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겨레의 창간주주가 아닙니다. 당시 학생이었고, 학교에는 반민주적인 사회성을 외면한 채 아름다운 서정만을 지향하는 순수문학 동아리가 있었습니다. 세상은 혼탁한데 새소리나 고운 꽃노래만 부를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에 상응하는 동아리를 만드느라 무척 바빴습니다. 국민주로 신문을 만든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한겨레는 창간호부터 꾸준히 구독했습니다.

이발사인 아버지가 오랫동안 구독했던, 아니 신문은 조선일보밖에 없는 줄 아는 아버지를 한겨레독자로 바꿨습니다. 그 과정이 쉽지는 않았습니다. 같은 계원으로서 마을의 통장인 아버지의 친구가 조선일보지국을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친구와 아들사이에서 고민하던 아버지는 결국 제 청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예전의 ‘국민기자석’이라는 지면에 투고도 많이 했습니다. 자작시 두 편을 포함해서 대략 서른 편 정도가 게재되었습니다. 내 이름으로 투고한 것도 있지만 너무 자주 나오는 것 같아서 친구나 후배들의 이름으로 보낸 글도 꽤 있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서른 편이 게재되었다면 오륙십 편의 글을 보냈다는 겁니다. 보내는 모든 글을 실어주진 않으니까요.

채택되지 않은 글은 내용이나 구성이 부족한 것, 너무 강하다 싶은 내용의 글이 포함되는 것 같습니다. 강한 주장의 글을 보낼 때는 ‘이 글로 인한 피해를 감수하겠습니다.’는 문구와 함께 보내도 한겨레에서 걸러낸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찔했던 순간이 있었습니다.

여름방학 때의 일입니다. 볼일이 있어서 동아리방에 갔다가 자물통이 뜯긴 채 모든 책이 사라지고 난장판이 된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그날 오후 집으로 돌아왔을 때 어머니가 물었습니다.

“너 요즘,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냐?”

“예? 그게 무슨 말이에요?”

에스콰이아 명동점 명의의 편지가 내게로 왔다고 했지요. ‘구두회사에서 학생한테 웬 편지일까?’싶어서 뜯어보니 당시 김일성 주석의 신년사가 들어있었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듣고 다급하게 물었습니다.

“그 편지 어떻게 했어요?”

공포로 떨리던 마음이 편지를 태워버렸다는 말을 듣고, 조금은 안심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기가 막혔습니다. NL과 PD로 양분된 운동권에서 난 어느 한 계열의 조직원도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신년사를 한여름에 보냈다는 것도 이해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아무튼 저희들이 보내놓고, 저희들이 집뒤짐을 해서 편지가 나온다면 꼼짝없이 엮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요. 그 일을 당하고 ‘국가권력이 한 인간을 바보로 만드는 게 우스운 일이구나!’생각했습니다.

시간이 흘러서 한겨레의 활자가 겹쳐보이던 때가 있었습니다. 낡은 윤전기를 바꿔달라면서 다시 한 번 주주를 모집했지요. 몇 주를 구입했는지 기억나지 않고, 증권도 어디로 사라졌는지 모르지만 조금이나마 구입한 건 확실합니다.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아이랑 제주도로 이사를 갔습니다. 복닥복닥한 도시생활에 염증이 나기도 했고, 어린아이를 무한경쟁의 틀 속으로 등 떼밀기도 싫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십년을 보내고 서울로 돌아왔습니다.

정의로운 세상을 꿈꾸면서 철창에도 갇혀봤고, 캠퍼스에서 시위도중 경찰이 던진 돌에 맞아 한쪽 눈의 시력을 잃는 아픔도 겼었지만 세상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어린아이들, 학생들, 청장년, 노인들. 어느 세대의 삶도 물질적으로 윤택해지는 대신에 점점 더 숨막히게 팍팍해지고 있습니다. 허리띠를 질끈 졸라매고. 열심히 일하면 좋은 세상이 올 거라고 믿었던 아버지 세대의 희망마저 가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전업주부로 나름 열심히 살아왔음에도 아이들을 보면 미안하기만 합니다.

‘한 십년 유유자적했으니 뭐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생각하던 터에 한겨레주주통신원으로 활동하지 않겠느냐는 전자메일을 받았습니다. 그래 작은 힘이나마 보태고자 선뜻 응했습니다. 주주통신원으로서 활동을 하면서 오랜만에 현장에도 나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세상이 많이 달라졌음을 알았습니다.

기득권 세력은 엄청 커지고 지능화된 반면에 대안세력은 여전히 8-90년대의 낡은 방식으로 대처하고 있습니다. 사회구성원들의 연대의식은 약해지고, 냉소적인 분위기가 팽배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희망이나 전망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전망을 갖지도 못하면서 활동을 하는 게 혹시 자기만족적인 것은 아닌지 의심하고 있습니다.

제도권 교육을 받지 않고 16년 동안 실컷 놀도록 내버려두었더니 열일곱 살이 되어 스스로 공부해보겠다는 아이. 제 스스로 살아갈 궁리를 하는 모양입니다. 2015년 새해를 맞으면서 그 아이한테 제안을 했습니다. “네가 공부를 하겠다고 했으니 이제는 세상 돌아가는 것도 알아야 하지 않겠니? 재미는 없겠지만 일단 한겨레 사설을 읽어보자. 모르는 건 아빠한테 물어보고.” 아이가 사설을 읽는 동안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 옆자리를 지켰습니다.

사설을 능숙하게 읽기 시작할 무렵부터 조금씩 양을 늘리고 있습니다. 아이의 관심을 끌만한 기사와 중요한 이슈를 스크랩해주고 있습니다. 중앙일보와 한겨레의 사설을 비교하는 난도 꼭 읽게 합니다. 육 개월 쯤 읽었을 때 “그동안 재미없는 기사 읽느라고 수고 했어. 이제 읽기 싫으면 그만 두고, 네가 필요하다고 생각할 때 읽어.”했습니다.

아이가 말합니다. “아빠, 신문을 읽으니까 아띠(아이의 학교선생님)도 모르는 걸 내가 알고 있어. 그러니까 신문은 계속 보는 게 좋을 것 같아.”합니다. 아버지를 한겨레의 독자로 만들었고, 이제는 딸도 독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나는 한겨레주주나 독자로서, 또 주주통신원으로서의 별 자긍심을 갖지 못하고 있습니다.

‘현재 한겨레의 위상은 무엇일까? 그릇된 세력에 맞서서 제 역할을 충분히 하고 있는 걸까? 국민주로 탄생한 신문이라면 모래알처럼 흩어져있는 세력을 하나로 묶어내서 강고한 세력을 구축해야 할 텐데….’

학창시절에 한쪽 시력을 잃어버리고, 마땅한 일자리를 가질 수 없었습니다. 엎친 데 덮친다고 한쪽 무릎의 연골마저 파열됐고, 나이는 오십이 넘어버렸습니다. 생계비걱정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서울로 돌아와서 계속 코가 막히고, 피부에 트러블이 생겨서 강원도 원주로의 이사를 추진했습니다. 환경적인 요인과 더불어 경제적인 이유도 작지 않습니다. 모임의 활성화를 위해서는 불가피한 일이지만 주주통신원의 잦은 모임과 그에 따른 회비조차도 부담이 됩니다. 대구경북과 더불어 강원도에서도 한겨레의 세가 약합니다. 그래 '집세와 가게세가 저렴한 곳에서 커피가게를 운영하면서 주주와 독자들의 힘을 모아볼까?'생각했는데 아이가 다니는 '로드스꼴라(여행대안학교)'에 변화가 생겼습니다.

현재 로드스꼴라는 6기까지 있고, 올해는 정규반 대신에 토요일에만 학교에가는 주말 로드스꼴라반이 새로 만들어졌습니다. 내년에도 아이가 주말 로드스꼴라에 다닌다는 가정하에 원주행을 결심한 건데 여의치 않게 되었습니다. 2016년에는 7기 과정과 주말반을 뽑는데 주말반은 6개월 단위로 끊어서 진행한다고 합니다. 7기에 응모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매일같이 지방에서 학교를 다닐 수가 없어서 원주행을 철회했습니다. 그리고 한 달 가까이 집을 알아봤는데 집세가 터무니없이 비쌉니다. 상대적으로 집세가 저렴하고, 아이의 등하교 길이 편리하며 상대적으로 공기의 질이 괜찮은 곳을 물색하다가 일산의 백석역 부근에 집을 얻었습니다. 시월부터는 강원도 주주가 되는 줄 알았는데 2년은 더 경기도의 주주로 남게 되었습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세상을 잘 살아온 건지? 앞으로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요즘 들어서 부쩍 고민이 많아졌습니다.

오성근 편집위원 / 전업주부이자 작가, <매일 아침 밥상 차리는 남자>(2000), <Hello 아빠육아>(2007) 출간

편집: 이미진 편집위원, 이동구 에디터

 

 

오성근 주주통신원  babsangma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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