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합니다] 할머니 기일에 드리는 손녀의 글

할머니 김성녀(1893~1975) 여사는 독립군의 후손이자 아내이자 그 자신 독립운동가였다. 1960년 찍은 가족사진, 뒷줄 왼쪽부터 큰오빠 최윤주·아버지 최봉우·어머니 차연순·둘째동생 최형주, 앞줄 왼쪽부터 큰할아버지 최진동 장군의 손녀 최영미(미국 거주)·최성주(필자)·할머니 김성녀·둘째오빠 최흥주.
할머니 김성녀(1893~1975) 여사는 독립군의 후손이자 아내이자 그 자신 독립운동가였다. 1960년 찍은 가족사진, 뒷줄 왼쪽부터 큰오빠 최윤주·아버지 최봉우·어머니 차연순·둘째동생 최형주, 앞줄 왼쪽부터 큰할아버지 최진동 장군의 손녀 최영미(미국 거주)·최성주(필자)·할머니 김성녀·둘째오빠 최흥주.

봉오동 기지 만든 최운산 장군의 부인
독립군의 딸로 14살때 결혼해 안살림
‘재봉틀 부대’ 꾸려 수천명 군복 제작
애국청년들 식자재 마련·공급 책임도
“지금껏 유공자 서훈 못받아 부끄러워”

머잖아 3·1절과 할머니 김성녀 여사의 기일이 돌아온다. 1975년 3월3일, 내가 고3 새학기를 시작하던 날, 평생 봉오동·청산리 무장독립전쟁의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 애쓰셨던 할머니께서 끝내 남편 최운산 장군의 서훈을 보지 못한 채 돌아가셨던 날이다.

최운산 장군은 그 2년 뒤인 1977년에야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았다. 장남인 아버지(최봉우)를 비롯해 우리 가족은 그때 할머니 생각에 오래도록 가슴이 아팠다. 다만 할아버지 최 장군이 뒤늦게나마 서훈을 받았으니, 이제 매듭이 하나 풀렸으니, 나머지는 학자나 전문가의 몫이라며 돌아보지 않기로 했다.

그러다 2015년 7월 4일 아버지(2001년 작고)의 기일에 모인 5남매는 ‘우리 집안의 역사가 곧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의 중요한 흐름이니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의기투합했다. 그해 9월 처음 방문한 북만주 봉오동(현 중국 지린성 왕칭현)에서 우리는 1997년 선친께서 찾아놓은 증조부 최우삼의 묘소를 확인할 수 있었다.

2016년에는 일찍이 구한말 고종이 임명한 옌볜의 도태(道台·도지사)를 지내고, 독립군 지도자 ‘진동·운산·치흥·명철’ 4형제를 키워낸 증조부의 묘소에 비석을 세우고자 했던 선친의 약속을 대신 지켰다.

 

2016년 10월 국내 후손들이 북만주 봉오동마을 뒷산에 있는 증조부 최우삼의 묘를 찾아 천신만고 끝에 기념비를 세웠다. 사진은 최우삼의 둘째 아들인 최운산 장군과 김성녀 여사 부부의 손주들로, 오른쪽부터 최윤주·흥주·성주(필자)·형주·은주씨이다.
2016년 10월 국내 후손들이 북만주 봉오동마을 뒷산에 있는 증조부 최우삼의 묘를 찾아 천신만고 끝에 기념비를 세웠다. 사진은 최우삼의 둘째 아들인 최운산 장군과 김성녀 여사 부부의 손주들로, 오른쪽부터 최윤주·흥주·성주(필자)·형주·은주씨이다.

이를 계기로, 30여년 언론 분야 시민사회 활동을 핑계로, 가족사를 외면해온 나 역시 뒤늦게 만주무장독립전쟁사를 바로잡는 일에 뛰어들어 역사를 다시 공부하고 있다. 특히 역사학계가 정리해놓은 봉오동 독립전쟁사와 김성녀 여사의 증언이 충돌하는 부분이 많았다.

지난 몇 년간 사료 조사를 통해 재확인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사실 가장 중요한 기준은 할머니가 생전에 들려준, 고지식했던 당신들의 삶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100년 전의 사료들이 당신이 남긴 기록과 증언이 옳다는 것을 매번 증명하고 있다.

이 과정을 통해 새삼스럽게 깨달은 것은 봉오동 독립군기지와 할머니의 활약상이다. 남편 최운산 장군이 봉오동으로 모여드는 애국청년들을 훈련시켜 정예독립군으로 양성할 때 그는 그들을 먹이고 입히며 보살핀, ‘만주 독립군의 어머니’였다.

2016년 발족한 최운산장군기념사업회 이사를 맡고 있는 필자는 ‘봉오동대첩의 숨은 영웅’인 조부 최운산과 할머니 김성녀의 행적을 발굴해 2000년 책을 펴냈다. 필로소픽 제공
2016년 발족한 최운산장군기념사업회 이사를 맡고 있는 필자는 ‘봉오동대첩의 숨은 영웅’인 조부 최운산과 할머니 김성녀의 행적을 발굴해 2000년 책을 펴냈다. 필로소픽 제공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난 할머니는 이미 독립군의 딸이었다. 그가 어린 시절 독립운동을 하고자 러시아로 건너갔던 아버지와 오빠는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 할아버지 최운산 역시 청나라와 국경분쟁 때 무력 충돌을 불사했던 민족주의자 최우삼의 둘째 아들이었다. 그런 두 사람의 혼인은 운명으로 맺어진 역사적 부름이 아니었을까.

14살이던 1907년 혼인과 함께 신한촌 봉오동 건설에 참여한 할머니는 남편이 마적으로부터 조선 동포들을 보호하고자 100여명의 봉오동 사병부대를 창설하자 군부대의 안살림을 책임졌다. 애국청년들이 수백명으로 늘어나 봉오동 숲을 벌목하고 새로운 연병장을 만들 때도, 베어낸 나무로 병사들이 머물 대형 막사를 지을 때도, 자택 둘레에 거대한 토성을 쌓고 사방에 대포를 배치해 1915년 본격적인 독립군기지를 완성할 때도 매순간 함께하며 아버지와 오빠를 돌보듯이 독립군들의 일상을 보살폈다.

할머니는 북간도와 연해주의 모든 독립군이 힘을 합쳐 통합독립군단 ‘대한북로독군부’를 조직할 때 8대의 재봉틀을 마련해 수천 독립군의 군복을 제작했던 ‘바느질 부대의 대장’이었다. 군복을 넉넉히 만들어둔 덕분에 봉오동전투 때 허수아비에게 입혀 일본군의 눈에 잘 보이도록 산 정상 쪽에 배치하는 위장작전도 쓸 수 있었다. 또한 봉오동 주변에 분산 주둔한 각 연대로 간장·된장·고추장까지 모든 식자재를 아낌없이 배급한 ‘손 큰 병참대장’이었다.

봉오동에는 어떤 위기에도 물러섬 없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던 ‘여장부’ 김성녀와 부녀자들이 있었다. 1919년 3월26일과 5월18일 최 장군과 형제들이 왕청현 백초구에서 만세 시위를 주도했을 때도 할머니는 여성들을 이끌고 동참했다.

“우리 독립군에게 밥을 해주시고, 독립군들의 군복을 지어주셨고, 독립군들의 모든 살림살이를 도맡아 해주신 이 분이야말로 진짜 훈장을 받으셔야 할 독립군이십니다.” 1960년대 초, 최 장군의 부하였던 한 독립군이 할머니를 찾아와 인사를 드리며 한 말이다.

1920년 봉오동 전투의 주역인 홍범도(왼쪽) 장군과 최진동(오른쪽) 장군이 1922년 1월 모스크바 극동민족대회에 참석한 모습이다. 지난해 최진동의 유일한 생존 후손인 최경주(89)씨의 증언으로 처음 사진이 확인됐다. 최진동은 필자의 증조부인 최우삼 선생의 4형제 중 맏이이고, 조부 최운산 장군의 형이다. 최진동은 일본헌병대의 비행장 터를 제공하라는 요구를 거절하다 끌려가 고문 후유증으로 1941년 11월 별세했다. 반병률 교수 제공
1920년 봉오동 전투의 주역인 홍범도(왼쪽) 장군과 최진동(오른쪽) 장군이 1922년 1월 모스크바 극동민족대회에 참석한 모습이다. 지난해 최진동의 유일한 생존 후손인 최경주(89)씨의 증언으로 처음 사진이 확인됐다. 최진동은 필자의 증조부인 최우삼 선생의 4형제 중 맏이이고, 조부 최운산 장군의 형이다. 최진동은 일본헌병대의 비행장 터를 제공하라는 요구를 거절하다 끌려가 고문 후유증으로 1941년 11월 별세했다. 반병률 교수 제공
지난해 발굴된 1922년 1월 모스크바 극동민족대회 때의 여운형(왼쪽) 선생 사진. 최진동 장군의 후손이자 필자의 당고모 최경주씨는 가운데 인물이 최운산 장군이라고 증언했다. 최운산은 1924년부터 3년간을 비롯해 평생토록 모두 6차례나 옥살이를 겪어 형과 마찬가지로 고문 후유증으로 숨졌다. 일본 유학중 학도병 징집에 몰려 귀향한 아들 최봉우(필자의 부친)을 피신시킨 뒤 체포당했던 최운산은 아들이 있는 평양으로 왔으나 끝내 회복하지 못한채 1945년 7월 광복 직전 별세했다. 반병률 교수 제공
지난해 발굴된 1922년 1월 모스크바 극동민족대회 때의 여운형(왼쪽) 선생 사진. 최진동 장군의 후손이자 필자의 당고모 최경주씨는 가운데 인물이 최운산 장군이라고 증언했다. 최운산은 1924년부터 3년간을 비롯해 평생토록 모두 6차례나 옥살이를 겪어 형과 마찬가지로 고문 후유증으로 숨졌다. 일본 유학중 학도병 징집에 몰려 귀향한 아들 최봉우(필자의 부친)을 피신시킨 뒤 체포당했던 최운산은 아들이 있는 평양으로 왔으나 끝내 회복하지 못한채 1945년 7월 광복 직전 별세했다. 반병률 교수 제공

하지만 82살로 돌아가실 때까지 나는 할머니가 옛 일들을 자랑하거나 부풀려 얘기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저 담담히 자신의 몫을 설명하셨을 뿐이다. 그래서인지 손녀인 나조차도 10대부터 50대까지 인생의 황금기에 봉오동의 중심을 지키며 최운산 장군의 독립전쟁을 완성해낸 그 긴 세월, 당신의 헌신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었다.

이제야 할머니의 말씀을 바탕으로 봉오동의 역사를 다시 쓰면서, 나는 당신의 이름 앞에 독립군이란 호칭을 붙이는 것이 마땅하다는 생각을 한다. 봉오동의 주민은 대부분 독립군과 그 가족이었다. 시기에 따라 인원이 많고 적음이 있었고 독립군들이 여러 지역으로 흩어지고 머물기도 했지만 봉오동은 언제나 북간도 독립군과 무장투쟁의 중심이었다. 그리고 봉오동의 중심에 할머니가 있었다. 아쉽게도 그 김성녀 여사는 아직까지 독립운동가로 서훈을 받지 못하고 있다. 부끄러운 일이다.

<한겨레>가 어언 33살 청년기를 맞았습니다. 1988년 5월15일 창간에 힘과 뜻을 모아주었던 주주와 독자들도 세월만큼 나이를 먹었습니다. 새로 맺는 인연보다 떠나보내는 이들이 늘어나는 시절입니다. 지난해부터 코로나19 탓에 이별의 의식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기억합니다’는 떠나는 이들에게 직접 전하지 못한 마지막 인사이자 소중한 추억이 될 것입니다. 부모는 물론 가족, 친척, 지인, 이웃 누구에게나 추모의 글을 띄울 수 있습니다. 사진과 함께 전자우편으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한겨레 주주통신원(mkyoung60@hanmail.net 또는 cshim777@gmail.com), 인물팀(People@hani.co.kr).
<한겨레>가 어언 33살 청년기를 맞았습니다. 1988년 5월15일 창간에 힘과 뜻을 모아주었던 주주와 독자들도 세월만큼 나이를 먹었습니다. 새로 맺는 인연보다 떠나보내는 이들이 늘어나는 시절입니다. 지난해부터 코로나19 탓에 이별의 의식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기억합니다’는 떠나는 이들에게 직접 전하지 못한 마지막 인사이자 소중한 추억이 될 것입니다. 부모는 물론 가족, 친척, 지인, 이웃 누구에게나 추모의 글을 띄울 수 있습니다. 사진과 함께 전자우편으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한겨레 주주통신원(mkyoung60@hanmail.net 또는 cshim777@gmail.com), 인물팀(Peop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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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 김동호 편집위원

최성주 객원편집위원  immacolet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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