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자신에게 어리바리하다고 말한다면 그 말을 듣고 기분 좋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20대에 논산훈련소에 입소했을 때 처음 그런 소리를 들었다. 그는 29연대 소속의 상사였는데 저녁 점호시간에 우리를 질타했다. 자신이 논산훈련소에서 하사관 생활을 한 지가 10년이 지났는데 이번 기수처럼 어리바리한 놈들은 처음 본다고 했다. 그러면서 한겨울에 팬티 바람으로 연병장에서 얼 차례를 시켰다. 그 때 알았다. 어리바리한 것의 대가가 얼마나 혹독한지를.

어린 시절에 많이 생각했었다. 나의 인생은 어찌 될까, 어떻게 흘러갈 것인가. 나에게 주어진 이 생을 어떻게 살아내야 할까. 미래는 보이지 않았고, 현재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세상은 이 모양으로 계속 한심하게 흘러갈 것인가. 어떤 변화라든가 희망을 품기에는 너무도 처참한 시절이 아닌가. 이 세상에서 아무도 모르게 사라질 절묘한 비책은 없을까. 그런 생각에 잠겨 매일을 살고 있었다. 그러니 모친으로부터 '약삭빠르지 못하다'고 수시로 야단을 맞는 것은 당연한 대접(?)일지도 모른다. 공부 잘하고 싹싹한 아들을 기대했을 텐데 그와는 정반대였으니.

그러다가 청년이 되자 또 생각했다. 청년시절을 어떻게 해야 잘 살아낼 수 있을까, 어떻게 청년시절을 채워가야할까. 어떤 여인을 만나 결혼하게 될까, 과연 그 여인과 행복한 결혼생활을 할 수 있을까. 한국 사회는 언제나 되어야 후진적인 군부독재 치하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한국 사회는 얼마나 희망을 지닐 수 있을까. 과연 그런 희망을 지녀도 배신당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있을까. 직장생활은 과연 끝까지 견뎌낼 수 있을까. 나와 우리 사회는 언제쯤 미래의 꿈을 가꾸며 자신 있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 스무살 청년이 ‘정희진의 융합’을 먼저 읽고 그리다. 장태희
<출처 : 한겨레신문 - '정희진의 융합' 동문서답의 정치>

사회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조직에 몸담고 있다는 것은 두 가지 중 하나를 강요당하는 것이다. 출세와 승진을 위해 인간성을 후순위로 돌리고 약삭빠르게 살 것인가, 아니면 출세나 성공을 후순위로 돌리고 인간성을 고수하며 살 것인가. 대체로 인간성을 고수한 자들일수록 사람은 좋으나 조직에서 뒤쳐지고 승진은 당연히 늦을 것이다. 어느 노선을 걸어야 하나, 고민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본성이 약삭빠른 것과는 거리가 멀었으니 고민해봤자 결론은 뻔했다.

그러다가 제3의 노선을 발견했다. 약삭빠른 자들의 대열에 합류하지 않으면서도 인간성을 고수하면서 조직에서 뒤쳐지지 않는 길을 갈 수 있는 '좁은 문'. 그 문이 있었던 것이다. 직장생활을 10년 하다 보니 그 비법을 구사하는 소수의 무리들, 그런 노선을 걸어가고 있는 선배들을 발견했다. 그들은 소수였지만 어느 누구로부터 비난을 받거나 무시당하지 않으면서 후배들에게 인간성을 인정받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삶을 연구하며 그들의 길을 조심스럽게 따라갔다. 약삭빠른 자들로부터 무시당하지 않고 인간성을 지키면서도 조직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길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세월이 지날수록 그런 비법을 나도 모르게 터득해 나갔다. 약삭빠르지는 못했지만 어리바리하다는 인상을 주지 않으려고 애쓴 삶이라고나 할까.

그러다가 어느새 중년이 되고 환갑을 넘기게 되었다. 이제 돌이켜보니 이런 생각이 든다. 참 어리바리하게 인생을 살아왔구나, 그렇게 약삭빠르게 살지는 못했지만 그런대로 잘 살아왔구나. 생존경쟁의 치열한 삶을 산다는 건 참으로 비정한 일의 연속일진데 인간성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잘 버티고 살아왔구나. 지금의 아내를 만나 아옹다옹하면서 애들을 잘 키웠구나. 자녀들이 잘 자라줘서 고맙구나. 한 마디로 '선방했구나'. 현재까지의 모습이 대체로 이러했다.

어리바리한 우리네 인생은 그렇다 치고, 인류 사회와 한국 역사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 건가. 길고 크게 보면 인류 역사는 진일보해왔으며, 물질문명은 최고도로 발전했다. 하지만 지금의 인류는 어떤 상태에 있는가. 앞으로도 그렇게 그런 방식으로 진화할 수 있을까. 그리 전망이 밝아 보이지 않는다. 진보하겠다는 것인지 퇴보하겠다는 것인지 불투명하기 짝이 없다. 한 마디로 어정쩡한 상태이다.

▲ 경주에서 출토된 신라시대 ’로만 글라스’. 신라와 고대 로마의 교류를 보여주는 유물이다. 창비 제공
<출처 : 한겨레신문- '실크로드는 한반도 문명의 젖줄이었다'>

한국 역사는 또한 언제까지 이렇게 지지부진하게 흘러만 갈 것인가. 통일이 되기 전까지 획기적인 변화는 기대할 수 없는 걸까. 정치는 늘 한 치의 진전도 없이 답보 상태이고, 입시위주의 경쟁 교육은 여전히 개선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인류와 한국 사회는 큰 희망과 비전을 품기에는 아직 갈 길이 멀다.

그렇지만 돌이켜보면 한국 사회는 10년 주기로는 큰 진전을 보이곤 했다. 현재는 늘 답답하지만 십년 단위로는 무언가 진전이 있었고 변화가 있었다. 이 말은 10년이나 20년 시차를 두고 한국 사회에 대한 꿈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말해준다. 희망찬 사회라고 표현할 정도는 아니어도 절망을 품을 정도는 아닌 게 확실하다.

2020년 코로나19로 전 세계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이 즈음 역사에 대해 다시 생각해본다. 인류 역사는 이리도 어정쩡한 상태로 진행되었구나. 그랬어도 희망을 버릴 수는 없구나. 누군가는 꿈을 꾸고 누군가는 희생을 하면서 그렇게 역사는 흘러왔구나. 신의 섭리는 어김없이 보이지 않게 작용하며 역사를 관장해왔구나. 한반도의 통일도 그렇게 어정쩡한 상태로 예기치 않게 다가올까. 미래는 불확정형이지만 과거는 확정형이다. 그렇다면 현재는 미래의 불확정형을 우리가 바라는 방향대로 확정형으로 바꾸려는 노력의 진행형일 것이다.

이 땅에 태어나 보다 나은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사람들의 정의롭고 선한 의지로 인류의 미래를 보다 희망찬 사회로 변모시킬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은 결코 헛된 꿈은 아닐 것이다. 인간의 삶은 비록 어리바리한 것처럼 보여도 그 인생들의 선한 의지가 모이면 이토록 갈팡질팡 진행되는 역사를 언젠가는 꿈과 비전이 가득한 역사로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 아닌가.

정의롭고 공정한 사회일수록 행복지수가 높다고 한다. 한국 사회가 보다 정의로운 사회가 되도록 노력하는 것은 대한민국에서 태어나고 살아야 하는 우리의 후세들을 위한 일이기도 하다. 그런 사회를 구현하기 위한 방법론은 천차만별이다. 이제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구슬들을 꿰어야 할 때가 되었다. 그리하여 보배로운 한국 사회, 보배처럼 귀한 한국 문화와 역사가 성취되기를 오늘도 꿈꿔본다.

미래를 포기하지 않는 역사의 몽상가들이여!

고대 조상들의 지혜와 통찰이 그대들과 함께 할진저!

 

심창식 편집위원  cshim77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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