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초순 비가 온 다음 날 이른 아침, 새벽 산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집 앞에는 왕복 2차선 도로가 있는데 바로 곁이 가족사랑공원이다. 공원 내부를 순환하는 소로에 인접하여 벤치들이 있다. 오늘 사건?을 만난 벤치는 낮은 나무들이 가리고 있어 새벽 어둠 속에서는 벤치 넘어가 잘 보이지 않는다.

무심코 지나가는데 느낌이 좀 이상했다. 발걸음을 잠시 멈추고 벤치 아래를 바라보니 한 사람이 보인다. 급히 다가서 허리를 굽히고 은폐된 벤치 뒤쪽을 자세히 보니 맨땅에 젊은 청년이 누워 있지 않은가? 어제 밤새 비가 온 뒤라 땅은 아직 비에 촉촉이 젖어 있었다. 그대로 두고 갈 수가 없었다. 자세를 더욱 낮춰 가까이 보니 흰색 반팔 옷에 검정 가방을 대각선으로 멘 채였다.

▲ 밤새 비 온 뒤 새벽 산책길. 저 앞쪽 벤치 뒤에 누운 청년의 모습을 촬영하지 못했다. 하지만 잔영이 아련히 보인다.

필자 : (안쓰럽게 청년을 바라보며) 어이~ 젊은이! 내 말 들리나? 일어나게!

청년 : (아무 반응이 없고 움직임도 없다) ...

필자 : (걱정스런 마음에 오른 손으로 누워 있는 젊은이의 무릎을 흔들면서 좀 큰 소리로) 젊은이 일어나! 이대로 있으면 몸 상해! 어서 일어나 집으로 가야지.

청년 : (청년이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끔벅이며 초점 잃은 눈동자로 필자를 쳐다본다. 의식은 있으나 현재 상황을 파악하지 못해선지 말이 없다) ...

필자 : (젊은이를 내려 보면서 한층 낮은 목소리로) 어디 아프거나 불편한 데는 없나? 무슨 안 좋은 일이 있었어?

청년 : (아무 응답이 없이 눈만 끔벅거린다) ...

필자 : (청년이 말은 없지만, 의식은 깨어난 듯했고, 팔을 움직이더니 상체를 일으켜 세워 앉는다. 필자가 청년을 마주 보면서) 젊은이! 누구에게나 삶은 미숙하고 불완전해. 고민과 괴로움은 다 있어. 육십이 넘은 나도 그렇다네. 너무 상심 말고 어서 정신 차리고 집으로 가서 좀 쉬게. 그럼 좋아질 거야.

청년 : (필자를 한 번 쳐다보고는 고개를 푹 숙인 채 그대로 침묵한다.) ...

필자 : (청년이 들으리라 생각하고 말을 계속한다) 젊은이! 힘들고 괴롭겠지만 청춘이란 힘든 일이 생겨도 충분히 그에 대응할 수 있지. 젊은이와 같은 지금이 얼마나 좋은지 몰라. 길에 넘어지고 쓰러져도 괜찮아. 얼마든지 다시 일어설 수 있으니까. 지금은 아무리 힘이 들더라도 힘을 쓸 수 있단 말이지. 이제 나와 같이 육신이 나이 들고 정신까지 노쇠해지면 그렇게 할 수 없어.

청년 : (그래도 아무 대꾸가 없다) ...

필자 : (주변을 잠시 둘러보다 다시 청년을 보면서) 그래, 이제 좀 정신이 들었지. 난 이제 갈 테니 잘 이겨내게.

청년에게 말은 했지만 사실 필자 자신에게 한 것이었다. 그리고 혼자 공원 계단을 내려오면서 중얼거렸다.

‘젊은이! 매사를 너무 완벽하게 이루려고 하지 마. 바라거나 기대하지 않는 게 좋아. 그렇게 될 수도 없지만 된다 해도 별로 바람직한 것은 아니야. 차면 더 이상 채울 공간이 없기 때문이지. 다소 부족하고 모자람이 있어야 살맛이 나. 그것은 축복이야. 채우거나 보탤 것이 있어야 살아갈 기운이 나지 않겠어? 배 속이 꽉 찼다고 생각해봐. 거북하고 답답하지 않겠어?

그릇도 그렇지만 사람의 마음도 빈 곳이 좀 있어야 해. 그러므로 누구나 완전함을 추구할 수는 있으나 도달하지는 말아야 해. 도달해버리면 더 갈 곳이 없어지니까. 그곳은 정지된 곳으로 죽음의 곳이지. 삶의 생생함은 목표 지점, 그 끝에 있는 게 아니라 그곳까지 가는 길 위에 있지. 그래서 늘 움직여야 하는 경계선에 있는 거야. 이쪽도 아니고 저쪽도 아닌 즉, 안정이 없는 불안한 경계 선상에.

그곳엔 넘치는 활력이 있어. 인생을 통틀어 그래야겠지만 따지고 보면 그 경계의 시기는 바로 젊은 시절이지. 청년과 같은 시절. 청춘이란 육신으로 대표되는 인생의 어느 한 때를 말함이 아니야. 마음과 정신의 상태지. 청춘은 장밋빛 얼굴, 앵두 같은 입술, 우아한 자태, 유연한 육신이 아니라 강인한 의지, 풍부한 상상력, 불타는 열정이야. 부디 힘든 시기를 잘 극복하고 흥이 넘치는 삶이 되길 바라네. 젊은이!” 이렇게 되뇌면서 청년을 자신에게 비춰봤다. ’나는 저런 경험이 없는데... 저런 절박함이 없었어. 너무 평범한 청년 시절을 보낸 걸까? 저 청년이 부럽기도 하다는 말인가?‘

새벽 산책을 하다 보면 많은 류(類)의 사람들을 만난다. 새벽을 열고 하루를 산뜻하게 시작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개중에는 어젯밤의 어둠을 아직 온몸에 이고 헤매는 사람도 있다. 오늘 만난 청년처럼. 그러기에 사람 사는 세상이리라.

모두가 항상 만족하고 행복할 수는 없다. 차이는 있겠지만 굴곡이 있기 마련인 것이다. 그 굴곡은 삶을 중단시키는 계기가 되는 것이 아니라 삶에 활력을 주는 에너지가 되는 것이다. 음식에도 오미(五味)가 있어야 제맛을 느낄 수 있듯이, 인생에서도 오미(五味)를 제대로 맛보며 살면 좋겠다. 

편집 : 김동호 편집위원

김태평 편집위원  tpkki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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