핏빛 단풍

우직하게 보이더니만
너라고 별수 있겠어?
한색으로 살기엔 몹시도 버거웠겠지.

그래도 말이다
소소히 피어오르던 연둣빛 소망 어디 가고
우주 만물 품겠다던 새파란 기품 다 어디 내치고

이 가을 빈틈없이 한껏 알록달록 차려입고
솜털 핏줄 속곳 다 드러낸 채 실없이 사부작거리니
눈꼴시런 꼬라지 하고는…….
같잖은 세상, 설마하니 니가 날 버리고 너까지 버린 건 아니겠지.

길상사에서 (2020년 가을)
길상사에서 (2020년 가을)

 

하기사, 바람이 바람을 몰고 오는데 바람 잘 날 있을라구?
욕심은 과욕을 낳고 과욕은 탐욕을 부르니 누굴 탓하랴마는
탐욕의 실체가 빈껍다구라는 걸 깨단하지 못하고
헛것 좇아 예까지 내달았으니 너도나도 게서 멈추는 게 옳고 말고.

니가 좋아 한걸음 다가설 때마다
풋바심하듯 손 모아 어르던 가난뱅이 기도문이
고작 얼룩덜룩 오만 가지 색치장으로 화답할 줄 생각이나 했을까?
그것도 굿판이라고 정신 사나운 무당년처럼 오방신장기를 흔들어 재끼며 온몸으로 안달발광하니

너는 이내 자기색을 잃어버리고
난들 지레 눈길마저 돌려버리고
아서라, 세상없어도 오직 한 곬 올차게 가리라고 믿었건만
니 빛깔 간데없고, 덕지덕지 어루러기 휘말고 희희낙락하니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용산공원에서(2021년 가을)
용산공원에서(2021년 가을)

 

돌이켜보면 속절없이 흘러간 세월 넌들 아니 일색을 붙좇았으랴.
뜯기고 찢기고 갈라진 삭신 부둥켜안고
찬 새벽 이슥하도록 한데서 뒤척이던 너를 기억한다면
한눈판 적 없이 늘 그 자리에 있던 널 푸념거리삼아
그리도 덤덤하게, 시뻘건 잎새 나붓대느냐고 뇌까리진 않았을 텐데

앙상한 살가죽 드러낸 채 진홍색 옷자락 한 번 다라보지 못한 민초들의 넋이나마 보듬기 위하여
모진 칼바람에 니 숨통 이울도록 칠규로 벌건 핏빛 내뿜을 때까지
그저 널 글러먹은 놈으로만 흘겨보다가
그런저런 속내 헤아리지 못하고 외곬으로 치닫다가
얼어 죽을 판에 허연 백골, 서리꽃 환영에 취해 군침 흘리다가
, 너의 몸보시를 훼절(毁節)이라 폄하던 모질이가 설 곳은 어디에도 없다.

고양초등학교에서(2020년 겨울)
고양초등학교에서(2020년 겨울)

 

넌 내게 안기고 나는 널 보듬고, 우린 그렇게 이 가을 다시 한몸이 된다. 내 안에 숨어 있는 나를 내가 모르는데, 드러난 게 무슨 대수더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드러내도 우린 부끄러울 게 없다. 입주름 파르르 떨면서 오그라든 널 바라보는 순간 소슬히 떠오르는 잔상! 참 많이 닮았구나. 어제의 내가 그랬고 오늘의 내가 그렇고 내일 또한 뭐 특별할 게 있겠니? 네가 날 찾아준 게 고맙고, 내가 널 보듬을 수 있다는 게 아짐찮다. 하지만 너와 숫제 바탕이 다른 내 몸뚱아리는 누가 안아 주려나, 누구에게 안길 수나 있으려나. 거무튀튀하게 곰삭은 세월만 나부끼는 내 몸뚱아리를…….

삼청공원에서(2019년 가을)
삼청공원에서(2019년 가을)

 

붉은 색은 악을 추방하고 승리를 자축하며 신의 제전을 물들이던 의식용 색깔이다. 예수와 순교자를 상징하고, 위엄과 권위를 내세우는 황제와 추기경의 색이다. 한 마디로 적색은 신의 원력(原力)이요 왕의 복색이라, 네깟놈이 살을 깎고 뼈를 간들 감히 접할 수 있는 색이 아니다. 그 핏빛 받드는 자 생명의 촛불로 승화하고, 붉은 촛불 밝히 타오를 때 평화의 신새벽 뜨겁게 솟아올라, 뒤틀어진 자유가 시퍼렇게 되살아나고, 짓이겨진 민주가 두 눈 부릅뜨고 만방을 누비리니 맞다! 가찹다 싶으면 물러서고 멀어졌다 싶으면 다가서면 그뿐, 때묻은 손길로 감싸려 마라. 너절한 가슴으로 품으려 마라. 무슨 살판날 일 아니니 이 가을 쏘다니지 마라. 더러운 발길에 스치고 채일까 두렵다.

권오철 님 제공
권오철 님 제공

 

낙엽!
처절한 몸부림의 결정이다. 절로 떨어진 게 아니다. 내년 봄을 기약하고 떨어뜨린 것이다. 허투루 보지 마라. 어느 한 곳 성한 데 없이 축축한 대지를 켜켜이 덮고 있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기꺼이 뭇 생명을 살찌우는 성찬으로 거듭나니 살아생전 흥청망청 바닥내길 좋아하던 인간아, 멀찌막이 눌러앉아 경배할지언정 더러운 입으로 핏빛 단풍을 노래하려 마라. 거룩한 주검 앞에 마땅히 무릎 꿇고 기도하라. 그리고 기다리라. 핏빛 노을 바라보며 맥없이 눈물짓던 황혼녘 늙은이 앞에 핏빛보다 진한 아침햇살 덩두렷이 솟구치는 날을.

필자가 사는 집 앞 도로에서 본 노을(2019년  가을)
필자가 사는 집 앞 도로에서 본 노을(2019년 가을)

 

머잖아 춘풍화기 되돌아오는 날 무릎 꿇고 널 맞이하리니
하나가 둘이 되고 둘이 다시 하나 됐다고 얼싸절싸하던 지난봄을 추원하면서
노여워도 노여워 말고
서러워도 서러워 말고
따지지 말고 되묻지 말고
하염없이 가라, 뒤돌아보지 말고 가라
아무 생각 말고 그냥저냥 줄곧 가라, 총총한 별만 보고.

북풍한설 매섭다고 무한년하랴?
광풍(狂風) 가고 광풍(光風) 올 제
우리네 숫진 삶 덩실덩실 더덩실
볼끼리 입술끼리 뜨거이 맞부비리

한겨울 홑적삼
애틋한 연민과
핏빛 밴 눈발을
어찌 잊으랴
손 모아 비손하듯 네 분노 감싸안고
손 떨고 입 떨고 살 떨리는 눈으로 하늘을 쳐다본다.

따지고 보면
속치부하는 법 없고
대놓고 못 할 말 없고
할 짓 말 짓 가리지 않은
허물 모르는 내외간처럼 임의로운 우리 사이!
무슨 꿍꿍이 있어 에둘러 말하랴?
사랑아! 고맙다, 부끄럽다, 미안하다. 사랑한다.

오대산에서(2021년 가을)
오대산에서(2021년 가을)

 

편집 : 박춘근 객원편집위원

박춘근 객원편집위원  keun72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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