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를 타러 갈 때 누구나 개찰구를 통과해야 한다. 개찰구 입구마다 ‘마스크 착용’이란 종이가 붙어 있다. 흰 종이에 붉은색 글씨다. 대비가 잘 되니 멀리서도 선명하게 눈에 잘 띈다. 남다른 배려심이 돋보인다.

‘지하철’의 배려심은 예서 그치지 않는다. 교통카드를 댈 때마다 ‘마스크를 착용하세요.’라고 주의를 준다. 하루에도 수백 수천이 드니드니 제법 짜증이 날 법도 하련만 결코 소리를 높이는 법이 없다. 그의 은근과 끈기를 따를 자가 없다. 예의가 바르다. 일반카드든 무임카드든 사람을 가리지 않고 똑같이 응대한다. 참으로 공평하다. 입도 안 아픈지 사람이 들어설 때마다 열 번이고 백 번이고 같은 어조로 공손하게 되풀이한다. 제 직분에 충실한 파수꾼이다. 든든하기 그지없다. 아마도 ‘마스크 착용’이란 글자를 읽지 못하는 까막눈을 위한 또 다른 배려이리라. 그렇다! 동네방네 방을 붙이고, 뉘나지 않는 친절한 음성으로 우리들의 안위를 걱정해 주니 ‘지하철’은 참 배려심이 많음이 분명하다.

개찰구마다 ‘마스크 착용’이란 경구가 보인다. 교통카드를 대고 들어서면 ‘마스크를 착용하세요.’ 하면서 늘 반갑게 맞이한다. 이렇듯 이중삼중으로 내 안위를 걱정해 주는 ‘지하철’이 참 고맙다.
개찰구마다 ‘마스크 착용’이란 경구가 보인다. 교통카드를 대고 들어서면 ‘마스크를 착용하세요.’ 하면서 늘 반갑게 맞이한다. 이렇듯 이중삼중으로 내 안위를 걱정해 주는 ‘지하철’이 참 고맙다.

일과를 마치고 집에 올 때 역시 개찰구를 통과한다. 나갈 때 본 ‘마스크 착용’이란 경구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마스크를 착용하세요.’라는 말도 들리지 않는다. 젊은이는 ‘삐!’, 나는 ‘삑삑!’ 그걸로 끝이다.

‘지하철’은 배려심이 많은 게 아니었다. 인제 보니 ‘마스크’를 마케팅으로 활용한 한낱 상술을 부린 거다. 그러니 나 같은 지공거사(地空居士)는 어떤 사람으로 보였을까? 끼니때마다 밥상에 올라가는, 보기 싫은 반찬이 아니었을까? 눈길조차 주기 아까운, 그래서 끼적거릴 것도 없이 역한 맛을 풍기는 천덕꾸러기! 그나저나 코로나가 아니었다면 얼마나 무미건조했을까? 드나들 때마다 ‘삐!’, 아니면 ‘삑삑!’ 기계음만 들렸을 테니까. 참으로 웃픈 현실이다.

차를 타고 내리는 이는 모두 고객이다. 고객의 안전이 곧 ‘지하철’의 생명이다. 그래야 ‘지하철’도 안전해지고 넉넉해진다. 그런데 차에서 내리는 이를 모두 과객으로 취급한다. 곁방 년이 코 곤다고 했다. 아무렴, 누가 주인이고 누가 나그네인가? 딱히 주객을 구분할 이유는 없다. 맞다. 주인이 아니어서 주인 행세를 하는 거다. 역시 주인으로 승화하지 못한 몸종 근성 탓이다. 나그네 말죽 먹이듯 건성건성 해치우는 천박함이 문제다.

한 삼 년 지내다 보니 이젠 ‘삑삑’ 소리마저 무덤덤해졌다. 따지고 보면 나서서 심지를 돋울 일도 아닌데 어지럽다. 아무튼 나는 오늘도 풍산역을 드나든다. 정겹던 ‘지하철’이 달리 보인다. 정나미가 달아날까 외려 두렵다. 고놈의 ‘마스크’ 가 뭐라고…….

나갈 때는 들어설 때 보이던 경구가 안 보인다. 그렇다고 ‘마스크를 착용하세요.’라는 당부도 없다. 그냥 ‘삑삑’이다. 지공거사의 자격지심인가? ‘안녕’이란 소리보다는 ‘꺼져’라는 소리에 가깝게 들린다.
나갈 때는 들어설 때 보이던 경구가 안 보인다. 그렇다고 ‘마스크를 착용하세요.’라는 당부도 없다. 그냥 ‘삑삑’이다. 지공거사의 자격지심인가? ‘안녕’이란 소리보다는 ‘꺼져’라는 소리에 가깝게 들린다.

 

편집 : 박춘근 편집위원

 

박춘근 편집위원  keun72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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