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년의 죽음을 슬퍼하며

“하나님이 보내주신 나의 보물 아들아. 자라면서 엄마, 아빠에게 큰 목소리 한번 내지 않고 아무리 돌이켜봐도 엄마, 아빠에게 꾸지람 한번 들은 적 없는 다정하고 착한 내 아들. 네 존재만으로도 그건 우리에게 살아가는 이유이고 희망이었다.”

이 글은 2014년 4월 7일 군대에 갔던 막내이자 외동아들을 잃고 고통과 슬픔 속에 어머니가 쓴 글의 한 대목이다.

2014년은 유독 사고가 많은 한 해였다. 세월호도 2014년에 발생한 참사였다. 세월호 참사는 한국전쟁 다음으로 전 국민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다. 그러나 아직도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 7년이라는 모질고 모진 시간 속에 세월호 부모들이 당하는 아픔과 절망은 상상하기조차 어렵다.

그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기 10일 전 윤일병 사건이 있었다. 아니 2월 18일 전입한 이후 일주일을 빼고 한 달 내내 선임병들의 폭행에 시달렸다. 그러다 4월 6일 쓰러졌다. 개 흉내를 내게 하면서 선임이 뱉은 가래침을 핥게 했고 치약 1통을 강제로 먹였으며 잠을 재우지 않았다.

윤일병이 죽기 이틀 전 엄마는 갈비찜을 한 상태로 통화를 했다. 면회를 가고 싶었지만 “엄마! 오지마!” 라며 강한 어조로 말하는 아들 목소리를 듣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엄마는 면회를 접었다. 그러나 그게 한이 되었다. 윤일병 엄마의 표현대로 “그냥 미친 척하고 면회를 갔어야” 했다. 39살에 얻은 늦둥이 외아들은 영정 사진 속 얼굴 표정만큼이나 순하고 선했다.

“엄마가 다리가 아프다고 하면 누나들보다 먼저 달려와서 정말로 시원하게 아픈 곳을 정확하게 주물러주곤 했던 아들”이었다. “장학금을 받아 학비를 내고 방학이면 하루도 쉬는 날이 없이 개학 전날까지 아르바이트를 해서 학비, 생활비는 물론이고 엄마, 아빠에게 두둑한 용돈을 챙겨줬던 아들”이었다.

법 없이도 살아갈 수 있는 그 선하고 순수했던 아들이 군대에 가서 맞아 죽은 것이다. 사고 당일 군당국은 음식을 먹다 목에 걸려 병원으로 이송되었다고 했다. 70-80년대 군의문사도 아니고 21세기 한국 군대의 또 다른 일면이었다.

70년대 박정희 정권 시절엔 신체 건장한 현역 장정들이 매년 1,000명씩 죽어 나갔다. 80년대 전두환 정권 시절에도 매년 700명이나 되는 현역 청년들이 죽어 나갔다. 매년 소규모 국지전투가 벌어진 것도 아닌데 신체 강건한 청년들이 군대에서 수백 명씩 죽어 나갔다. NGO 군의문사유가족회가, 그리고 군인권센터가 그냥 생겨난 게 아니다. 군의문사유가족회 어머니들이 국방부 앞에서 외롭게 절규해온 게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더구나 70-80년대 그 시절, 병무청 신체검사에서 현역으로 입영하는 청년은 절반에 불과했다. 지금은 90% 이상이 현역으로 입영한다. 그만큼 그 시절엔 병역 자원이 풍부해 말 그대로 신체 건강한 청년들만 군대에 갔다. 아니 신체 건강한 청년들조차 방위로 빠지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군사독재시절 윗물이 혼탁한데 병무행정이야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그리고 무엇보다 군대 내 의문의 죽음들이 너무도 많았던 시절이었다.

연세대 정성희 학생은 1981년 11월 학내 시위에 참여했다가 경찰에 연행된 지  3일만에  강제로 군대에 끌려갔다. 이른바 <녹화사업>의 희생자가 되었다. 보안사의 감시와 프락치 강요, 그리고  군대 내 구타가 일상이었다.  강제 징집된 지  8개월만인 1982년 7월 전방 철책  야간근무 중 싸늘한 죽음으로 발견됐다.  2020년 11월  14일   마흔넷에 잃은 아들을 여든이 넘어서야 떠나보내는  아버지 정낙헌(82)씨가 아들의 무덤에 흙을 덮어주고 있다.(출처 : 한겨레  장철규 선임기자)
정성희(연세대 영독불계열 1년)는 1981년 11월 학내 시위에 참여했다가 경찰에 연행된 지 3일만에 강제로 군대에 끌려갔다. 이른바 전두환 정권 <녹화사업>의 첫 희생자가 되었다. 보안사의 감시와 프락치 강요, 그리고 군대 내 구타가 일상이었다. 강제 징집된 지 8개월만인 1982년 7월 전방 철책 야간근무 중 싸늘한 죽음으로 발견됐다. 2020년 11월 14일 마흔넷에 잃은 아들을 여든이 넘어서야 떠나보내는 아버지 정낙헌(82)씨가 아들의 무덤에 흙을 덮어주고 있다.(출처 와 해설 : 한겨레 장철규 선임기자)

박정희와 그 양아들 전두환이 저지른 녹화사업이 아니더라도 군의문사가 너무도 많았던 시절이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흑암으로 뒤덮인 절망의 시절이었다. 학교 못지않게 황국신민을 양성했던 일제 황국군대의 악습이 해방 이후에도 대한민국 군대에 뿌리 깊게 온존한 때문이었다. 일본군 장교와 만주군 장교들이 광복군 출신들을 거세한 뒤 국군의 요체가 된 때문이었다. 그렇게 군대에 가서 맞아죽은 청년들이 어디 한둘이었겠는가! 그리고 그 죽음들의 상당수는 자살로 처리되었지만 의문사로 분류되었어야 할 원통한 죽음들이었다.

그러다 87년 6월 민주항쟁 덕분에 90년대엔 300명대로 절반 이상 줄어들었다. 그래도 매년 300명씩 군대에서 신체 건강한 청년들이 죽어나갔다면 그런 군대가 정상일 순 없는 것이다. 소규모 전투가 벌어진 것도 아닌데 매년 수백 명이나 되는 젊은이들이 군대에서 죽어갔다면 어떻게 그게 정상이란 말인가! 1990년대 10년 동안 3,000명에 이르는 청년들이 군대에서 죽어갔다면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한단 말인가!

군대에 자식을 보내는 부모들은 그 정도일 줄은 몰랐을 것이다. 그런 사실을 알고도 사지로 자식을 보냈을 리는 없을 것이다. 아니면 내 자식은 그런 죽음과는 무관할 것이라는 순진한 생각으로 보냈을지도 모른다. 힘없는 서민들이 마음에 품는 마지막 소망처럼!

그러다 김대중 정부 시절 1999년 최의건 이병(서울대 천문학과 3년) 군 사망사고가 발생했다. 최의건 이병은 1999년 3월 20일 어둠 짙은 새벽, 진해 함상 갑판에서 선임병의 쇠파이프에 목을 세 차례 맞고 죽었다. 말문이 막히는 참혹한 사건이 또 발생한 것이다. 밤 하늘 별을 사랑하고 별을 쳐다보는 것을 유달리 좋아해 해군을 자원했던 순수한 청년이었다.

이름자처럼 ‘의롭고 건강하게’ 자라난 최의건 군은 어려서부터 공부를 잘했고 상장도 수없이 타왔다. 그런 착한 아들이 그렇게 허망하게 세상을 떠났다. 사고가 발생하기 보름 전 편지에서 최의건 군은 "의건이라 이름을 지어줘 고맙습니다. 이름처럼 정의를 세우며 살겠습니다"라고 편지에 썼다. 그게 부모가 아들하고 나눈 마지막 편지대화였다.

아버지 최풍식 씨(한신대 총무과장)는 퇴직금 1억 3000만원으로 아들 이름을 따 ‘최의건 장학금’을 만들어 기부했다. 별을 사랑한 스물세 살 아들의 못다 한 삶을 애통해하며 영원히 기억하고자 했다. 그리고 “의건이가 마지막 구타희생자가 되도록 국가 사회와 군대가 노력해 줄 것”을 눈물로 호소했다. 그 사건 이후 2000년대 들어 군 사망사고는 현저히 줄어들었다. 100명 아래로 뚝 떨어졌다. 2010년대 이후엔 70-80명대로 줄어들었다. 그러나 멀쩡한 청년들이 매년 70명 가까이 죽는 게 여전히 우리나라 군대가 마주한 현실이다.

윤일병 어머니 안미자 씨는 사건 직후 어느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소회를 밝혔다.

“군이 사건을 은폐·축소하려 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어요. 내 아들의 죽음으로 군내 가혹행위가 조금이라도 줄어든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계속 문제 제기를 할 겁니다.”

문재인 정부 들어  군인복지강화와 서열해체에 따른 병영선진화,  그리고  사회와 단절된 느낌을 해소하려는  다양한 정책 전환 끝에  군대 내 자살자는 50명대로 현격히 줄어들었다. (출처 :  2019 국방통계연보)
문재인 정부 들어  독일처럼 군옴브즈만 제도를 도입한 것은 아니지만 군인복지강화와 서열해체에 따른 병영선진화, 그리고 사회와 단절된 느낌을 해소하려는 다양한 정책 전환 끝에 군대 내 자살자는 50명대로 현격히 줄어들었다. (출처 : 2019 국방통계연보)

군 사망사고가 1,000명대에서 700명대로 다시 300명대로, 그리고 다시 100명 이하로 줄어들기까지 30년이 넘게 걸렸다. 누군가의 희생 끝에 그 안타까운 목숨들을 딛고 세상은 조금씩 진보했다. 그 원통한 죽음들을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이유이다. 세상은 결코 저절로 좋아지지 않는다.

남은 가족들, 특히 부모들은 황망함 속에서도 아들의 억울한 죽음을 사회적으로 의미 있게 승화시키고자 군 개혁을 촉구했다. 사랑스러운 아들이 어느 날 죽은 이후 부모들은 살아도 산 것이 아니었다. 그 가슴 아픈 일들을 우리가 어떻게 다 가슴에 담을 수 있겠는가! 그 부모와 형제자매들이 겪었을 남모를 아픔을 우리가 어떻게 다 헤아릴 수 있겠는가!

남겨진 부모들은 자녀의 죽음을 두고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고 했다. 아니 살 만큼 살았기에 자녀들의 죽음과 자신을 맞바꾸고 싶다고 절규했다. 살아도 산 목숨이 아니기에 사랑하는 아들과 딸이 죽었을 때 이미 자신들도 죽었다고 탄식했다. 세월호 부모님들이 그렇고 윤승주 일병 부모님이 그러했다. 구의역 김군의 어머니도 그러했다. “아들이 죽으면서 자신도 죽었다”며 “남은 인생은 숨을 쉬지만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삶이 아니라”고 고통을 호소했다.

2016년 5월 28일 퇴근 시간대  2호선 구의역 9-4에서  고장난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던 19살 김 군은 달려오던 전동차에 치여 참혹하게 죽었다. 김 군의 죽음은 수많은 사람들을 생각하게 만들었고 우리 사회를 성찰하는 계기로 작용했다.(출처 : 하성환)
2016년 5월 28일 퇴근 시간대 2호선 구의역 9-4에서 고장난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던 19살 김 군은 달려오던 전동차에 치여 참혹하게 죽었다. 김 군의 죽음은 수많은 사람들을 생각하게 만들었고 우리 사회를 성찰하는 계기로 작용했다.(출처 : 하성환)

구의역 김군은 2016년 5월 28일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던 중 달려오던 전동차에 치어 온몸이 부서지고 뒷머리가 사라진 채 피투성이가 돼 죽어갔다. 영안실에서 김 군 어머니는 도저히 아들을 알아 볼 수 없었다. 아들 시신이라고 인정할 수 없는 그 참혹함 앞에 힘없는 어머니는 하염없이 흐느꼈다.

서울 메트로나 하청업체 은성 PSD 대표는 실형을 선고받지 않았다. 집행유예와 벌금형으로 끝났다. 19살 김군의 죽음이 김군 자신의 잘못이 아님에도 처벌은 고작 그러했다. 그게 한국 사회 노동현실이 처한 참담한 장면이었다.

그러나 19살 청년의 죽음 이후 서울메트로(현 서울교통공사) 하청업체 직원들은 모두 정규직으로 전환되었다. 그리고 2인 1조 근무 등 근로조건이 한결 나아졌다. 지난 해 <청년전태일>이 주최한 [구의역 4주기 19살 김 군 추모 토론회]에서 '구의역 김군'의 동료인 임선재 서울교통공사 노조 은성 PSD지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김 군의 죽음 이후 정규직이 되면서 가장 크게 달라진 것으로 "스크린도어 고장이 발생했을 때 이를 처리하는 것보다 직원의 안전이 우선인 문화가 만들어졌다"고 강조했다. "작업을 하다 중간에 위험하겠다는 생각이 들면 작업을 거부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졌다”고 언급했다.

그러나 위험한 업무를 외주화 하는 행태는 공공기관에서 아직도 여전하다. 토론회 참석자들은 스크린도어 정비용역업체 은성 PSD가 예외적일 뿐이라고 입을 모았다. 19살 청년의 원통한 죽음이 그 직장을 변화시켰을 뿐이다.

19살 김군은 가족에겐 무뚝뚝했지만 다정다감했고 친구들 사이에선 늘 웃는 얼굴로 밝았다고 한다. 친구들에게 짜증을 낸 적이 한 번도 없이 항상 해맑은 얼굴로 기계조립이나 납땜을 할 때는 어려워하던 친구들을 솔선해서 도와주던 친구였다고 한다. 선생님들 또한 김군을 좋아해서 제자들이 전화를 드리면 선생님들이 항상 김군 소식을 잊지 않고 물었을 정도로 믿음이 두터운 친구였다고 했다.

여러 공구들과 숟가락이 뒤엉킨 채, 점심 먹을 시간도 없이 사발면이 든 가방을 들고 다녔던 김군은 하루하루가 고된 노동의 일상이었다. 노동이 끝나면 피곤에 지쳐 집에 와선 그대로 쓰러져 잠을 잤다고 한다.

그러나 쉬는 날엔 다른 특성화고 졸업생들과 함께 서울 메트로 본사 앞에서 원청회사의 갑질을 비판하는 피켓 시위를 전개했다. 비록 19살 어린 청년이지만 세상이 변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고 그 깨달음만큼 정직하게 살았다. 19살 김군은 민주노총 소속 노동조합에 가입한 당찬 청년이었다.

한 달 144만원을 벌어서 동생 용돈도 주고 대학등록금을 마련하려고 꼬박꼬박 적금을 부었다. 특성화고를 졸업한 그 해 겨울 김군은 몇몇 친구들이 졸업 기념 겨울여행을 떠날 때 가질 않았다. 가정 사정을 알기에 부모님을 힘들게 할까봐 말도 꺼내지 않고 스스로 그만두었던 것이다. 그렇게 배려심 깊고 순수하고 착한 청년이 전동차와 스크린도어에 끼어 참혹한 모습으로 죽었다. 그 19살 김군의 죽음이 원청과 하청업체에 그나마 작은 변화를 가져온 것이다.

안타까운 죽음은 또 있다. 2019년 7월 31일 목동 빗물 펌프장 참사 역시 우리들 기억에 남아 있는 안타까운 죽음이다. 당시 현대건설 하청업체 노동자 쇠린마응은 미얀마에서 코리안 드림을 안고 온 청년이었다. 2017년 5월 고용허가제 취업비자로 한국에 들어온 쇠린마응은 7남매 중 다섯째로 경제적으로 어려운 가족을 늘 걱정하던 마음 착한 청년이었다.

한 달 수입 가운데 용돈 일부를 제하곤 모두 미얀마에 계신 부모님께 꼬박꼬박 송금해드렸다. 미얀마에 계신 부모님은 두 분 모두 눈이 잘 보이질 않아 궁핍한 처지였다. 그런 만큼 쇠린마응은 회사에서 숙식을 해결해 가며 절약했고 성실하게 생활했다. 그런 그가 사고 당일 안타까운 죽음을 맞은 것이다.

목동 빗물 펌프장 배수시설 점검 차 지하 40m 땅 속 깊이 내려갔다. 그 시각이 아침 7시 10분이었다. 그리고 30분만인 7시 40분에 수문이 자동 개방되면서 거센 물살에 휩쓸려 죽었다. 구명조끼도 없었고 대피할 공간도 없었다. 가난한 나라 미얀마 청년은 코리안 드림을 이루지도 못한 채 그렇게 허망하게 삶을 마감했다. 청년의 나이 23살이었다.

사고 당일 그 공간에서 가슴 아픈 죽음은 또 있었다. 현대건설 직원 안모씨는 29살 결혼 1년 차 신혼부부였다. 그 젊은이는 7시 30분에 카톡으로 호우주의보 소식을 전달받고 곧장 지하 40m 아래 배수시설로 내려갔다. 무전기용 통신중계기가 설치돼 있지 않아 긴급히 대피시키러 내려간 것이다. 자동으로 수문이 열리는 위급한 상황에서 두 목숨을 구하러 40m 지하로 내려간 것이다.

그 젊은이 역시 이튿날 거의 같은 시간대에 미얀마 청년과 함께 시신으로 발견됐다. 통상 대기업 정규직 직원들은 위험한 일에 내몰리지 않는다. 위험한 작업은 항상 하청업체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전가돼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29살 안모씨는 죽음이 눈앞에 닥친 상황에서도 ‘인간의 길’을 택했다. 왜냐하면 지하 40m 배수시설에서 지상으로 올라오는 데는 적어도 20-30분이 걸리는데 그 사실을 알면서도 수문이 열리기까지 10분 남짓한 시간 오로지 인간 생명에 대한 <책임감> 하나로 내려간 때문이다.

그 젊은이의 죽음이 더더욱 안타까운 것은 4년 내내 서울 내로라하는 대학에서 전액 장학금을 받고 네덜란드 교환학생까지 다녀온 수재이자 효자였다는 데 있다. 아들의 죽음 앞에 “아버지는 피눈물과 함께 온 몸이 하얗게 백지 상태가 되었다”고 당시 충격을 토로했다.

세월호 참사 당시 “자식 잃은 세월호 부모들의 기사를 볼 때마다 흘러내리는 눈물과 멍울진 가슴을 쓰다듬어도 나의 온 세포들을 이렇게 거꾸로 돌려놓진 못했다”며 참사 당시 아들을 잃은 슬픔을 고통스럽게 토해냈다. 실제로 아들 안모씨는 아버지의 삶을 배우고 본받으며 성장했다.

경제적으로 넉넉지 못한 형편이었음에도 아프리카 콩고 내전으로 피폐해진 전쟁고아들을 후원하던 아버지를 보면서 자란 청년이었다. 그 역시 앰네스티에 정기적으로 후원하던 아름다운 청년이었다. 그런 아들의 죽음 앞에 아버지는 한없이 무너져 내렸다.

2018년 12월 광화문 광장에 세워진 태안 화력 발전소 비정규직 하청 노동자 고 김용균 님 분향소(출처 : 하성환)
2018년 12월 광화문 광장에 세워진 태안 화력 발전소 비정규직 하청 노동자 고 김용균 님 분향소(출처 : 하성환)

어디 안타까운 죽음들이 이뿐이겠는가! 2018년 12월, 24살 아름다운 청년 김용균의 죽음은 무엇인가! 2010년 9월, 1600도 제철소 끓는 쇳물에 빠져 형체도 없이 사라진 29살 청년의 죽음은 또 무엇인가!

2020년 12월 10일 마포구에서 열린 <그 쇳물 쓰지 마라> 토크 콘서트.  오른쪽에 계신 분은 김용균 어머니 김미숙 재단이사장이다. (출처 : 김용균 재단 제공)
2020년 12월 10일 마포구에서 열린 <그 쇳물 쓰지 마라> 토크 콘서트.  오른쪽에 계신 분은 김용균 어머니 김미숙 재단이사장이다. (출처 : 김용균 재단 제공)

아버지에게 자랑스러운 아들이었던 24살 김훈 중위의 죽음은 또 무엇인가! 86년 인천에서 서울 서부경찰서 대공과 형사들에게 연행된 22살 청년 신호수가 8일 뒤 전남 여수 돌산도 동굴에서 목맨 시신으로 발견된 것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86년 6월 시험기간 중 정체불명의 전화를 받고 나간 18살 김성수 군(서울대 지리학과1년)이 3일 뒤 부산시 송도 앞바다에서 시멘트 덩어리에 묶인 채 떠오르는 것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1986년 6월 21일 부산 송도 앞바다 바위틈에서 허리춤에 세 개의 시멘트 덩어리를 달고 있는 시체가 발견됐다. 상하의와 신발을 착용하고 깨진 안경을 쓰고 있는 시신은 서울대 지리학과에 재학 중인 18살 김성수 학생으로 밝혀졌다. 전두환 정권 경찰은 그의 죽음이 ‘성적을 비관한 자살’이라고 거짓 발표했다.(김성수 열사기념사업회)
1986년 6월 21일 부산 송도 앞바다 바위틈에서 허리춤에 세 개의 시멘트 덩어리를 달고 있는 시체가 발견됐다. 상하의와 신발을 착용하고 깨진 안경을 쓰고 있는 시신은 서울대 지리학과에 재학 중인 18살 김성수 학생으로 밝혀졌다. 전두환 정권 경찰은 그의 죽음이 ‘성적을 비관한 자살’이라고 거짓 발표했다.(출처 : 김성수 열사기념사업회)

22살 나이에 노동현실에 절망하여 스스로 근로기준법전을 태우며 자신의 몸을 불살랐던 전태일의 죽음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아니, 청년 전태일의 죽음 이후 46년이 지났음에도 방송노동자의 열악한 노동현실을 고발한 27살 이한빛 피디의 죽음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모든 청년의 죽음은 언제나 우리들을 슬프게 한다! 더구나 한없이 순수하고 아름다운 청년들의 죽음은 우리 어른들을 슬픔 속에 부끄럽게 한다. 22살 청년 전태일은 버스비를 아껴 풀빵 30개를 사서 점심을 굶던 어린 여공들에게 나눠주었다. 그리고 자신은 자정이 넘도록 청계천에서 도봉구 창동까지 걸어가지 않았던가!  어머니가 점심으로  신문지에 싸준 밀가루 빵을 점심을 굶고 있는 어린 여공들 앞에서 차마 먹지 못했던 청년이었다.

27살 이한빛 피디는 월급을 받아 적금을 들기보다 KTX 여승무원, 세월호 등 사회적 약자에게 아낌없이 기부하며 그들에게 연대의 손을 내밀지 않았던가! 그 연대하는 삶이 인간이 걸어가야 할 길이었기에 우리는 그 청년들을 아름답다고 한다. 그 청년들의 아름다운 삶과 안타까운 죽음 앞에 이제 우리 사회는 그 청년들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성찰해야 한다.

왜 한국 사회는 죄 없는 청년들을 사지로 내몰았는지 답해야 한다. 민주주의가 피를 먹고 자라는 나무인 것처럼 우리 사회가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로 한 걸음 진보하는 것도 그런 때문인가?

그래도 이젠 더 이상 안타까운 죽음들은 없어야 한다. 더더욱 젊디젊은 청년들의 죽음은 없어야 한다! 이제까지 원통하게 죽어간 청년들의 죽음만으로도 이 사회는 충분하지 않은가! 이젠 우리 어른들이, 우리 사회가 그 청년들의 죽음에 답해야 할 차례이다.

편집 :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양성숙 편집위원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ethics6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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