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지는 우리 것] 마광남 주주통신원

김류(金瀏, 1809~1884).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자는 사량(士亮), 호는 귤은재(橘隱齋)이며 여수시 삼산면 거문도 출신이다. 일찍이 학문에 뜻을 두어 어릴 때는 산성(山城) 김만형 사숙(私塾)에서 수학하였고 그 후 장성(長城)의 거유(巨儒) 노사 기정진(奇正鎭) 문하에서 수제자로 면학했던 두학(頭學)이다. 30대에 귀향하여 사친치가(事親治家)하면서 후진교회(後進敎誨)에 열중하고 있을 때 청국 함선이 삼도(거문도)에 입항하였다.

이때가 1885년으로 영국군이 거문도를 점령하자 언어상통이 안 되어 결국에는 문자로써 문답하였는데 선생의 수준 높은 필담 실력에 감탄한 청국 함장은 치하해 마지않으며 “이 섬 이름을 거문도(巨文島)라 하는 것이 적절하겠습니다.”라고 격찬한 바 있어서 그 후부터 거문도라 호칭하게 되었다 한다.

1844년 선생이 36세 때 불운의 상처에 겹친 가정의 불행을 극도로 비관한 끝에 여름 어느 날 밤 돛도 없는 일엽 뗏목 위에 홀로 투신하여 아무 분별없이 달빛을 향하여 노를 저어 가다가 기진맥진하여 노를 놓고 뗏목 위에 쓰러져 운명을 자연에 맡긴 상태였다. 며칠 동안 쌀쌀한 북동풍과 호류에 떠밀려 여서도(麗瑞島)에 가까워졌다. 다행히 여서도민(麗瑞島民)에게 발견되어 가까스로 구출되어 주민들에게 문자와 예절을 가르치기 거의 일 년 일 때 이 소문이 청산도에 퍼졌다.

이 때 청산도 청계리의 동유(洞儒)이며 유력자인 지문여(池文汝)씨가 김류 선생의 명성을 듣고 풍조(風調)한 일기를 택하여 김류 선생을 청계리로 모셔왔다. 지문 여씨는 김류 선생의 건강 회복에 극진예접(極盡禮接)하며 교유담소(交遊談笑)해보니 과연 거유(巨儒)임에 감탄하고는 사숙(私塾)을 신설하여 우선 지씨 근족(池氏近族)의 자실위주(子室爲主)로 교학을 개시했다.

김류 선생을 재취(再娶)하는 등 분외(分外)의 각별한 대우를 계속하니 김류 선생도 타에 여념이 없이 교도(敎導)에 열중하였다.

이러한 사실이 전 청산(全靑山)에 알려져 매일 책상을 짊어지고 배우려 모여들어 사숙을 확장 증설하여 많은 문하생을 배출하였다. 또 사숙을 각 리(里)로 확산하되 문하생 중에서 실력 있는 자들을 각 리 사숙의 훈장(訓長)으로 진출시켜 교훈하니 청산도 내에 문맹 남자가 거의 없게 되어 웬만한 남자치고 한시 한두 수쯤은 의례 읊어 "청산 가서는 글자랑 마라"는 말이 생겼다고 한다.

선생은 1884년 4월20일 향년 76세로 청계리에서 서거(逝去)했다. 문하생들이 장례(葬禮)로써 선생의 향리 여천군 귤동(麗川郡橘洞)에 운구안장(運柩安葬)하였고 1892년 중구일(重九日)에 문하생 김락인 외 43명이 상의 작계(作契)하여 매년 3월 3일 강신(講信)하면서 은의금(恩義金)을 모아 제위답(祭位畓) 3두 3승락을 매입했다.

1897년 봄에 부흥리에 숭모사라는 제실을 마련하여 청년자제들의 강학당(講學堂) 겸 귤은 선생의 제각(祭閣)으로 삼아 매년3월 3일에 향제(享祭)해 오다가 1900년부터 굴은 선생의 문하생으로 후진교육에 유공(遺功)이 현저한 15위를 종향(從享)으로 추가 배향하여 향제하고 있다.

선생의 저서로는 귤은재집이 있고 시문집으로 1901년에 후계 김도희 외 수명이 사권이책인본(四卷二冊印本)으로 발행했는데 시(詩), 잡저(雜著), 서(序), 기(記), 발(跋), 명(銘),제문(祭文), 가행록(家行錄) 및 부록 등이 수록돼 있다고 한다. 지금까지도 청산 가서 글자랑 마라는 말이 전해오고 있다.

마광남  wd341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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