통신원은 현재 원광대학교 정치외교학/평화학 교수다. 지난 7월 9일 '한겨레통일문화재단'이 주최하는 '한겨레통일문화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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