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토요일 저녁 식사후 우연히 켠 TV에서 '불후의 명곡' 프로그램이 보였다. 어떤 젊은 여가수가 나애심이 부른 '아카시아 꽃잎필 때'라는 노래를 애절하게 부르는데, 갑자기 예전 아주 어릴적(초등 1년) 누님이 나를 데리고 가서 극장에서 보았던 신영균, 김혜정 주연의 동명의 흑백영화 장면이 뇌리에 떠올랐다.

다른 줄거리는 별로 기억이 안 나는데, 맨 마지막에 독립군 역으로 나온 신영균이 총살 집행된 직후 형장에 도착한 여주인공 김혜정이 아카시아 나무에 묶인채 축늘어진 신영균의 시신을 부여잡고 하염없이 우는 장면에 아카시아 꽃잎이 흩날리는 장면이 유난히 생각났다. (줄거리 요약은 맨 아래 참조)

내가 아주 어릴 때부터 영화보는 것을 좋아하게 된 것은 누님의 영향이 큰데, 1960년대 당시 남자 주인공 신영균과 최무룡, 남궁원을 좋아하던 누님이 세 사람이 주연으로 등장하는 영화를 어쩌다 보러갈 때 꼭 나를 데리고 같이 갔기 때문이다. 아마 5살 때 처음 본 사극 흑백영화에서 감옥에 갇힌 상투 틀고 한복입은 배우들을 보고 옛날에 진짜 살았던 사람들로만 알고 무척 신기해하던 그때가 생각난다.

그리고, 내가 누님없이 혼자서 영화를 보게 된것은 초등학교 4~5학년때 같은데, 내가 살던 북아현동 산7번지 집에서 멀지않은 아현동에 현대극장이 있었다. 어느날 방학 때인가 우연히 극장 앞을 지나가다가 보니, 내 또래의 어떤 아이가 매표소 앞에 있다가 어느 낯모르는 아저씨가 표를 사서 영화관으로 들어갈 때, 갑자기 그 아저씨 손을 잡고 “아저씨, 저좀 데리고 들어가주세요..” 하는게 아닌가? 그러자 한번 흘낏 그 아이를 보던 아저씨는, “그래라”하고는 극장 앞에 표받는 입구로 그 아이 손을 잡고 같이 들어가는 것이었다.

나도 그 아이처럼 흉내를 내서 영화관에 들어가고 싶었지만, 처음엔 어떻게 해야할지 막막해서 몇 번 시도해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그러다가 며칠 후에 다시 용기를 내어 극장앞으로 간 나는 이번에는 며칠 전 보았던 어떤 아이처럼 끝내 극장 안으로 들어가 혼자 영화를 보는데 성공하였다.(그때, 괜히 마음이 조마조마해서 어떤 내용의 영화인지는 다 잊었다.)

다행히, 그렇게 조마조마하게 마음졸이면서 영화를 보지않아도 될 수 있었으니, 그것은 영화초대권을 때때로 공짜로 얻을수 있었기 때문이다. 부모님이 북아현동 굴레방다리 근처에서 조그만 과일가게를 하였는데, 가게 앞에 영화포스터를 붙이게 해주는 조건으로 가끔 공짜 초대권이 나왔다. 초대권은 주로 근처 가게 어른들이 가져갔지만, 어쩌다 재미없는 영화(?)는 남아있는 초대권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루는 공짜 초대권이 굴러다녀서 그걸 가지고 현대극장으로 가서 봤는데, 제목이 ‘어느 여배우의 고백’이었다. 어린 내가 보기에도 내용이 밋밋해서 지금도 내용이 별로 기억에 남지 않아 인터넷 검색을 해보았더니, 남정임과 김진규 주연의 영화로서 줄거리를 읽어보면서 그때 그 시절의 추억을 소환할 수 있었다. (~줄거리 요약은 맨 아래 참조)

그런데, 그때 저녁 늦게야 들어가니 형들이 어디 갔다왔냐고 묻길래, 초대권으로 영화보고 왔다고 했더니, 제목이 뭐냐고 묻는다. ‘어느 여배우의 고백’이라고 대답했더니, 갑자기 ‘왜 그런 영화를 보느냐’고 가볍게 힐난하는 것이었다. 제목만 듣고 ‘야한 영화’로 오해하고 하는 말이었다. 좀 억울했지만 그냥 말없이 저녁밥만 먹었던 기억이 난다.

이렇게 중학교 시절까지 초대권으로 서울시내 여러 극장을 다니면서 혼자 영화를 감상하던 시절에 지금도 기억나는 극장으로는, 아현동의 현대극장 말고도 ‘신영극장(신촌), 대흥극장(대흥동), 국제극장(광화문), 파고다 극장(종로) 등이 있다. 이 중에 현대극장은 벌써 불이 나서 없어지고, 국제극장도 1980년대 중반에 헐리고, 파고다극장과 대흥극장도 이제는 없어지고 신영극장 자리엔 CGV극장이 들어섰으니, 이제 어느 곳을 가도 나의 어린 시절의 시네마 키드 시절을 회상할수 있는 곳은 한 군데도 남아있지 않다.

그래도 그 시절을 추억할 수 있는 영화제목으로 지금도 기억나는 우리 영화가 몇편 있으니, 이예춘(~이덕화 부친) 주연의 ’지옥문‘과 최은희 주연의 ’성춘향‘, 신성일 주연의 ’맨발의 청춘‘ 등이다. 세분 모두 타계하시고 이제 아련한 어린시절의 추억이 되었다. 아, 옛날이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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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시아 꽃잎필 때’(1962년 상영) 줄거리

~아카시아 꽃이 필 때면 해마다 무덤을 찾는 한 여인(김혜정)이 있었다. 그녀는 연합군 첩보원이었다. 1942년 일본이 중국 대륙을 거의 짓밟고 있을 무렵, 양자강 유역에서 왜경에게 쫓기던 독립군 청년(신영균)이 그녀의 집으로 급히 피신하게 되었다. 그녀는 그에게 많은 돈을 지불하고 중경(=충칭)까지 가는 길 안내를 부탁한다. 천신만고 끝에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청년은 중요한 기밀문서를 잃어버렸다. 그에게는 총살형이 선고되고 그사이 그와 정이 든 여인은 백방으로 손을 썼으나, 형 집행정지 명령이 떨어져 현장을 찾았을 때에는 이미 그의 총살이 집행된 직후였다. 그 무렵에 아카시아 꽃은 만발해 있었다.

 

‘어느 여배우의 고백’(1967년 상영) 줄거리

~한때 멋진 외모와 연기력으로 유명하던 배우(김진규)가 있었다. 화려한 시절은 가고 지금 그는 폐인이 되어 잃어버린 딸(남정임)을 찾아 헤맨다. 옛 동료배우의 도움으로 어느 술집에서 딸을 찾게 되지만, 지금 자신의 모습이 너무 초라해 차마 아버지라고 나서지 못한다. 대신 그는 딸을 배우로 데뷔시킨다. 아버지의 재능을 이어받았는지 딸은 은막의 스타가 되고 큰 인기를 얻는다. 딸의 성공을 지켜보던 아버지는 자랑스런 딸의 모습을 보면서 몰래 떠나 종적을 감춘다. 딸은 뒤늦게 자신을 뒷바라지해주던 사람이 자신의 아버지인 걸 알고는 아버지를 찾으러 나선다. 백방으로 수소문한 끝에 그를 찾아 함께 출연을 하지만, 영화의 마지막 촬영장에서 아버지는 딸의 팔에서 영화처럼 숨을 거두게 된다.

편집 : 박효삼 객원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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