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에는 한낮에도 다양한 유선방송이 나와 소파 위에 앉으라고 자꾸 유혹한다. 컴퓨터 앞에만 앉아도 무료로 바둑을 두고 고스톱을 치고 최신 뉴스까지 볼 수 있다. 자연히 줄어든 육체 활동은 근육량을 줄게 하고 팔다리를 가늘게 하며 불면증으로 새벽에 눈뜨게 한다. 이런 생활습관에 젖은 자신이 싫고 가족의 눈초리가 부담스러워 일자리 정보를 찾아 구인 구직 누리집에 접속한다. 그런데 베이비붐 세대의 취업난을 알리는 보도들이 쏟아진다. 올해 80만명 이상이 직장을 떠날 것으로 예상되고 그중 60% 정도가 재취업을 희망하고 있지만 마음에 드는 직장 찾기는 그야말로 하늘의 별 따기라는 내용이다.

일벌레와 일중독자를 양산한 세계 최장 수준의 노동시간은 지난 세월 성실한 근로에 대한 찬양 교육과 사회적 환경의 결과물이다. 젊은 시절 우리도 남들처럼 놀고 싶었다.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서서히 변해갔고 일중독자인 지금의 내가 되어버렸다. 지금까지 그렇게 달려왔으면 이제 좀 피곤하지 않은가? 이제 좀 쉬고 싶지 않은가? 그런데도 또 재취업인가? 일벌레 관성 에너지가 그리 센 것이었던가?

하지만 ‘해야만 할 환경’ 또는 ‘자신만의 의지’ 등의 이유로 재취업을 원하는 시니어가 퇴직자의 60%를 넘는 게 현실이다. 나머지 40%에는 자발적 포기자도 많다. 여러 가지 핑계로 재취업을 포기하는 것은 상처받기 싫어하는 자기방어 기제의 한 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 구직에 실패했을 때 자신이 쓸모없게 느껴지게 될까 봐 두려운 것이다. 그렇기에 취업을 확실히 보장받을 수 있는 경우에만 이력서를 내고 싶어진다. 마지막 남은 자존심을 지키려는 자연스러운 행동이다. 이런 시니어한테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말하며 재취업을 권할 수도 없다. 그 숫자에 의해 명퇴당했고 정년퇴직했기 때문이다. 재취업도 그 숫자 때문에 안 되고 연령 차별도 그 숫자에서 온다.

그래서 나이 들어 이력서를 써 본 사람들은 예전 구호에 자꾸 유혹당한다. 고3 시절 초여름에 접어들 무렵, 앞줄에 앉아 공부하는 우리를 소위 노는 친구들이 유혹하던 그 구호 말이다. ‘떨어져서 울지 말고 웃으면서 포기하자!’

편집: 정지은 편집담당

정원일 주주통신원  hani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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