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를 건너 이어지는 북로군정서 창설의 역사

110년 전의 역사가 다시 살아났다. 1911년 일제에 저항하기 위해 무장투쟁을 선택하고 고향을 떠난 서일이 두만강을 건너 처음 만난 사람이 봉오동을 무장독립군 기지로 건설하고 있던 최운산 장군이다. 북간도 봉오동에서 처음 만난 최운산 장군과 서일 총재는 서로의 의기를 알아보았고 그 자리에서 무장투쟁을 결의하였다. 서일 총재는 최운산 장군이 내어준 덕원리(서대파)에 머물며 학교를 열었고, 대종교인들을 이끌었다. 1919년 3.1혁명이 일어나자 최운산 장군의 지원으로 북로군정서를 창설하고 서대파를 무장투쟁의 근거지로 삼았다.

이 깊은 인연의 역사를 가슴에 간직한 채 서로의 존재를 모르던 최운산 장군의 손녀 최성주와 서일 총재의 손자 서만섭이 100년의 세월을 건너 대한민국의 국민이 되어 만났다. 최운산 장군의 아들 최봉우는 1.4후퇴 때 남한으로 내려와 부산에 자리 잡았고, 서일 총재의 아들 서윤제는 하얼빈에서 살았다. 중국과 수교 이후 하얼빈에 살던 서윤제의 아들 서만섭이 한국에 나와 정착했다. 얼마 전에야 서일의 손자가 한국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나는 그가 살고 있는 인천으로 달려갔다.

서만섭 씨는 올해 94세다. 두 장군 할아버지들의 역사를 잘 아는 그는 최운산의 손녀가 온다니 문밖에 나와 기다리며 반갑게 맞아주었다. 안타깝게도 귀가 잘 들리지 않아 필담으로만 대화했지만 아직은 기억력도 좋고 대화에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노년의 그는 마음이 급했다. 북로군정서의 창설자 서일의 역사가 부하인 김좌진의 유명세에 가려져 있음을 안타까워하며 자신이 살아있는 동안 서일 총재와 북로군정서의 역사를 바로잡고 싶다고 했다.

최운산 장군의 손녀 최성주와 서일 총재의 손자 서만섭 씨
최운산 장군의 손녀 최성주와 서일 총재의 손자 서만섭 씨

그도 할아버지의 역사를 기억하고 제대로 밝히려고 노력하고 있었다그동안 역사에 가려져 있는 선조들의 무장투쟁사를 자신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찾아가고 있던 두 집안의 후손이 우연히 그 길에서 함께 만난 것이다. 그 사실만으로도 역사적인 의미가 있다 생각했다.

그를 만나 최운산 장군과 서일 총재의 관계에 대해 알려지지 않은 몇 가지 사실을 더 확인할 수 있었다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서일의 직계 후손인 그가 자신의 가족사를 통해 "최운산 장군과 서일 총재가 손잡고 북로군정서를 창설했다"는 내용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일찍이 봉오동 신한촌을 건설하고 무장세력을 양성하고 있었으며, 1912년 봉오동사관학교를 창설해 독립군을 양성하던 최운산 장군은 애국청년들의 숫자가 많아지자 봉오동으로 모여든젊은이들을 모두 독립군으로 훈련하기 위해 1915년 봉오동 숲을 벌목해 연병장을 건설했다. 또한 벌목한 나무로 연병장 둘레에 대형 막사 세 동을 지었다. 그리고 토성을 쌓아 대규모 군사기지를 건설했다. 봉오동을 무장독립군기지로 요새화한 것이다.

1919년 3.1 독립선언 이후 수많은 청년들이 북간도로 넘어왔다. 독립군 지원자들이 많아 봉오동사관학교의 수용 인원이 넘어섰다. 본격적으로 일본군과의 전쟁을 준비하던 최운산 장군은 자신을 버리고 독립군이 되고자 전국에서 모여온 귀한 청년들을 모두 정예독립군으로 키워내기로 결정하고 봉오동에서 멀지 않은 곳에 새 부대를 창설했다대종교의 조직력을 바탕으로 무장투쟁을 준비하던 서일과 최운산은 서대파를 또 하나의 독립군기지로 만들었다.

최운산 장군은 자신의 소유지 서대파를 북로군정서 주둔지로 내어놓았고, 서대파에서 가까운 십리평에 사관연성소를 창설해 훈련이 안 된 지원자들을 모두 독립군으로 양성했다그곳으로 모여온 애국청년들에게 숙식과 군복을 제공하는 동시에 군자금을 마련해 무기를 제공했다.  이 사관연성소의 교장이 김좌진이었다. 당시 1차세계대전이 끝나고 귀국길에 올랐던 체코군단이 블라디보스톡에 주둔하고 있었다. 최운산 장군은 무기가 필요 없어진 체코군으로부터 대량의 신형 무기를 구입해 봉오동으로 가져왔다.

3.1 혁명 후 대부분의 독립군 단체에 병사들이 늘어났지만 모두 군자금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최운산은 여러 단체에 주둔지와 무기, 군자금를 제공하고 통합을 제안했고, 북간도 독립군 단체들이 봉오동에 모여 장기간의 통합 논의를 거쳐 5월 19일 "대한북로독군부"로 대통합을 이루게 된다서대파를 비롯해 대감자 등 봉오동 산줄기를 따라 연결되는 각 지역에 대한광복단, 신민단 등 여러 독립군부대가 부대별로 각각 주둔했다그중 가장 규모가 크고 조직력을 갖춘 부대가 봉오동의 주력부대 대한군무도독부였고, 또 하나 최운산 장군이 서일 총재와 함께 창설한 북로군정서였다.

 

백포 서일과 최운산 장군
백포 서일과 최운산 장군

손녀인 나는 최운산 장군의 부인 김성녀 여사의 증언과 기록으로 간도 제1의 거부 최운산 장군이 거대한 재산을 북로군정서 창설에 투여한 사실을 오래 전부터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최운산 장군과 북로군정서의 관계를 설명하는 사료가 부족해 지금까지 구체적으로 재조명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언젠가 새로운 사료가 나와 북로군정서 창설의 역사가 재정립 될지 모른다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었다

혹시라도 서일 총재의 후손을 만나게 되면 북로군정서 창설에 대한 내용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만을 품고 있었는데 정말 그랬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1911년 서일 총재가 무장투쟁을 꿈꾸며 친구 현천묵의 가족과 함께 두만강을 건너 북간도에 도착했을 때 처음 만난 사람이 최운산 장군 이었다는 사실이다당시 두만강을 건너 얼마 지났을 때 웬 장정들이 나타나 일행을 어디론가 데려갔다고 한다. 강도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덩치도 크고 위압감을 느낄 만큼 힘센 무인처럼 보이는 이들이었다.

밀정들이 암약하고 있으니 봉오동 주변에서는 외지인에 대한 검색이 철저했다. 가져간 짐을 모두 살펴본 그들은 서일 일행을 최진동 최운산 형제 앞으로 안내했다그런데 놀랍게도 거기서 고향 친구 안무를 만났다. 독립운동을 하겠다고 자신보다 먼저 고향을 떠나 북간도로 건너갔던 안무가 최운산 형제와 함께 무언가를 논의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친구 안무의 보증으로 서일에 대한 의심을 풀고 서일의 역량과 인품을 알아본 최운산 장군이 즉시 서대파에 서일과 현천묵 두 가족의 거주지를 마련해주었다. 서일의 후손들은 가족사를 통해 이 사실을 오래전부터 잘 알고 있었다.

서일의 독립운동에 대한 열망을 확인한 최운산 장군은 인사를 하고 떠나려는 그를 붙들어 그 자리에서 편지를 하나 써주며 편지와 함께 덕원리로 보냈다. 그곳이 바로 서대파다. 자신의 소유지 덕원리의 관리인에게 서일의 가족을 보내니 잘 정착할 수 있도록 보살피라는 내용이었다서대파는 훗날 최운산과 서일이 함께 북로군정서를 창설한 지역이다. 서일 총재가 1911년부터 대종교인들을 이끌며 었던 곳이라 무장독립군부대 북로군정서의 주둔지로 서대파를 선택했고 서대파에서 가까운 십리평이 사관연성소 자리로 선택되었던 것이다.

최운산 장군의 집에서 친구 안무를 만난 서일과 현천묵이 재회의 기쁨을 나누며 최진동 최운산 형제와 대화를 하던 때 마침 최 장군의 집으로 찾아온 사람들이 있었다. 중국인 상인처럼 보이는 그들은 최운산 장군이 무기를 구입하러 러시아로 보냈던 사람들이었다그들이 임무를 마치고 돌아와 최 장군에게 무기 구입 상황에 대한 보고를 하는 장면을 서일이 봉오동에 도착한 첫날 우연히 목격했던 것이다. 최운산 장군은 봉오동에서 무장군인들을 양성하고 있으며, 봉오동사관학교 창설을 위해 무기 구입하고 있음을 서일에게 설명해주었다.

그렇게 시작된 인연이 평생 동지로 다져졌고 후일 북로군정서를 창설할 때 최운산 장군이 막대한 재산을 처분해 군자금으로 내어놓을 만큼 서일 총재에 대한 신뢰가 깊었다이미 알고 있었던 내용이지만 서일 총재의 후손으로부터 그 이야기를 직접 들으니 110년의 세월을 건너온 깊은 인연의 열쇠로 역사의 매듭 한 가닥이 풀어지기 시작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운산 장군의 손녀와 서일 총재의 손자가  110년 전의 선조들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다.

북간도 무장독립운동의 역사를 바로 알리라고 후손들을 불러내신 두 분의 목소리를 다시 듣는다. 후손인 우리가 가족사를 통해 알고 있는 것을 함께 모아서 정리해 나가기로 다짐도 했다. 아흔이 넘은 나이에 북간도 무장독립전쟁의 역사를 바로잡겠다고 애쓰는 서일 총재의 손자 서만섭 씨의 손을 잡고 함께 걸어야겠다.

넘어야 할 산도 많고 건너야 할 강도 여럿이다. 역사는 기억하는 것이다. 잊지 않고 있으면 언젠가 어느 곳에선가 스스로 진실을 드러낸다는 것을 다시 생각한다.

 

편집 : 최성주 객원편집위원, 양성숙 편집위원

최성주 객원편집위원  immacolet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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