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9년 음력 8월 14일, 추석 전날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바다를 보고 자랐다. 그리고 지금도 눈만 뜨면 일렁이는 물결과 파도소리를 보고 들고 있다. 바다와 함께 참 많은 세월을 살았구나 싶다. 이곳 우리고장에서는 추석차례를 14일 저녁에 지내기 때문에 이날을 작은 추석날이라고 한다.

이날이 올해는 9월 30일이다. 내가 중학교 3학년 때로 기억이 난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땐 정말이지 고기도 많이 잡히고 완도는 각종 해산물의 천국이었다. 1959년 당시만 하더라도 청산도에는 파시가 열렸으며, 일본의 활어선이 살아있는 고기를 일본으로 곧장 가져갈 정도로 생산량이 많았다.

내가 초등학교 때는 완도의 명사십리(鳴沙十里) 해수욕장 앞바다에서도 참조기가 잡혔다고 어른들은 말씀하셨다. 그러던 것이 청산도에서도 잡히기 시작한 것이다. 도대체 참조기를 어떻게 잡는 것인지 궁금했고 잡는 모습을 한번 보고 싶었다. 

마침 이웃 아저씨의 배가 청산도로 조기를 잡으러 간다기에 따라가서 보고 싶었다. 아버지께 말씀을 드렸더니 화를 내시면서 못가게 하였다. 그러하시니 더욱 가보고 싶었다. 몰래 옷가지를 챙겨 담 너머로 던져 놓은 다음 사립문으로 살짝 나와 도망쳐 따라갔다.

그날이 음력 8월 11일이었다. 그때는 동력선이 없었고, 오직 노와 돛만으로 움직이는 약 9m 정도의 돛단배라 청산도에서 1박을 하고 다음날인 12일에 조업을 하였다. 이른 아침에 걸어 놓은 주낙을 걷어 올리는데 낚시마다 노란 빛깔의 조기가 연달아 올라왔다. 팔딱거리면서 올라오는 조기를 보며 즐거웠던 그 때가 지금 생각해도 생생하다.

다음날인 13일도 조업을 하였다. 정말로 많이 잡았다. 선원 아저씨들이 좋아서 함박웃음을 웃으면서 기뻐하시던 그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조기를 잡아서 어창에 넣어두면 소리를 낸다. 당시의 배들은 나무로 만든 배들이어서 조기가 내는 소리가 어장에서 울리는데 방음시설이 되지 않아서인지 마치 조기가 우는 소리처럼 들려서 그렇게 싫지는 않았다.

많은 고기를 한 곳에 넣어두니 소리가 상당히 켰다. 어른들은 그 소리를 들으면서 고기도 많이 잡아 즐거운 마음에 고놈 소리가 꼭 이화중선(조선시대의 명창) 같네 라고 하였다. 그 소리에 맞춰 껄껄거리며 뚝배기에 소주를 가득 따라 벌컥벌컥 마시면서 흥에 겨워 뱃장을 치며 부르던 단가의 한 구절도 생각이 난다.

8월 14일 하루만 더 조업을 하여 추석 반찬을 하자고 청산도의 도락리 앞 해안에 잠을 잤다. 얼마 지났을까 온 몸이 젖어오는 것을 느끼고 잠에서 깨니 비바람이 예사롭지 않았다.

뜬 눈으로 날이 밝았다. 어른들은 하늘을 쳐다보며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을 하였다. 그때 누군가 양복을 입은 사람이 그 비를 맞으면서 배를 포기하고 빨리 육지로 내려오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훗날 알고 보니 우리 마을 사람으로 당시 청산우체국장을 하고 계시던 이장옥 어르신이었다.

그 마음 영원이 잊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오전 10시쯤 되었을 때 어른들이 항해를 해서 완도로 가잔다. 그냥 갈만하니 가자고 하겠지 라고만 생각했다. 

그리고 출발을 했다. 그것도 앞 돛은 1/3을 줄이고 뒤 돛은 1/4정도를 줄여서 돛을 올리고 청산도에서 출항을 했다. 청산도에서 완도 쪽으로 약간 나오면 수심이 낮은 곳이 있어서 파도가 몹시 사나운 곳에 이르렀을 때, 앞 돛이 비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찢어지고 말았다.

배가 방향을 잃었다. 선주 아저씨가 소리를 지르며 빨리 앞 돛을 내리고 더 줄여 묶으라고 하여 아무 것도 모르는 나는 재빠르게 앞으로 가서 돛을 내리고 줄이고 묶은 다음 다시 올렸다.

그러자 배는 다시 바로서서 완도를 향해 오는데 아무 것도 몰라서였는지 무서운 것은 별로 없는 것 같은데, 배가 일렁이는 파도 속으로 들어가면 가까이 있는 산은 보이지 않고 시커먼 하늘만 보였다.

그렇지만 신기하게도 배 안으로 물은 들어오지 않았다. 어찌어찌하여 집에 왔는데 마을 어른들이 선주에게 입에 담을 수도 없는 욕을 하고 난리가 났다. 어린애들을 데리고 왜 죽을 짓을 하느냐는 것이었다.

그날, 그러니까 1959년 음력 8월 14일 자정에 완도는 태풍의 한 복판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있었다. 그때 우리 집은 바다와 20여 m쯤 떨어져 있었는데 아버지께서 안전한 곳으로 피해야 한다기에 작은 아버지네로 갔다.

마침 돼지가 새끼를 낳아 있었고 소도 있어 같이 피신을 했다. 다음 날 아침 날이 밝아 집을 둘러보니 바닷물로 깨끗하게 청소(?)가 되어 있었으나, 그래도 집은 허물어지지 않고 있었다. 

내 생에 잊을 수가 없는 날이 1959년 음력 8월 14일 사라호 태풍이 불던 바로 작은추석 날이다. 심한 꾸지람을 들을 줄 알았는데 아버지께서 '어른들의 말을 들으면 손해 보는 일이 없다고 하시면서 참 좋은 경험 했구나' 라고 하시던 그  말씀이 생각난다.

편집 : 김태평 편집위원

마광남 주주통신원  wd3415@naver.com

한겨레신문 주주 되기
한겨레:온 필진 되기
한겨레:온에 기사 올리는 요령

저작권자 © 한겨레:온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