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이야기 80] 등산장비 판매점 王子-2

김동호 편집위원l승인2019.10.28l수정2019.11.06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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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으로 돌아온 후에는 우선 먹고 살아야했습니다. 단순한 저의 머리로 생각할 수 있는 가장 기발한 아이디어는 ‘식당을 차리면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된다’였지요. 그래서 가족들과 교대 부근에 칼국수 음식점을 차렸는데 몇 달 했더니 매달 임대료 내기가 빠듯했습니다.

당시에 깨달았습니다. "사람마다 얼굴 다르고 생각 다르듯이 아무거나 열심히 한다고 다 잘되는 거 아니구나!" 음식점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뭔가를 만들어 수익을 창출할 능력도 없다는 걸 알았지요. 나 스스로 제조업을 할 그릇이 아니고, 영업은 전혀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하지만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일은 잘 할 수 있을 거 같았습니다. 그동안 만났던 사람들은 나이를 불문하고 제 말을 믿어주었으니까요.

다시 남대문 아리랑산맥에 찾아가서 안면이 있는 판매원에게 부탁했습니다. 등산장비제조업체 중에서 수출하고자 하는 업체가 있으면 소개해달라고 했지요. 얼마 지나지 않아 한 판매원이 직접 저를 데리고 부천의 코펠공장으로 가서 사장에게 소개해주었습니다.

▲ 시장에서 판매되고 있는 코펠

제가 무역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제 인생에 큰 도움을 준 한 선배가 무역업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대학교 2년 선배라는 사실 외엔 혈연이나 기타 연고가 없는 분이었습니다. 어떻게 알았는지 어렵던 제게 경제적인 도움도 주었고, 대만에 공부하러 가겠다고 인사했을 때는 쪽지를 건네며 대만에 가면 도움을 받으라고 친형 전화번호를 주었던 분.

코펠공장으로 출근하기 전에 무역회사를 운영하던 그분 회사로 며칠 나가 무역 실무를 배웠습니다. 무역 관련 책자를 제게 주고, 서류들도 복사해 주었습니다. 더 많은 도움을 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하며 안쓰럽게 바라보던 눈길이 선연하네요.

무뚝뚝하고 전혀 살갑지 않은 부산 특유의 기질. 결혼 후 뉴질랜드로 투자 이민을 떠났던 그 선배! 뒤에서 말없이 도움을 주었던 제 마음속 수호천사. 수많은 선한 영령들이 그분을 더 크게 비호해주길 비는 마음으로 실명은 공개하지 않겠습니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이 열리든 해, 1월부터 부천 코펠공장으로 출근했습니다. 생산하는 코펠을 수출하고 이윤을 나누기로 했습니다. 당시 옆에 있던 사장 부인은 이윤이 나면 반씩 나누자고 했지만 믿지는 않았습니다. 저는 서로 부담스러우니깐 실적이 나면 그때 정하자는 생각이었지요.

월급을 안 받고 별도 무역부서로 분리해서 회사 간부나 상무도 제게 간섭하지 않는 조건으로 일을 했습니다. 위에 언급한 선배의 도움으로 광고회사 좋은 장비로 저렴하게 촬영하여 카탈로그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는 대만 王子의 李建雄에게 발송했습니다.

고맙게도 곧바로 약 5,000불 어치의 오더를 주었습니다. 사장이 제시한 수출 가격은 제가 아는 국내 도매가격보다 비쌌고 현금이기에 이윤이 많이 남았습니다. 첫 수출 후 약속과 달리 공장직원들과 회사 이름으로 튀김 닭 시켜 먹으라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저는 그때나 지금이나 닭은 잘 안 먹습니다.

그동안 카탈로그도 찍고 ASIAN SOURCES에 광고비도 들어서 이윤을 나누자고 내 입으로 말하기는 껄끄러웠습니다. 첫 수출이 그렇게 물꼬를 트자 그해 봄에 일본으로 두 번 더 수출했습니다. 약 2,000만 원과 3,000만 원 어치의 오더였지요.

당시에는 어음거래가 유행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중소 업체들은 매일 어음결제로 곤욕을 치르더군요. 이렇게 수출하고 현금이 들어오면 한동안 은행 독촉에서 벗어난다고 사장 부인은 엄청나게 좋아했지만, 저와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 이 공장의 과장 월급이 30만 원 정도였습니다. 제가 사장 입장에서 생각해보니, 사장은 공장을 운영하며 물건을 투자하고, 저는 개인의 능력과 노력을 투자해서 이윤을 똑같이 나눈다면 이 또한 불평등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사장과 다시 이야기를 나누고 과장급 정도보다 조금 더 월급을 받기로 했습니다. 아마 7월부터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지나간 반년 동안의 경험으로 이 회사가 돈을 벌고 잘 나간다고 나에게 어떤 보람이나 이익이 생기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았습니다. 사장이 그동안 한 약속들이 지켜지는 것이 없었습니다.

말하기도 치사하지만, 자기가 타던 차를 새 차로 바꾸면 무역부가 우리 회사 간판이니까 나에게 물려주겠다고 약속하더니, 자기 동생에게 주고 저는 여전히 쪼그만 르망 몰고 다녀야 했습니다.

저는 사장에게 후임을 뽑으라고 말했습니다. 무역업무가 자리를 잡을 때까지 1년은 채우겠지만 연말까지만 일하겠다고 통보했습니다.

王子의 李建雄에게 한화 500여만 원 어치의 물건을 수출하여 대만 등산장비 시장에 한국물건이 풀리고, 그것이 제 사업의 발단이 됩니다.

편집 : 김태평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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