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철이다.
내가 사는 하늘마을 5단지만 해도 느티, 이팝, 왕벚, 아그배, 참느릅, 소나무 할 것 없이 물들지 않은 나무가 없다. 저마다 불그레하고 누르스름하다. 시푸르죽죽한 메타세쿼이아도 머잖아 누르끄름한 빛으로 바래지고, 어느새 이파리 한 장 걸치지 않은, 나목(裸木)이 될 것이다.

이즈음의 나무는 형용할 수 없는 다양한 색을 띤다. 자연스럽게 ‘단풍'은 ‘단풍나무'만의 색깔이 아니다. ‘단(丹)’ 자를 붉은색으로 표기한다는 것은 참으로 옹색하다.

'붉다'에서 파생한 말을 보자.
불긋불긋, 울긋불긋, 붉으락푸르락, 붉디붉다, 붉누르다, 불그레하다, 불그름하다, 불그무레하다, 불그스레하다, 불그스름하다, 불그죽죽하다, 붉으딕딕하다, 불그데데하다, 불그뎅뎅하다, 불그숙숙하다…….

어디 그뿐이랴. 검은빛을 띠면서 붉으면 ‘검붉다’, 누르면서 붉으면 ‘누르붉다’, 아주 곱고 새뜻하게 붉으면 ‘새붉다’, 흰빛이 돌면서 붉으면 ‘희붉다’, 빛깔이 아주 붉으면 ‘시붉다’, 엷게 붉으면 ‘엷붉다’가 되고, ‘연붉다’가 된다. 그러니 단풍은 오만가지 색이다.
풀은 풀대로, 나무는 나무대로 탈도 많고 어려움도 많은 신축년의 뒷마무리를 위하여 마지막으로 치장하는 가을! 골목마다 거리마다 단풍이 지천이다.

 

지난날 풍동은 산이 없고 벌판이 많아 바람이 심하게 불어서 풍리(風里)였다. 이 바람을 막으려고 단풍나무와 은행나무를 많이 심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숲을 이루고 단풍이 아름답다 보니 ‘단풍 풍’자가 들어간 풍리(楓里)로 바뀌었다. 그렇게 풍동(楓洞)이란 마을 이름이 생겨난 것이다. 한편, 산황동(山黃洞)은 산과 들에 누런 흙이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렇듯이 풍산동(楓山洞)은 ‘풍동’과 ‘산황동’을 합쳐서 붙인 이름이다.

한편, 풍동에는 풍산초•풍동초•다솜초•풍산중•풍동중•풍동고•세원고 등 7개교가 있다. 그 가운데 풍산초, 풍동초, 풍산중학교의 교목은 단풍나무다. 단풍나무의 속성이 그런가? 그 학교 누리집에는 단풍나무 사진 아래 “언제나 붉게 물든 단풍나무처럼 꿈을 키워 가며 바르게 자라는 어린이”, “자제와 독립, 자신감과 야망, 새로운 도전”이란 메시지를 부각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풍동에는 ‘단풍마을’, 풍동과 식사동에는 ‘은행마을’이 있다. 그리고, 풍산초나 다솜초가 개교하기 이전까지 학교 뒤로 자그마한 숲이 있었는데, 풍산초교 뒤쪽의 숲속마을이나 식골공원, 다솜초교 근처의 달맞이공원 모두 예전의 ‘숲’을 살려 쓴 이름들이다. 근처에는 단풍나무길(MAPLE ST)도 있다. 풍산역 1번 출구에서 약 800여m 떨어진 밤가시공원 일대로, 일산동구 일산로 372번길 8의 정발산동이다. 암튼 풍동은 마을, 학교, 거리 모두 단풍나무와 남달리 깊은 연이 이어지고 있다.

 

아침마다 풍산역을 향한다. 아파트 정문을 나서면서부터 왕벚나무를 비롯하여 느티나무, 이팝나무, 루브라참나무가 우듬지마다 하늘에서 춤을 추고, 믿음직한 호위 무사들처럼 양쪽 길가에 죽 늘어서 있다. 풍산역으로 내려서면 벽면을 타고 가는 담쟁이가 한껏 제빛을 뽐내면서 반긴다. 풍산역에도 단풍이 들었다!

 

풍산역 1번 출구 앞 광장에 서 있는 단풍나무 네 그루
풍산역 1번 출구 앞 광장에 서 있는 단풍나무 네 그루

 

1번 출구를 나서면 광장 중앙에 느티나무 여섯 그루가 보인다. 가로수보호판도 네모반듯하고 널찍하다. 한창 물오른 느티가 쾌청한 가을을 닮아 해맑게 나붓거린다.
왼쪽 주차장 못 미쳐 단풍나무 네 그루가 서 있다. 느티에 맞견줄 때 볼품없이 제멋대로 서 있다. 가로수보호판도 그렇고, 줄이나 간격을 보면 건성으로 심었음이 드러난다. 오른쪽 자전거보관소 쪽에 따로 두 그루가 서 있지만 제대로 관리하지 않아 몸뚱이도 이파리도 뒤틀리고 옹크라졌다.

 

풍산역 2번 출구 앞 광장에 서 있는 단풍나무 네 그루
풍산역 2번 출구 앞 광장에 서 있는 단풍나무 네 그루

 

내가 다니는 2번 출구 또한 마찬가지다.
광장에 단풍나무 네 그루가 앙버티고 선 형상이다. 족히 20여 년 묵은 나무일 텐데 하나같이 꾀죄죄하다. 병치레가 심각하다. 헐고 짓무르고 갈라지고 찢어지고, 몸뚱이 어딜 봐도 성한 데라고는 보이지 않는다.
 

사시사철 오로지 하늘만 바라보고 산 목숨이다. 아무리 목이 타도 누구 한 사람 물 한 모금 준 적 없으렷다! 정신 사나운 누군가는 째진 틈으로 담배꽁초나 쑤셔 박았을 테고, 용케도 새잎이 나올 때를 기다린 진드기 떼는 이른 봄부터 장사진을 쳤겠지. 뿌리를 헤집으면 필시 산업 폐기물 더미 속에서 뿌리내리지 못한 회한을 읊조리고 있지 않을까? 그런저런 까닭으로 온몸에 저승사자 같은 버섯이 똬리를 틀고 있는지도 모른다. (계속)

 

헐고 짓무르고 갈라지고 찢어진 채 ,형해만 남은 풍산역 앞 광장의 단풍나무 여덟 그루
헐고 짓무르고 갈라지고 찢어진 채 ,형해만 남은 풍산역 앞 광장의 단풍나무 여덟 그루

(계속)

※ 이 글은 고양신문에도 실린 글입니다.

출처 : [박춘근의 꼬장꼬장 밥보샘]

http://www.mygoyang.com/news/articleView.html?idxno=65640

 

편집 : 박춘근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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