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드렸으면 피하자

인간의 삶은 복잡하다. 매일 불특정 다수와 만나야 하고, 예측불가능한 일들을 처리해야 하니 그럴 수밖에 없다. 원하든 원하지 않던 말이다. 복잡하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하다. 그러므로 너나 할 것 없이 이구동성으로 단순하게 살자고 한다. 복잡하게 살지 말자고 한다. 하지만 현실은 말처럼 그렇게 쉽지 않다. 복잡함을 떠나 단순하고 단조롭게 살고 싶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하니 단순하고 단조로운 생활이 성인의 삶과 종교처럼 되어 버렸고, 일부는 산업이 되었다.

▲ 출처 : 한겨레. 벌집과 벌통을 건드리면 벌벌 떨게 된다. 건드리지 말자.

겨우내 얼어붙었던 대지가 녹고 산야에 꽃이 피고 새잎이 돋아나는 행락 철이다. 굳었던 몸과 맘이 풀리고 자연이 부르니 가만있을 수 없지 않는가? 손발을 벌려 들길 지나고 언덕 넘어 산길을 다니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길로 들어서기도 한다. 그러다 보면 급한 마음에 부주의하게 되고, 주변에 무엇이 있는지 인식하지 못한다. 사실 자연은 싱그럽고 아름답지만 항상 위험도 내재하고 있다. 그를 잊고 잠시 분위기에 휩싸여 경거망동하다보면 위험에 처하기 마련인데, 벌집과 벌통을 건드렸을 때가 그렇다. 건드리지 말아야 하지만 이미 건드려 버린 벌집과 벌통은 원래대로 수습이 불가능하다. 보호구가 없다면 일단 현장을 피해야 한다. 그게 슬기로운 처신이다. 그 자리에서 벌과 싸워 벌을 물리치려고 한다면 더 큰 위험에 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미련하고 어리석은 짓은 없을 것이다. 그런 사람도 있으니 안타깝다.

현실 삶에서도 그럴 경우가 종종 있다. 보통 사람들은 대개 벌집 한통쯤은 가슴에 안고 살기 마련이다. 평소에는 벌통이 있는지 없는지 느끼지 못하지만 때가 되면 나타난다. 설사 알고 있다 해도 구태여 나타내거나 공개하고 싶지는 않다. 딱히 부끄럽거나 숨겨야할 부정한 것은 아니지만 자랑스럽게 공개할 것도 아닌 것이다. 그런데 이게 역하게도 삶의 에너지가 되는 경우도 있으니 반드시 피할 것만은 아니다. 벌집 벌통은 개인과 가정, 기관단체나 심지어 국가에도 있다. 벌집과 벌통은 자의든 타의든 건드리지 않는 게 좋다. 어쩔 수 없거나 불가피하지 않다면 말이다. 그게 서로를 돕고 모두를 위하는 것이다.

▲ 출처 : 한겨레. 벌이 없어지면 생태계가 사라진다고 한다. 벌을 보호하자.

그런데 고약한 사람들은 이를 찾아 고의로 건드려 터뜨린다. 못된 망나니짓이다. 본인의 권익이 걸려 있기도 하지만 아무 실익도 없는데 그냥 그러는 자도 있다. 앞뒤도 가리지 않고. 참으로 어이없고 한심한 자들이다. 사후에 일어날 일도 생각지 않는다. 때로는 이것이 기로가 되어 큰 위험을 낳고 생명을 잃을 수도 있다. 타인의 벌통과 벌집을 건드리지 말자. 자신까지 탈날 것이다. 남이 원하지 않는 언행은 삼가자. 하지말자. 남이 원하는 일일지라도 그에게 다시 확인한 후 하자. 자신은 그가 원하리라고 생각되지만 실제 그가 원하지 않을 수 있다. 삶은 자신 혼자 사는 것이 아니다. 부담 없다고 어설피 한 일이 메아리와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고, 혹이 붙어 올 것이다.

어떤 이유로도 벌집과 벌통은 건드리는 게 아니다. 실수로 건드렸으면 도망가는 게 최선이다.

편집 : 김동호 편집위원

김태평 편집위원  tpkki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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