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 돌아보니 끝없는 배움의 기회

30살부터 10년 동안 내가 한 일은 병원을 드나든 것뿐이었다. 암을 이겨내기 위해 치료를 받으면서 면역력이 떨어져 후유증으로 따라오는 온갖 질병에 시달려야 했다. 지나가는 바람 한줄기에도 독감을 앓았고, 10분을 서 있기 힘들 정도로 힘이 부족했다. 한여름 솜버선과 솜이불 속에서도 손발 냉증으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하루에도 몇번씩 의식을 잃을 정도여서 이웃 친구가 수시로 다녀갔다.

주치의가 내 삶의 기간을 3년이라고 선포했기에 가족들은 모두 숨을 죽이고 눈치만 보고 있었다. 3년이 지나며 ‘어, 괜찮으려나?’, 5년이 지나니 ‘살아날 수가 있나 보다’, 7년이 지나자 ‘휴, 안정권에 들어선 것 같다’며 그제야 서로 눈길을 마주칠 수 있었다.

우린 차를 가질 수 있는 형편이 안 되었기 때문에 문밖 외출이란 건 생각할 수도 없었고 내가 움직이려면 언니가 차를 보내줘야 했다. 하루는 언니가 남편에게 미안해하며 하던 말을 들었다. “윤 서방, 젊은 남자가 어찌 이렇게 살아가겠나? 이제 내 동생 버리게.” 우리 부부는 동갑내기로 대학에서 만나 결혼을 했고 양가 부모님의 고향이 같아 문화의 공통점이 많았다. 하지만 남편은 내 손을 꼭 잡고 “목 윗부분만 살아도 좋으니 꼭 살아야 해”라고 해 둘이 참 많이 울었다.

우리 아이들은 다른 아이들처럼 엄마에게 떼를 쓴 적이 한번도 없었다.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말 안 들으면 엄마 또 아파서 병원 가게 된다”고 말했다. 어른들은 한번 얘기하지만 아이들은 수십번 들었을 테니 얼마나 기죽어 지냈을까. 큰아이 장가보내면서 착한 아이로 자라준 게 고마운 마음보다 미안한 생각이 먼저 들었다.

이제 아들은 39살, 딸은 37살이 되었다. 30~40살 10년 동안의 투병기간과 40~50살 10년 동안의 회복기간을 지나 60살이 넘은 요즘 맘과 몸이 편안해져 주변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길가에 보자기 펴놓고 손수 농사지어 가지고 나오신 할머니의 나물이랑 고추, 당근을 보며 새삼 인생의 끝없는 배움을 느끼게 된다.

한흥옥  hani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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