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똥개와 널 깔기

▲ 그림1 똥개

그림1 속 ㄴ자 모양 부재가 똥개다. 마땅한 이름이 없어 그냥 목수들이 쓰는 용어를 그대로 썼다. 도모지리, 선미지리라고도 한다. 부자리 삼이 하반 밖으로 나가 있고 덤불이 밖으로 나가 있으므로 이를 보호하기 위해 똥개를 사용한다. 세월이 지나면서 문양을 그려 넣는 등 똥개에 미(美)적인 것을 가미하기는 현상도 나타났다.

다만 경주용 배에는 똥개를 붙이지 않는다. 똥개와 하반 사이에 생기는 공간에 물이 차서 배의 속도가 느려지기 때문이다. 또 배 밑과 부자리 삼에 초를 칠해 물의 저항을 최소화하기도 했다.

다음엔 널을 깔아야 한다. 널은 통상적으로 고물 쪽부터 이물 쪽으로 깔아간다. 고물 쪽의 맨 뒤 지점에서 시작해 이물 쪽으로 맨 마지막 간답까지만 중간에 귀틀을 놓고 그 위에 널을 깐다. 이렇게 하면 자연스럽게 널이 두 줄로 깔린다. 만약 이와 달리 긴 널을 하나로 깔면 배 안에 들어오는 물을 퍼낼 때 불편하다. 사람이 위에 있을 때 널이 휘어질 수 있어 위험하기도 하다. 다만 다섯 번째 간답에서 이물 쪽으로는 귀틀 없이 장(長)널을 쓴다. 이곳은 선폭이 좁기 때문에 널을 굳이 두 개로 나눠 깔아야 할 필요가 없다.

이제 이물비우 맨 위 끝 부분 처리 문제가 남아 있다. 17세기 말까지만 해도 이곳을 따로 처리하지 않고 그대로 배를 타고 다녔다. 그 이후엔 원형으로 만들어 태극 문양을 그리기도 했다. 1930년대에 들어오면서 용도에 따라서 완전히 잘라버리기도 했다. 김이나 미역, 멸치잡이 배들은 그곳에 줄과 그물 등이 걸려 작업에 지장을 주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배를 만드는 전 과정이 끝이 났다. 이 밖에도 말이나 글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도 있다. 그것들은 실제로 일을 하면서 터득해야 한다.

18) 노의 크기

▲ 그림2 치
▲ 그림3 노의 크기
▲ 그림4 한 돛 배

배는 다 만들어졌다. 다 만들어진 배를 움직이려면 배의 추진기구인 노가 있어야 한다. 앞서 우리가 만드는 배의 전체 길이가 약 6m 정도임을 밝힌 바 있다. 이 배의 치의 크기는 그림2에서 보는 것과 같이 4자 7치 정도고, 노의 크기는 그림3을 참고하면 된다. 다만 그림엔 노 상착의 길이가 6자로 표기돼 있으나 배의 맨 뒤쪽에 위치할 고부랭이와 노손의 크기를 감안하면 5자가 될 수도 있다.

그림4는 70년대까지 고기잡이를 했던 배를 모형으로 만든 것이다. 돛이 있는 배는 반드시 치가 있어야 한다. 바람의 세기가 조금만 세도 노만 갖고선 방향을 조종하기 힘들다. 치는 자동차의 핸들과 같아서 배의 방향을 잡아주는 역할을 한다. 

19) 못

▲ 그림5 양구지(兩耳釘)
▲ 그림6 외구지(曲釘)
▲ 그림7 조선 시대의 못
▲ 그림8 현재 사용 중인 못

배를 만드는 데 없어서는 안 될 게 못이다. 그런데 이 못을 두고 말이 많다. 하나씩 풀어보자.

그림5와 그림6은 각각 양구지와 외구지라고 하는 못을 나타낸다. 그림8은 현재 사용하고 있는 못을 보여준다. 그림8의 1, 2, 3 못은 각기 크기가 다른 외구지 못이다. 같은 그림의 4, 5 못은 양구지 못으로, 그림7의 조선 시대 못과 생김새가 거의 비슷하다. 이 못을 전라도 지방에서는 구지(傴扺) 못이라 하고, 경상도 지방에서는 누이 못이라고 하는데, 어쩌면 경상도 지방에서 쓰고 있는 누이란 말이 더 맞는지도 모르겠다. 눕혀서 옆으로 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인 것으로 보인다. 양구지 못은 부자리 삼과 밑을 붙일 때나 옆 삼과 부자리 삼을 붙일 때 사용한다. 외구지 못은 판과 판을 붙일 때 쓴다.

조선 시대 못을 보면 현재 사용하고 있는 구지 못과 모양이 비슷하다. 외구지 못과 같은 곡정(曲釘)이다. 곡정(曲釘)은 무두정(無頭釘) 형태에서 머리 부분을 휘거나 꺾어 못 머리가 되게 한 것으로, 못 전체가 휘어지지 않고 머리 부분만 직각으로 꺾어져 있다. 곡정은 철(鐵) 재료를 이용해 만드는 못으로 무두철정(無頭鐵釘) 다음으로 제작공정이 단순하다. 쓰임새는 무두철정이나 곡정 모두 비슷하다. 판재를 붙일 때 많이 쓰고 가구 궤(櫃)에 주로 사용된다. 다만 곡정이 무두정에 비해 조여 주는 힘이 더 강하다.

표민대화의 못에 관한 기록을 보면 양이정(兩耳釘)이란 말이 나온다. 양이란 귀가 두 개란 뜻이므로 지금의 양구지 못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우리가 외구지라고 부르는 것은 외이정(外耳釘) 또는 곡정(曲釘)이 본래의 이름이란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또한 이 못을 우리가 일본보다 먼저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신라 지증왕(智證王) 6년(505), 신라의 교역품에 철정(鐵鋌, 덩이 쇠)이 포함돼 있다. 이렇게 철을 수출했다면 철을 이용한 여러 형태의 못을 만들어 썼을 것이다. 입당구법순례행기를 봐도 ‘평철(平鐵)이 떨어져 나갔다’는 기록이 있다. 평철은 철판을 의미한다. 당시(838)에 철판을 만들어 사용했다면 이를 붙이기 위한 철못도 있었을 것이다.

국역왕조실록을 보면, 세종12년 시기에 이런 기록이 있다.

배를 만드는 데 여러 나라의 배 만드는 방법에 따라서 급하게 만들지 말고, 쇠못으로 꾸며서 단단하고 정밀하며, 가볍고 빠르게 하고, 그 위의 구조도 여러 나라의 배와 같이 가운데는 높고 밖은 낮게 해, 물이 배 가로(뱃전으로) 흘러 내려가게 해 배 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해, 다니기에 편리하게 하고, 일본을 왕래하는 배들은 모두 쇠못을 쓰게 했다.

이러한 기록으로 볼 때 이 시기에 못을 쓰는 게 보편화됐던 것 같다.

국역왕조실록에 따르면, 성종24년에 대마도주 종정국(宗貞國)이 보낸 서계(書契)에 이런 내용이 있었다.

신의 증조부 이후로 털끝만한 것이라도 성은(聖恩)을 입지 않는 것이 없었는데, 또 부탁을 하니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삼가 바라건데 변방관리에게 명하시어 철(鐵)과 목판(木板)을 내려주게 하소서. 철은 본래 저희 섬에서는 생산되지 않는 것이니, 못(釘)과 대패(鐋)도 보내주셨으면 합니다.

이렇게 철을 얻어가기 위해 연(練) 2필, 검은 말(馬) 2필을 진상했던 일본이니 우리나라보다 먼저 철을 이용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조선 시대에 못을 사용했고 철물을 관리하는 부서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도 있다. 배를 제조하는 철물(鐵物)을 관찰사가 출납했고, 해도(海道)의 철물은 원래 수군(水軍)이 취련(吹鍊)하게 돼 있으니 절제사에게 저축해뒀다가 지출케 했다는 기록이다. 이처럼 조선 시대에는 규정에 따라 선박이 체계적으로 관리되기도 했다. 선이 망실(亡失)되거나 파손됐을 때 그 값을 징수하는 규정이 만들어졌는데, 대선, 중선, 소선, 단조선(單造船), 복조선(複造船) 등 배의 크기나 조선 방법에 따라 징수하는 값이 달랐다.

20) 물 막음

배가 바다를 항해하다 보면 파도에 의해 틈새가 생기기 마련이다. 따라서 바다에 나가기 전에 배에 박을 쳐야 한다. 박을 치는 부분은 △밑과 부자리 삼을 붙이는 곳 △부자리 삼과 옆 삼을 붙이는 곳 △이물비우와 연결된 곳 △판재와 판재 사이 △하반과 연결된 곳 등이다. 지금은 박을 칠 때 삼나무 껍질로 만든 댓거울을 볼트와 구지 못의 머리에 감는 방식을 사용한다.

과거에는 댓거울이 아닌 다른 재료를 사용하기도 했다. 동문선 제85권에는 ‘항해를 할 때 반드시 의여(衣袽, 걸레)를 준비하는 건 물이 새는 것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라는 기록이 있다. 1910년대 어선조사보고서를 보면, △나무껍질을 표백한 것 △대를 깎은 것 △대팻밥 △면 △일본식 뱃밥(곤(권)기, 卷肌, 마끼하다) 등을 사용했다는 얘기도 있다.

 

※사진 출전: 瀨戶內の漁船.廻船と船大工調査報告/ 조선 시대의 못

마광남 주주통신원  wd341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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