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정우열 주주통신원

지난 20일은 한국 천주교회의 순교 성인들을 기리는 대축일이었다. 그런데 그날이 토요일이어서 미사를 주일로 옮겨 지내는 성당에서는 어제 주일인 21일 대축일 봉헌미사를 올렸다. 그래서 내가 다니는 김포 청수성당에서도 성 김대건 안드리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을 위한 대축일 미사가 있었다.

우리나라는 18세기 말 천주교 서적과 교리를 연구하던 몇몇 학자들(주로 남인 계열)을 중심으로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이들 가운데 이승훈이 1784년 북경에서 ‘베드로’로 세례를 받고 돌아와 신앙공동체를 이룸으로써 마침내 한국 천주교회가 탄생하였다. 대부분 선교사의 선교로 시작된 다른 나라들의 교회에 비유하면 매우 특이한 일이다.

그래서 교회사에서는 ...한국 천주교회의 이러한 탄생을 ‘자생적 탄생’이라고 한다. 그러나 당시 한국 사회는 전통을 중시하던 유교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어, 그리스도교와 크게 충돌하였다. 결국 조상 제사에 대한 교회의 반대 등으로 천주교는 박해의 시대를 맞이하였다. 신해박해(1791년)를 시작으로 병인박해((1866년)에 이르기까지 일만여 명이 순교하였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천주교회 200주년의 해인 1984년 우리나라를 방문하여 이들 순교자 가운데 최초의 사제인 김대건 안드레아와 평신도인 정하상 바오로를 비롯한 103명을 시성하였다. 그 뒤 한국 교회는 9월 26일 ‘한국 순교 복자 대축일’을 9월 20일로 옮겨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로 지내고 있다.

그럼, 그 때 그 많은 사람들이 왜 순교를 했을까? 그건 박해에 대한 무저항으로 ‘신앙’때문이다. 형을 집행하는 형리들은 예수님을 모독하기 위해 길 위에 십자가를 놓고 “누구든지 저 십자가를 밟고 건너가는 자는 죄를 면해 줄 것이다”라고 유혹했다. 허나 누구 하나 그 십자가를 밟고 지나간 사람은 없었다. 그들은 순교로 생을 마감했다. 그건 그들이 십자가를 단순한 나무조각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 십자가에서 예수의 부활을 보았다.

오스트리아 그리츠의 주교 에곤 카펠라니는 <전례와 일상의 거룩한 표징>에서 “십자가는 거기에 매달려 죽은 나자렛 출신의 한 젊은이를 바라보면서 위로와 확신의 표징이 되었습니다. 그분께서는 실패한 이상주의가 아니라 사람의 아들인 동시에 하느님의 아드님이셨습니다. 그분의 부활사건으로 사랑이 증오보다 강하며, 영광이 죄보다 강하고 하느님의 어린 양이 인간 늑대보다 강하다는 사실이 확실히 드러났습니다. 부활 사건은 메마른 십자 나무를 생명나무로 바꾸어 놓았습니다”라고 십자가의 의미를 잘 요약했다.

그때 순교자들은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사랑으로 감싸 주시고 부활의 희망으로 이끄시는 주님의 현존을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없다. 누구나 자유스럽게 믿을 수 있는 종교자유의 시대가 되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순교정신은 무엇인가?

지난 8월16일 프란치스코 교황은 광화문 광장에서 우리나라 순교자 123명의 복자 시복식을 했다. 유래 없는 거창한 행사였다. 오늘 주임신부님은 강론에서 “순교자는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들이 순교자가 되겠다는 생각에서 순교하신 게 아니란 말씀입니다. 오직 예수님이 가셨던 길을 따랐을 뿐입니다. 그분들을 순교자로 만들려는 것은 오늘날의 한국 천주교회 입니다”라 하시면서 한국 천주교회의 순교자 양산의 지나친 몰두에 대해 묵상해 보자고 하셨다.

그렇다. 성인이나 복자 시성 또는 시복식은 교회에서 주교의 사인(sign)만으로도 족하다. 그럼에도 지난번처럼 광화문광장에서 막대한 비용을 들여 국가적 행사로 행하는 것은 다른 종교인에게도 형평성 문제가 될 수 있다. 양적으로 순교자의 수가 많아야 한국 천주교회의 위상이 높아지는가? 만일 그렇게 생각한다면 이는 예수님의 뜻과 맞지 않다. 예수님께서는 “오른손이 할 때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가르치셨다. 과거의 순교가 박해에 대한 무저항이었다면 오늘날의 순교는 불의에 대한 무저항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동안 한국 천주교회는 유신 정권에서 독재에 맞서 싸웠으며 민주화투쟁은 물론 정의구현에도 앞장서 왔다. 허나 김수환 추기경 선종 이후 한국천주교회는 보수화 경향으로 가는 느낌을 받고 있다. 오늘 한국 천주교 순교자 성인 대축일을 맞아 다 함께 순교의 의미를 되새겨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정우열  jwy-hanso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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