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과 공휴일 한낮이면 서울풍물시장이 있는 신설동 일대와 동묘, 청계천 인근은 보행로와 찻길 가녘까지, 구제의류를 비롯한 온갖 종류의 물건들, 심지어 이쑤시개와 바늘쌈에서 중량 수 십 킬로그램은 족히 됨직한 전동 장비까지, 오만 가지 물건이 발 디딜 틈 없이 펼쳐진 난전(亂廛)과 그 틈을 헤집고 다니며 물건을 고르고 눈요기하는 사람들로 가히 북새통을 이룬다.

나 역시 지난 수 년 동안 두어 달에 한번은 어김없이 그곳을 찾아 북새통에 몸을 섞곤 한다.

통칭 벼룩시장이라 불리는 장소의 번잡함과 무질서와 소란스러움, 그곳에서 느끼는 생존의 역동성이 나는 좋다.

‘도심속의 보물창고’. 시장 입구 아치형 광고판에 쓰인 문구다.

서울풍물시장을 꾸미는 이 말에는 어딘가 사람을 꾀어 들이는 솔깃함이 있다. 아마도, 가뭇없이 잊고 지내온 천진난만한 시절의 모험심과 호기심을 슬쩍 건드리는 ‘보물창고’라는 단어의 동화적 뉘앙스 때문이라고 짐작해 본다.

그런데 천연덕스럽게도, 나는 매번 ‘도심속의 보물창고’를 ‘도심속의 고물창고’로 읽는다.

내겐 단어나 문장을 빈번히 틀리게(다르게) 읽거나 제멋대로 띄어 읽는 습관이 있다.

건성으로 훑어 읽다가 잘못 인지된 글자에 자신의 선입견이거나 고정관념을 덧씌워 매우 생뚱한 내용으로 해석하여 제풀에 당황하기도 하고 곁에 있는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경우도 다반사.

이를테면, ‘경기도 박물관 찾기’라는 버스 전광판 광고를 보며 ‘경기 도박 물건 찾기’로 읽고 깜짝 놀라는가하면 ‘삼성 휴대폰 수리’를 ‘남성 휴대폰 수리’로 읽고는 어째서 그 매장은 남성 휴대폰만 수리 하는지 한참을 의아해하기도 하며 ‘찰(찐)옥수수 팝니다’를 ‘살찐 옥수수 팝니다’로 읽고서 실제로 옥수수를 팔던 뚱뚱한 아주머니의 익살이라 여기며 피식 웃기도 했다.

여하튼 ‘보물창고’ 입장에서는 ‘고물창고’로의 전락이 부당하고 억울할만하다.

없는 것 빼고 다 있고, 새것 빼고 다 있는 도심 속의 보물창고.

서울풍물시장은 1950년대 6.25이후 고물상들이 터를 잡았던 시기의 시장 초기형태에서 1973년 청계천 복개공사가 완료되자 인근의 삼일 아파트를 중심으로 중고시장이 형성되었고 이후 서울의 근대화 과정에 따라 거래물품이 바뀌는 등의 변화와 발전을 거듭하며 ‘황학동벼룩시장’ ‘동대문풍물시장’으로 불리다가 2008년 신설동으로 이전하면서 행정구역상의 버젓한 지번과 인터넷 공식 홈페이지도 갖춘 복합 장터인 ‘서울풍물시장’으로 공식 명칭 된 전통시장이다.

벼룩시장은 파는 물건들이 당장이라도 벼룩이 튀어 나올 듯 낡고 오래된 것이라는 의미에서 이름 붙여졌다는 설(說)과, 상인들이 골동품등을 구하기 위해 지방 여기저기를 벼룩처럼 뛰어 다닌다는 데서 유래했다는 설(說)이 있지만 나는 첫 번째 설(設)에 크게 공감한다.

상표도 떼지 않은 새 옷이라 하더라도 벼룩시장 난전에 진열해 놓으면 자연스레 몇 년 묵은 옷처럼 보이니 새것을 담는 데에는 공간의 고착된 분위기로 인한 한계가 있어 보인다.

“이거 작동해요?”
“몰라요”

구매자와 판매자 사이에 오가는 대화. 정상적인 상거래 형태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이상한 내용이지만 풍물시장에서는 이런 식의 대화가 흔하고도 자연스럽다.

이렇게 해서 구입한 기기가 제대로 작동하면 보물을 횡재한 것이고, 불량이어서 못쓴다손 치더라도 크게 아쉬워하지 않고 대범하게 고물로 치부하는 아량을 부릴 수 있는 까닭은 오직, 판매자가 제시한 물건의 파격적인 가격에 있다.

이쯤에서 보면, 보물창고와 고물창고는 이음동의어(異音同義語)다.

모든 오래된 것들에는 향기가 있다.
그리움이나 향수(鄕愁)같은, 사물에 깃든 기억의 향기.

낡고 때 묻고 성하지는 않지만 아직도 누군가의 눈길을 받는 애련한 것들과 그것들 속에서 가치를 찾는 사람들은 보물창고를 찾아 궤짝들을 들추어 자신과 눈 맞춘 물건의 먼지를 털고 가다듬어 보물인양 품에 안는다.

♣고서 사고팝니다

가끔은 헌책방을 갈 요량으로 풍물시장을 찾기도 한다.

누렇게 빛바랜 고서와 대형서점에서도 찾기 힘든 절판된 책들은 물론 비교적 신간까지, 입구부터 빼곡히 들어찬 책 더미 사이로 들어서면 묵은 종이 특유의 매캐하고 눅눅한 냄새에 이끌려 책으로 위로받던 시절의 아득한 기억들이 너울처럼 밀려와 지레 마음 설렌다.

한껏 여유부리며 책꽂이를 훑어 이것저것 마음 가는 책에 일일이 눈길을 싣다보면 도낏자루 썩기 십상. 거기에 알토란같은 책 몇 권 득템(得item)하면 세상 부러울 것이 없다.

한번은 <을유문고>에서 출간한 임어당(林語堂 린위탕)의 수필집 “생활의 발견”을 발견하고 들쳐보던 중 오래전 내가 밑줄 그어가며 읽었던 구절에 연필로 그어진 밑줄을 보았다. 흔치않은 우연.

순간, 그 책을 소유했던 누군가에게 시공간을 넘어서는 친밀감과 동지애마저 느껴졌다.

...하늘에 아름다운 구름이 떠 있다면 구름을 읽고 책은 잊는 것이 좋다. 그렇지 않으면 책과 구름을 다 같이 읽어라. - “생활의 발견”중

♣내 친구의 타자기

지금에야 고층 아파트가 들어차 비탈길의 흔적조차 없지만 80년대 초 북가좌동 일대는 꽤 높은 지대에 여러 갈래 좁은 골목을 사이에 두고 지붕 낮은 고만고만한 집들이 밀집해 있던 산동네였다. 지방 소도시 고등학교를 함께 다닌 단짝 친구의 자취방이 그곳에 있었다.

서울 생활에 적응 못하고 공부도 뒷전, 허송세월하는 나와는 달리 대학 입학하고 이내 학생운동에 뛰어든 친구는 연일 언더써클 세미나와 집회와 가두투쟁으로 불철주야 자못 비장하게 이십대를 펼쳐가고 있었다.

도통 만나기 힘든 친구가 그리워 자취방으로 찾아갔던 어느 날, 주인 없는 방 책상 위에 놓여있던, 누군가에게 빌렸거나 중고제품으로 구입했음직한 낡은 수동식 타자기에 나는 단박 매료되었다.

‘행운의 네잎 클로바’. 오른손 검지 하나로 자모음 글쇠를 눌러 완성한 나의 첫 타이핑. 타자기의 상표가 '크로바'여서 그냥 찍어 본 문장이다.

타자기와 사랑에 빠진 나를 위해 친구는 창문 틈에 방 열쇠를 놓아두고 외출을 했다. 나는 한껏 멋을 부려가며 서툰 글짓기도 하고, 책을 베껴 타이핑하거나 친구에게 읽힐 편지를 쓰며 타자기와 놀았다.

♣강가의 아침(La Matin Sur La Riviere)과 이브 브레너(Eve Brenner)

LP(Long Playing)판과 각종 비디오테이프 등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단골 가게. 매번 눈요기에 그치지만 풍물시장에 들를 때면 항상 발길이 머무는 그곳에서 다시 만난 반가운 얼굴.

이브 브레너(Eve Brenner)는 80년대 초 Danielle Licari(다니엘 리까리)와 더불어 국내에 스캣송 열풍을 일으킨 이탈리아 출신 여자 스캣 소프라노다.

전체 음역이 6옥타브를 넘나드는 신비하고 야성적 힘이 실린 목소리로 음악 평론가들로부터 “신이 내린 가장 아름다운, 인간적인 악기”라는 칭송을 받은 가수이다. 음반 자켓의 그녀 얼굴도 목소리 못지않게 신비하고 아름답지만 그보다 나를 매혹시킨 건 그녀가 부른 노래의 제목 ‘강가의 아침’이었다.

보고 듣고 읽는 데에 마냥 허기져 있던 20대 초에 가장 받고 싶은 선물 1,2위는 단연 책이거나 음반이었을 듯. 그러나 언제 누구로부터 받게 될지 모를 선물로서의 그것을 막연히 기다릴 수 없던 나는 스스로에게 이브 브레너의 음반을 선물했었다.

마음이 어수선할 때 강가의 아침을 상상하면, 정(靜)과 동(動)이 공존하며 흐르는 강물과 피어오르는 물안개의 명상적 분위기가 고즈넉이 느껴지며 더없이 평온해진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강가의 아침’은 온라인상 나의 닉네임이다)

공간은 기억을 담는다.

공간속에서는 기억(記憶)이 현존(現存)이 된다. 이는 장바닥에 나와 있는 물건 어느 하나도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 까닭이기도하다.

오만가지의 그것들이 그 자리에 있기까지 거쳐 온 생성(生成)과 영광(榮光), 별리(別離)의 기억들이 더듬어 보는일은 자못 숙연하다.      -끝-

 

편집 : 김동호 편집위원

이경애 주주통신원  iemma194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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