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속에서 웃는 오뚜기일요학교를 찾아

오뚜기는 어른을 위한 인생학교이다. 

오뚜기일요학교는 일요일만 운영하는 학교로 1981년 1월 18일 종로 2가의 종각뒤에 위치한 <시사영어학원>에서 신문배달소년을 대상으로 개교를 한 39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학교이다. 

81년부터 85년까지 학생으로 초, 중, 고 검정고시를 패스하고, 87년에 대학에 들어간 후 군대 제대후 89년부터 94년까지 교사로 활동한 오뚜기인 박상규는 가난과 역경을 딛고 일어선 오뚜기의 산증인이다. 

오뚜기학교에서 매년 2-3명 방송통신대학에 입학하는데, 박상규는 입학하는 후배 학생들에게 입학 장학금을 5년간 지급했다.

이 장학금은 학생들에게 심적으로 큰 도움이 되고 그들이 방통대를 졸업할 수 있게하는 동기부여가 되었다. 

방통대를 졸업한 학생들이 지금도 가끔 연락해서 덕분에 졸업할 수 있었다는 감사의 표현을 했다고 박상규는 말한다.

그의 아내인 안미옥도 오뚜기에서 만난 오뚜기 커플이다. 그들에게 아들 셋이 있는바, 오뚜기학교에서는 오뚜기의 산증인으로 통한다.

박상규는 지금 목동에서 조그만 영어학원을 운영하고 있고 지금도 오뚜기 행사 때면 후원금과 기타 도움을 주는 춘화현상을 거친 오뚜기 중의 오뚜기이다. 

" '춘화현상'이란 말이 있습니다. 추운 겨울이 없으면 식물은 봄에 정상적인 성장을 못합니다. 향기는 더더욱 없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오뚜기 일요학교는 학생으로서 정신적으로 성장하는 곳일 뿐만 아니라, 교사로서 그 책임과 행복에 대해 배울 수 있는 공간입니다." 라고  오뚜기일요학교 김가은 교사는 말한다.

"학생분들은 종종 선생님께 감사하다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오히려 저는 학생분들께 감사합니다. 다양한 삶을 가진 학생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으며, 제가 체험하지 못하고 겪지 못했던 인생을 배우기 때문입니다."

또한 교사로서 '책임'이라는 울타리 속에서 수업을 이끌어 나가고 학교 행사를 성공시켜나가는 일련의 즐거움들이 인간 김가은의 삶을 성장시켰다고 오뚜기일요학교의 김가은 교사는 고백한다.

김가은 교사는 오뚜기일요학교 수학교사이자  2년차 직장인이다. 

▲ 1981년 1월 18일 문을 연 오뚜기일요학교는 정확히 39년이 되는 학교이다. 당시에는 전두환이 이끄는 군사정권시절이라 대학생 교사들 중에서 문제의 시대에 문제가 없는 학생교사들이 문제인데 오히려 문제를 모르는 군사정권이 문제임을 알게된다.

<칠전팔기 오뚜기일요학교는 일요야학으로 배움의 기회를 놓친 분들과 "학교"라는 추억을 함께 만듭니다>고 오뚜기학교가 만드는 교지 <공감 제12호>에 머릿말로 표기하고 있다. 

전철의 광고는 배움의 기회를 놓친 분들을 위해 학생과  교사로서 봉사하실 분들을 모집한다. 

이 광고를 본 김가은 교사는 오뚜기학교 교사에 지원을 했다. 그는 대학시절 교사의 꿈을 안고 영어과 교직이수를 했고 고등학교 교육실습도 나갔다.

그리고 지금 이곳 오뚜기일요학교에서 보람찬 나날을 보내는 교사를 하고 있다.

▲ 전철에서 오뚜기일요학교의 광고를 만날 수 있다. 사람들은 아직도 야학이 있느냐는 의아심을 갖기도 하지만 오뚜기일요학교는 광고에서처럼 풍요 속에서 가난을 불만하지 않고 오히려 이 가난때문에 웃는 오뚜기들이다. 이들은 말한다. 풍요는 아편이라고!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절망의 날을 참고 견디면 머지않아 즐거운 날이 오리라. 마음은 미래에 살고,  모든 것은 일순간에 지나간다. 그리고 지나간 것은 그리워지는 것이다. (알렉산드르 푸시킨)

학생 박경남(59)은 일요일 오뚜기일요학교에서 고등학교 과정의 대검과정 공부를 하고 있다.

그는 학교에서 받은 숙제를 집에 와서 풀면서 어떻게 칸을 채워야 할지 막막하여 학교를 다녀야 하는가에 대한 갈등의 갈림길을 겪기도 하였다.

▲ 오뚜기일요학교는 수업 전에 교가를 부른다. 나운영 교수가 작곡을 해주었고 정해강 선생님이 편곡을 하였으며, 가사는 평화통일신문 발행인이자 오뚜기 일요학교 창립자인 고순계가 썼다.

박경남 학생은 오뚜기학교 교가의 가사와 푸시킨의 <삶>을 음미하면서 "하면 된다"는 신념을 갖고 오늘도 웃으면서 오뚜기일요학교에 간다.

그러면서 오뚜기 학교가 자신의 인생의 방향과 지표를 제시해 준다고 그는 말했다.

그는 어려서 부모와 이별하고 혼자 세상살이를 하면서 자신만의 삶의 의미를 알아가며 오뚜기와 동행을 하고 있는데, 고검에 이어 대검을 공부하고 있다.

"황혼에 접어든 이 나이일지라도 못배운 한과 목마름 속에서 오뚜기 학교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오뚜기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오뚜기 학교에서 <내 생애에 가장 잘한 일>을 생각하라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내 생애에 가장 잘한 일은 무엇일까 생각하니, 그건 오뚜기를 만난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라고 박경남 학생은 젊은 선생님들 앞에서 말하며 눈물을 흘렸다.

 박경남 학생은 친구들이 일요일이면 놀러다닌다는 말에 한 때는 흔들리기도 하였지만, 이제는 안정적으로 결석 없이 일요일에는 항시 오뚜기학교로 향한다. 그는 금년에 대검시험에 당당히 도전하는 것을 목표로 정했다.

▲ "청춘을 담보하고"로 1992년도에 오뚜기에서 대검을 합격하고 지금은 현대제철의 협력회사에 근무중인 이성두 오뚜기이다.(우측에서 첫번째. 좌측의 청년들은 박상규 오뚜기의 아들 삼형제로 박인서 박민서 박윤서이고 가운데 두 꼬마는 이성두의 조카들이다. 박상규 부인 안미옥이 사진을 찍었다.)

"웃으며 슬기롭게 오늘을 달린다. 청춘을 담보하고 불굴의 의지로 하면 된다. 우리는 내일에 산다. 그이름 장하다 칠전팔기 오뚜기" 라는 오뚜기 교가가 있다. 

그는 이러한 오뚜기 정신을 마음 속에 새기면서, 역경속에서도 참된 웃음이 만들어질 수있다고 말하는 오뚜기학교 졸업생이 있다.

"진정한 성공은 단순한 돈이 아니라 가난과 역경의 어려움 속에서 나오는 강한 정신이라고 확신합니다. 친구들이 일요일 놀러 다닌다는 전화에도 흔들림 없이 오뚜기를 다니며, 미래에 만들어갈 성공을 생각만 해도 행복해집니다." 라고.

이성두 오뚜기 학생은 91년도에 오뚜기학교에서 대검과정을 합격하고 충청남도 당진에 있는 현대제철의 협력회사에서 근무중이다. 

그는 45세의 나이로 지금 총각이다.  "청춘을 담보하고"의 오뚜기학교 가사처럼 청춘을 전당포에 맡겨두고 오직 공부에 전념하는 오뚜기들이 안쓰러워 고순계씨는 청춘을 담보하는 문제를 고민중이다.

아니면 오뚜기 출신들 중에서 결혼상담소를 차리는 사람이 나타나기를 고순계씨는 기다리고 있다. 

대검과정을 공부하고 있는 이나경 학생은 교가 가사에 나오는 <청춘을 담보하고>글귀를 액자로 담아 책상위에 올려놓고 공부하면,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힘이 나온다고 했다. 

▲ 오뚜기학교의 프로그램 진행중이다. 오뚜기일요학교는 교가를 부르면서 그 첫 수업은 시작된다. "백두산 정기받은 오뚜기후예들 웃으며..."

"하늘은 불볓 기상은 연일 저기압, 사는 재미 감동하나 없더니 참 희한한 것 다 있네. 딴딴한 콘크리트 비집는 그 고집, 잡초 한그루, 눈치로 연명하는 인간들 보라는 듯 우뚝 서있네 우뚝 서있네 칠전팔기 오뚜기"는 이나경 학생의 자작시이다.

고검의 유금선 학생은 지난 해에 오뚜기 학교 선생님들의 격려 속에 중검, 고검, 대검 검정고시에 합격하는 쾌거를 이룩하였다.

그는 이것이 너무도 보람있고 자랑스럽다고 말하면서 이 세상에서 자신보다 더 행복한 사람이 있으면 나와보라고 친구들에게 말했다고 한다.

유금선 학생은 봉사활동을 하는 선생님들처럼 자신도 오뚜기학교에서 교사로서 가르치는 보람을 펼칠 것이라고 다짐했다.

최정숙 학생은 친구들이 놀러 다닌다는 자랑들이  하나도 안 부럽다면서 일요일 오뚜기학교에 나오는 것 자체가 행복하다고 말했다. 

오뚜기일요학교를 거쳐나간 학생이나 교사들은 오뚜기 졸업생 우건님을 기억하고 있다. 그는 어린 시절 개인사정으로 학교를 다니지 못했고 성인이 되어 오뚜기를 만나게 되었다.

일요일에만 가는 학교! 바로 이것이 그에게 딱 맞는 학교여서 그는 오뚜기를 다니면서 2005년 부터 중검, 고검 그리고 대검에 합격하고 방통대도 다녔다. 

그는 지금 오뚜기 반지를 선물하는 오뚜기인으로서 나름대로의 보람을 찾고 있다. 디자인도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여 매우 세련되고 고급지게 만들어져 오뚜기 출신들이 자랑스레 끼는 오뚜기 링을 직접 만들어 선물하고 있다.

우건 졸업생은 오뚜기 행사에 찾아오는 날에는 고향같은 편안함을 느낀다고 한다. 오뚜기야말로 지식과 지혜에 대한 갈증을 해소시켜 준 곳이고 최고의 인연을 맺어준 소중한 곳이라고 자부심 갖고 말한다.  

오뚜기학교에 오면 참 좋다는 우건님을 오뚜기학생이나 교사들은 잊을 수 없다고 고려대학교 사범대학교를 졸업한 뒤 오뚜기와 인연을 갖게 된 영어교사 이가영 선생은 자랑한다.

▲ 오뚜기학교의 안내서는 학생모집 교사모집 후원안내로 되어있다. 어느 독지가는 흥청망청의 돈많은 사람들의 자녀들의 정신전력학교로 오뚜기의 평일 프로그램을 통해서 풍요속에 멍들어가는 자녀들을 올바르게 키우는 오뚜기학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오뚜기일요학교는 일년에 한 번 일일호프를 전철 3호선 안국역 2번출구 맞은편 '오크힐'에서 진행한다. 대부분의 옛 오뚜기 구교사와 졸업생들은 현 오뚜기의 초대를 반갑게 받아들이고 기꺼이 많은 이들이 참석한다.

유금선 학생은 오뚜기학교의 학생회장인데 학생회장답게 많은 친구들을 초대하였다. 능력이 직책을 만들 수도 있지만 직책이 능력을 만든다는 유 학생회장은 남다른 실력을 발휘하여 일일호프가 성황리에 치뤄지도록 애를 많이 썼다. 

"언젠가는 오뚜기를 졸업하여 나의 아들, 딸을 데리고 일일호프에 오게 하고 싶다"하는 학생들의 마음이 학생들의 환한 얼굴에서 묻어나온다고 현 오뚜기 교장인 박상진 선생님이 말한다.

지난 해의 일일호프는 판매순수익 64만원, 기부금 276만원 총계 345만원의 수익이 있었다. 당시 현장을 방문했던 <연세춘추>의 기자들은 오뚜기 일일 호프에서 참 정겨운 분위기를 느꼈다는 말을 했다고 박상진 교장은 말한다.

▲ 오뚜기학교의 조선의 법궁 경복궁 나들이다. 북측의 학생들이 얼마나 와보고 싶어할 경복궁인가? 마찬가지로 이들은 어서 통일이 되어 고려의 궁인 개성에도 갈 날이 있을 것이다. 바로 저들이 서있는 자리는 일제가 조선의 궁을 헐어버리고 조선총독부(소위 중앙청)를 만들었던 자리이다. 1945년 8월 15일 일장기가 내려오고 성조기가 올라간 자리이다. 

조선의 법궁 경복궁과 수학여행의 나들이를 즐기는 오뚜기일요학교 학생들

박상진 교장은 일일호프와 오뚜기의 밤의 행사는 오뚜기와 인연이 깊은 분들이 참여한다고 한다. 

창립자인 고순계, 전 종로서적 사장님인 이철지 후원회장과 오뚜기의 어머니 이순자님 등이 오뚜기 창립멤버들이다.

▲ 오뚜기학교 창립당시 멤버들이 자리를 했다. 중앙에 좌에서 두번째가 이철지 후원회장으로 종로서적 사장을 역임하면서 오뚜기 안내서를 직접 편집하고 인쇄를 해주어 오뚜기의 탄생을 만들어준 은인이다.

이들은 문제의 시대에 문제가 없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면서 오뚜기에서 그 문제를 찾으려고 고민하였던 정봉우리 선생과 나운영 작곡의 오뚜기 교가를 편곡해준 정해강 선생님을 또한 오뚜기학교에서는 산증인으로 잊을 수 없다.

오뚜기일요학교는 전철 1호선 영등포역 2번출구로 나와서 마을버스 09번을 타고  세 정거장을 가면 바로 오뚜기일요학교이다.

걸어도 약 20분이면 도착할 수 있는 서울시 영등포구 도신로 143의 대원빌딩 302호에 자리를 잡고 있다. 전화 02-713-3478(일요일만 전화를 받음)이고 전자우편은 <oddug2@daum.net>이고 오뚜기 카페는 http://cafe.daum.net/oddug2이다.

학비는 무료이며, 카페를 방문하면 자세한 안내를 받을 수 있다. 교사는 급료를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매월 1만원의 회비를 내야한다. 

후원은 우리은행 1005-501-916018(예금주명 오뚜기일요학교)이며 재학생의 후원은 받지 않는다.

 

편집 : 김동호 편집위원

고순계 주주통신원  sangdo11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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