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중한 생명길', '행복하길'을 걸으며

416 세월호 참사는 대한민국 모든 시민에게 한국전쟁 다음으로 깊은 트라우마를 남겼다. 문제는 그 다음에 있다. 70년도 더 지난 오늘날 한국전쟁이 역사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잘 알지 못하듯이 416 참사 역시 우리 사회에 어떤 충격과 의미를 던져주었는지 우리는 아직 잘 모른다. 그렇게 무심하게 8년 세월이 흘러갔다.

​희생 당시 고2였던 아이들이 지금 살아 있다면 스물다섯 살 파릇하게 피어날 젊음 그 자체였을 텐데 속절없이 가슴 속 그리움만 아프게 더할 뿐이다. 세월호 참사는 우리교육을 망치로 내려친 사건이다. 그러함에도 8년이 지난 우리교육은 요지부동이다. 거기에 깊은 절망과 슬픔이 있다.

​꽃 같은 아이들이 250명이나 죽어갔는데 우리교육은 왜 변화의 미동도 보이지 않았을까? 지시와 보고 형식의 공문이 오늘도 학교현장을 뒤덮고 관료행정은 여전하다. 오늘도 어제처럼, 그리고 내일도 오늘처럼 학교는 관행을 답습할 것이다. 교육의 본질인 교사와 학생의 '자율성'을 존중하는 교육행정을 찾아보기란 참으로 요원하다. 얼마나 더 많은 희생이 있어야 우리교육은 변화할까? 아니, 변화의 작은 움직임을 보일까? 변화를 위한 작은 움직임! 그것이 세월호 참사가 우리에게 남겨준 교훈인데...

416 참사는 그나마 <416 민주시민교육원>을 탄생시켰다(출처 : 하성환)
416 참사는 그나마 <416 민주시민교육원>을 탄생시켰다(출처 : 하성환)

이오덕 선생의 일갈처럼 우리교육은 '병든 교육'이자 교육의 탈을 쓴 '죽음의 교육'이다. 세월호 참사를 생각할 때마다 부끄럽다. 250명 꽃 같은 목숨들이 허망하게 죽어갔음에도 우리사회는 성찰이 없다. 우리교육은 변화도 없다. 2014년 선거에서 진보교육감이 대거 당선된 현상은 변화를 갈망하는'교육민중'의 강렬한 힘이 작용한 때문이다. 그러나 8년이 지난 지금, 우리교육의 기본틀은 여전하다 못해 강고하기 그지없다.

단원고 정문(출처 : 하성환)
단원고 정문(출처 : 하성환)

서해선 선부역에서 내려 큰 길을 건너 좁다란 길을 따라 30분을 걸었다. 눈앞에 고잔동 행정복지센터가 나오고 단원중학교로 가는 길로 이어졌다. 반가웠다. 조금 더 걸어가면 단원고등학교 정문이 나오겠지... 가는 내내 그 숲길이 고즈넉하니 아름다웠다. 단원고 아이들도 이 길을 다녔겠지...

<소중한 생명길>(출처 : 하성환)
<소중한 생명길>(출처 : 하성환)

길 벽면에 벽화와 함께 '소중한 생명길'이라고 적혀 있다. 그리고 '행복하길' 문구를 마주했다. 바로 단원고 가는 길이 '소중한 생명길'이자 '행복하길' 기원하는 길이다.

단원고로 가는 길 중간에 놓인 <행복하길>(출처 : 하성환)
단원고로 가는 길 중간에 놓인 <행복하길>(출처 : 하성환)

2005년에 건립된 단원고 정문에 섰다. 단원중학교 어린 학생 두 명이 교문 앞에서 장난을 치고 있다. 416 참사 당시, 저 아이들은 고작 대여섯 살 정도였겠지... 형과 누나들이 희생하면서 남긴 흔적을 저 아이들도 언젠간 차츰차츰 알아가겠지. 그렇게 위안하면서 다시 15분을 더 걸었다.

<416 민주시민교육원> 울타리에 내걸린 세월호를 상징하는 노랑 바람개비(출처 : 하성환)
<416 민주시민교육원> 울타리에 내걸린 세월호를 상징하는 노랑 바람개비(출처 : 하성환)

'416 민주시민교육원' 옆 노랑 바람개비가 눈에 들어왔다. 속절없이 지나간 세월처럼 노랑 바람개비가 돌고 있다. 저 바람개비는 알고 있을까? 왜 아이들이 꽃 같은 나이에 스러졌는지 알고 있을까?

​참사 이후 단원고 재학생 학부모들이 학업에 방해된다며 단원고 '416 기억교실' 이전을 촉구했다. 참으로 무서운 세상인심이다. '416 기억교실'을 단원고 그 장소에 그대로 보존했더라면 아이들은 더욱 성숙한 어른으로 자랐을 것이다. 아니, 백번 양보해 그놈의 입시현실을 생각해도 아이들 입시학업에 도움이 되었으면 되었지 방해물은 되지 않았으리라!

​고통 속에 처한 세월호 부모들과 이기적인 재학생 일부 학부모 사이에 극심한 갈등이 지속되었을 때 학교 당국은 무얼 했는지 궁금하다. 아니, 관리 감독한다는 도교육청은 무얼 했는지 의아하다. 더구나 진보교육감 시절이 아니던가? 늦은 나이 역사를 공부하기 시작한 나로선 역사 유물과 유적을 왜 지우려하고 왜 이전 당하는 수모를 겪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416 기억교실> 기억관 입구(출처 : 하성환)
<416 기억교실> 기억관 입구(출처 : 하성환)

단원고 교정에 있던 2학년 교실과 교무실 문짝, 칠판, 책걸상을 비롯해 교실 흔적 일체를 그대로 뜯어와 교육지원청에 보존한 모습이 우리가 마주한 '416 기억교실'이다. 그것도 세 번 이전한 결과라고 한다. 대신 교육지원청은 다른 곳으로 옮겼다.

31명 가운데 30명이 희생된 2-7반 교실(출처 : 하성환)
31명 가운데 30명이 희생된 2-7반 교실(출처 : 하성환)

2층 2-7반 교실을 들어선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온통 책상 위엔 추모 유품으로 빼곡하다. 31명 중 단 한 명만 생존한 교실이다. 살며시 추모편지글을 펼쳐서 읽었다. 부끄러움을 고백하기 위해서 멀리서 온 어느 어른이 다짐하면서 쓴 글이다. 그 글을 읽으면서 글쓴이 또한 부끄러웠다. 왜 못난 어른들을 만난 탓에 꽃 같은 너희들이 스러져갔는지 우리사회가 원망스럽다.

이보미 양 책상 추모품(출처 : 하성환)
이보미 양 책상 추모품(출처 : 하성환)

공부도 곧잘 했고 <거위의 꿈> 노래를 잘 불렀다는 이보미 양 책상 추모글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음악 심리치료사가 되어 상처받은 사람들을 음악으로 치유해 주고 싶어 했던 양온유 양 책상 앞에선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선실 바깥 갑판으로 탈출했음에도 선실에서 나오지 못한 친구를 구하기 위해 다시 선실로 들어간 양온유 양! 피아노를 독학으로 배워 교회 찬송가 피아노 연주를 했던 양온유 양! 온유 양 사진 속 모습에서 그리스도인의 향기를 느낀다.

2-2반 회장 양온유 양은 세월호 참사 당시 갑판 위로 탈출하였음에도 다시 친구를 구하러 선실로 들어갔다가 살아 돌아오질 못했다.(출처 : 하성환)
2-2반 회장 양온유 양은 세월호 참사 당시 갑판 위로 탈출하였음에도 다시 친구를 구하러 선실로 들어갔다가 살아 돌아오질 못했다.(출처 : 하성환)

그래! 온유야, 네가 지상에서 하지 못한 일을 우리가 마저 하고 갈게! 다시 하늘나라에서 만나면 다 이야기해 줄게! 부디 천국에선 행복하게 지내길 기도할게.

구보현 양 어머니가 딸을 슬픔 속에 그리워하며 쓴 글(출처 : 하성환)
구보현 양 어머니가 딸을 슬픔 속에 그리워하며 쓴 글(출처 : 하성환)

먼저 간 사랑스러운 단원고 아이들 앞날에 신의 은총이 함께 하길 기원하면서 그리움과 슬픔으로 오늘도 마음이 아픈 가족들에게 신의 위로가 함께 하길 또한 기원한다. 밤하늘 아름다운 별이 된 너희들을 가슴 한켠에 새기고 화랑 호숫가 세찬 바람을 맞으며 다시 선부역으로 발길을 돌렸다.

편집 :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ethics6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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