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방삭 장군 아들 전홍례 판관의 효심

전홍례(全弘禮)는 1575년 보성군 우산리 택촌 마을에서 태어 낳다. 증조부 전청(全淸)은 진사로 보성 원효산(元效山)에서 후학을 가르쳐, 후세인들은 덕이 많은 인물로 ‘군자(君子)’라고 칭송을 했다. 그의 조부 전윤부(全潤富)는 장흥 도호부사를 지내신 분이였고, 부친 전방삭(全方朔)은 당시 부정(副正) 건공장군(建功將軍)이었다. 기이하게도 조부도 독자요 부친도 독자였는데 손자마저 독자로 태어 낳다. 추후의 사실이지만 전홍례의 아들 전이빈(全以斌)까지 독자로 태어 낳으니 희귀한 운명이다.

전홍례는 당시의 시대적 사정으로 보아 부유하고 권세께나 있는 집안의 손자로 태어남에 할아버지 할머니의 사랑뿐만 아니라 부모의 사랑을 독차지 하며 성장했다. 가문의 교육 수준이나 성인군자의 길을 익히는 예의 도덕적 정신과 습관이 남달리 몸에 베이게 성장했음은 분명하다.

성장하여 자(字)는 대진(大進)이요 호(號)는 후암(後庵)이라 불렀다. 여기에서 보듯 부친 전방삭의 자와 호를 이어받는 점을 볼 수 있다. 부친 전방삭의 자인 일진(日進)에서 대진(大進)으로 호는 규암(葵庵)에서 후암(後庵)으로 이름짓는 것으로도 부친의 뜻을 따라 대를 잇는다는 의미가 숨어있다.

전홍례가 태어난 보성군 우산리 택촌 마을에 대해 잠시 알아보자. 이 마을은 보성읍내에서 멀지 않는 곳에 위치한 마을이다. 예부터 선비들이 모여 학문을 익히는 마을로 이름이나 일명 ‘선비촌’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 마을은 농사짓는 여건이 매우 좋아 부촌이기도 했다.  풍수지리학적 요인인지 선비촌의 요인인지는 모르지만 조선중기에 전방삭 장군과 그의 아들 전홍례 판관이 배출되었다.

학자인 우산(牛山) 안방준(安邦俊)은 성리학을 중심으로 호남의 명성을 높였고 임진왜란 시에는 박광전 의병장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웠으며, 정묘·병자호란 때에도 의병을 일으켜 많은 공을 세웠다. 일제 강점기에 담살이 의병장으로 유명한  안규홍(安圭洪)은 안방준의 10대후손이다. 이와 같이 보성이 자랑하는 역사적인물이 많이 배출된 마을이다.

▲ 보성 우산리 택촌마을
▲ 우산리 택촌마을 복지관

전홍례는 평소에도 부친의 뜻을 받들어 무예연습에 열중하였다. 이로 인해 1606년(선조39) 에 무과에 올라 훈련원 판관을 지냈다. 부친 전방삭 장군이 1598년 7월 12일 보성 득량 죽전벌 전투에서 순절하였다. 평소 부친의 충절과 가르침을 사모해오던 차에 부친의 유지를 받들고자 부친께서 설진한 해상의병기지인 벌교읍 영등으로 가솔과 친척 몇 분을 모시고 이거를 했다.
고향인 택촌 마을은 부촌이기도 하지만 이웃의 수준 높은 생활로 화기애애한 정든 땅을 뒤로 하고 오직 부친의 유지를 받들고자 아무도 살지 않는 바닷가 야산지대로 이거한다는 마음을 헤아려 보자. 이거 후 맨 먼저 지은 집이 조상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祠堂)을 설당(設堂) 했다고 전하니 그 마음을 가히 짐작하리라.

후일 전홍례 판관이 병자호란 때 임금을 강도로 모시다 순절하자 이곳의 이름을 쌍충각(雙忠閣)이라 불렀는데 이마저도 일제 강점기에 일본 순사들에 의해 불태워졌다.

▲ 낙안읍지
▲ 낙안읍지 전홍례 기록 내용

위 내용을 해석하면
“전홍례(全弘禮)는 천안인(天安人)이며 규암공 방삭의 아들이다. 인묘조에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 판관을 지낼 당시 병자호란을 맞아 임금님을 강도로 충성을 다하고 있는 힘을 다해 호종 하시다가 총탄에 맞아 돌아가셨기에 절재절의(節載節義)를 기록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 영등마을 사장

전홍례는 이곳에 느티나무를 심고 그 그늘아래서 건너 배끝산에 과녁을 설치하고 활쏘기 연습을 하였다고 하여 일명 사장(射場)이라 불리고 있고, 지금도 느티나무가 무성하여 여름이면 동네 분들의 서늘한 쉼터가 되고 있다.

▲ 영등마을이 형성되기 전 옛모습
▲ 영등마을 표지석
▲ 영등마을 위성사진

 

편집 : 김동호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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