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지는 우리 것] 마광남 주주통신원

우리는 역사에서 잊을 수 없는 것 중 하나가 임진왜란일 것이다. 이 전쟁에서 우리의 지역도 예외는 아니었다. 7년 동안 있었던 이 전쟁 중 우리의 군(郡)인 금당도(金堂島) 앞바다에서의 전투에 대해서 말해보려고 한다.

무술년(戊戌年, 1598년) 7월 18일 적선 백여 척이 녹도(鹿島,고흥)쪽으로 침범해 온다하기로 공과(이순신) 도독이(진린) 각각 전선을 거느리고 금당도(金堂島)에 이르니 다만 적선 두 척이 우리를 보고 달아날 뿐이므로 공과 도독은 하룻밤을 지나고 이내 돌아오며 공은 녹도만호 송여종(宋汝悰)을 남겨두고 배 여덟 척으로 절이도(折爾島, 거금도)에서 복병하게 하고 도독도 전선 20척(혹은 30척)을 남겨두어 사변에 대비하도록 하였다.

1598년 7월24일 공은 도독을 위하여 술자리를 열고 한창 취한 판인데 도독 부하로서 천총(千摠)벼슬에 있는 어떤 자가 절이도(折爾島, 거금도)로부터 와서 말하기를 오늘 새벽에 적을 만났는데, 조선수군들이 모조리 다 잡고 명나라 군사들은 풍세(날씨)가 순조롭지 않아서 싸우지 못했습니다.

승전을 보고하는 자리에는 진린(陳璘)도 함께 있었다. 도독이 크게 성이 나서 끌어 내리고 호령하며 술잔을 던지는 등 안색이 달라지므로 이순신이 그 뜻을 알고 노함을 풀어주었다. 대감은 명나라 대장으로 여기에 와서 왜적을 무찌르는 것입니다, 이곳 진중의 모든 승첩이 바로 대장의 승첩인 것이요. 우리가 베어온 적의 머리들을 전부 대감에게 드릴 것이니 대감이 여기 온지 몇 날도 안 되어 황제에게 공로를 아뢰면 얼마나 좋겠소. 라고 하자 도독이 크게 기뻐하며 공의 손을 잡고서 내가 본국에서부터 장군의 이름을 많이 들었더니 과연 거짓이 아니었다고 하였다.

이 전투에서 노획한 것은 왜선 6척과 수급(적의 머리) 69개의 전과를 올렸다. 이후 진린(陳璘)이 이순신을 부를 때는 이야(李爺)라고 불렀다. 야(爺)는 중국 사람들이 어른을 부르는 최고 존칭어다. 아버지 이상의 존칭이며 현신(現神), 즉 살아있는 신이라는 표현이다.

이러한 금당도의 전투내용을 거금도가 보이는 쪽에 안내판을 설치하여 관광자원과 후대에 교육의 장으로 삼는 것은 어떨까? 아름다운 비경과 함께라면 더 좋을 것 같다.

한편 왕조실록의 기록을 보면 금당도(金堂島)에는 청낭간(靑琅玕)이라는 옥과 비슷한 고운 돌이 있어 이것을 임금에게 진상했다는 기록이 있다.(세종 13년 신해(1431,선덕 6, 6월13일)

전라도 처치사가 장도(場島), 절이도(折爾島,거금도), 덕구도(德仇島, 덕우도?) 등에서 얻은 청낭간(靑琅玕) 59매(枚)를 올리므로, 주운 사람 6명에게 각각 쌀과 콩 4석을 하사하였다는 기록으로 볼 때 진귀한 돌이 있었던 것 같다. 이 낭간은 원래 아름다운 돌로 빛이 푸른 옥[靑玉]과 같은데, 대나무는 이와 비슷하므로 청낭간 또는 낭간이라고도 한다.

두보(杜甫)의 정부마댁연동중(鄭駙馬宅宴洞中)에 주인집 어둑한 골짜기에 옅은 안개 끼었는데, 손님 머무는 여름 대자리는 푸른 낭간 같아라.〔主家陰洞細煙霧 留客夏簟靑琅玕〕 라는 시 구절이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에는 지금의 수석 이상으로 귀하게 여겼기에 임금께 진상까지 하였다고 본다. 지금은 그러한 진귀한 것을 찾을 수는 없는가 모르겠다.

마광남  wd341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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