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님이 그린 젊은 날 아버지 초상화(출처 : 하제숙)
누님이 그린 젊은 날 아버지 초상화(출처 : 하제숙)

선친께선 1930년 전북 임실군 삼계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고향인 임실군 관촌면과 달리, 삼계면은 일제강점기 시절부터 오지였고 해방 이후에도 매우 낙후된 지역이었다. 1970년대에 들어서서 비로소 전기가 들어오기 시작한 곳이니 도로 사정은 말할 것도 없었다. 선친의 회고에 따르면 어린 시절 도깨비불을 보면서 산길을 걸어 다니셨다고 했다.

할아버지 묘소를 비롯해 선산이 그곳에 있기에 1990년대 초 가끔씩 삼계면을 들르면 큰할아버지께 인사를 드렸다. 그때마다 큰할아버지는 사람을 피해 방구석 저쪽으로 얼른 몸을 숨기곤 하셨다. 일제강점기 징용으로 끌려가 탄광의 고된 노동과 심한 매질을 당하셨다. 평생 정신이 온전치 못한 상태로 정상적인 삶이 불가능했다. 큰할아버지와 달리 할아버지는 징용으로 끌려가지 않았다. 선친께서 가미카제 특공대와 연관된 소년비행단에 들어간 탓이다.

해방되던 날 전주 북중학교 학생으로서 호기심 반 두려움 반, 신사에 몰래 들어갔다고 하셨다. 도대체 무슨 신성한 것이 숨겨져 있기에 사람들이 그 앞에서 경건하게 손을 모으는지 몹시 궁금해 한 탓이다. 신사에 몰래 들어가 본 결과는 매우 허망했다고 하셨다. 신사에는 종이 한 장에 글씨가 적혀 있는 목판 이외엔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해양대 시절 아버지(맨 왼쪽에 앉은 이)(출처 : 하성환)
해양대 시절 아버지(맨 왼쪽에 앉은 이)(출처 : 하성환)

1950년 3월 공립 전주 북중학교 6년을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와 입학시험을 치르는 도중, 담임선생님이 창문을 두드리며 밖으로 나오라고 하셨다. 국립해양대학에 합격했으니 그리로 가라고 일부러 서울까지 올라오셨다고 했다.

국립해양대 3기생 교수-학습장면(출처 : 홍영학)
국립해양대 3기생 교수-학습장면(출처 : 홍영학)

등록금도 없이 먹여주고 입혀주고 용돈까지 주는 학교라고 적극 권유해서 선친께선 입학시험을 치르는 도중 다시 전주로 내려오셨다.

해양대 3기생 승선  장면(출처 : 홍영학)
해양대 3기생 승선  장면(출처 : 홍영학)

선친께선 한국전쟁이 발발한 그 해 6월, 해양대 6기생으로 입학하셨는데 가끔씩 해양대 3기생들이 겪은 수난을 옛이야기처럼 들려주셨다. 3기생 가운데 빨갱이로 몰려 동삼동 영도 앞바다에서 적지 않은 숫자가 학살당하고 수장됐다고 하셨다. 그래서 해양대 2기생 선배 아내는 학살당한 시체를 뜯어 먹는 갈치 떼가 파닥거린 장면이 떠올라 그 사건 이후로 갈치를 먹지 않는다는 이야기도 들려주셨다.

한국전쟁 직후 보도연맹원을 비롯해 정치범 수천 명을 학살한 동삼동 미니공원. 현재는 김소운 문학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출처 : 하성환)
한국전쟁 직후 보도연맹원을 비롯해 정치범 수천 명을 학살한 동삼동 미니공원. 현재는 김소운 문학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출처 : 하성환)

실제로 한국전쟁 직후 영도 동삼동 미니공원 절벽에선 수많은 시민들이 학살당한 채 수장됐다. 이른바 ‘보도연맹학살’ 사건이다. 부산에서 학살당한 사람만 거의 구천 명이 넘는다. 「수라도」, 「사하촌」, 「모래톱이야기」의 작가 요산 김정한 선생도 당시 보도연맹원으로 몰려 학살당할 뻔 했다가 가까스로 학살 위기에서 벗어났다.

선친께선 다른 해양대 동기들과 달리 승선근무를 하거나 기관장을 하지 않았다. 육지 근무를 택했다. 당시엔 해사고등학교가 사립학교였는데 그 곳에서 수학 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 시절 겪었던 일화를 들려주셨다. 수업료를 내지 못한 학생들을 당시엔 교사들이 체벌을 했다고 하셨다. 50년대엔 사립학교 교사들에게 제대로 된 월급조차 지급되지 않았던 시대였으니까. 선친께선 수업료를 내지 못한 가난한 학생을 대신해 수업료를 내주셨고 그 제자는 선장이 돼 나이 쉰 살이 다 될 때까지 선친을 찾아오곤 했다.

해사고등학교 교사생활을 그만 둔 뒤 선친께선 1957년 제주지방 해무청(오늘날 항만관리청)에서 말단 공무원 생활을 시작하셨다. 공무원 생활 내내 업자들에게 뇌물을 받지 않고 정직하게 일처리를 하셨다. 그러다가 박정희 정권과 전두환 정권 시절 두 차례 억울하게 옥고를 치렀다. 한 번은 해상사고로, 다른 한 번은 권력의 부당한 요구를 거절한 탓에 고초를 겪었다. 무죄로 풀려나 다시 항만관리청에 복귀했지만 당시 권력의 부패상에 몸서리를 치셨다.

선친께서 들려준 이야기 가운데 스무 살 나이에 몸소 겪은 한국전쟁 이야기가 기억에 또렷하다. 전쟁 직후 인민군 의용군 소대장으로 징집돼 훈련을 받던 중, 어느 날 눈이 빨갛게 충혈 되자 의용군 중대장이 오늘 부대 차량이 전주 시내로 들어갈 예정이니 병원을 가보라고 했다. 그 차를 타고 가던 도중 중대장은 차에서 내려주면서 선친께 부대로 복귀하지 말라고 하셨다.

그 중대장은 전주북중학교 동기동창이었다. 그 친구는 낙동강 전선까지 갔다가 살아 돌아 왔고 훗날 오수중학교 교장과 전북도교육청 관료로 근무했다고 하셨다. 임실군 관촌면에서 삼계면을 들를 땐 항상 오수역을 통과해 오수면을 지나갔다. 그럴 때마다 선친께선 오수중학교를 가리키며 자신을 살려 준 은인인 그 친구 이야기를 들려주곤 하셨다.

어버지가  몸을 숨겼던  전주 전동성당을 배경으로(출처 : 하성환)
어버지가 몸을 숨겼던 전주 전동성당을 배경으로(출처 : 하성환)

선친께선 부대차량에서 내린 뒤 병원으로 가는 척하다가 전주 한옥마을 경기전 앞에 있는 전동성당 붉은 벽돌을 넘어 성당 안으로 몸을 숨겼다. 며칠 후 전주 경원동 집으로 돌아왔을 때 할아버지는 빨리 시골로 피난가라고 걱정을 하셨다. 그러나 선친께선 전쟁 통이라 시골보다 집이 더 안전하다고 판단하셨다. 그리하여 마당에 땅굴을 깊이 파 그 굴속에서 숨어 지냈다. 국군이 수복할 때까지 거의 석 달 가까이 굴속에 계셨다.

어느 날 완장을 찬 내무서원이 찾아왔다. 그는 소총을 들이대며 땅굴 입구를 쏘아보면서 굴 밖으로 나오라고 소리쳤다. 거의 석 달 만에 굴 밖으로 나온 선친께선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해 있었다. 햇빛을 보지 못한 탓이다. 완장을 찬 채, 총을 들이 댄 내무서원 역시 전주북중학교 친구였다. 선친께선 폐병에 결려 요양 중이라고 둘러댔다. 총을 들이 댄 그 친구는 뒤로 주춤거렸고 그렇게 위기를 넘겼다고 하셨다.

선친께선 시대의 격랑 속에서 살아 온 탓인지 아들이 데모하는 데 나가는 걸 두려워하셨다. 87년 6월 항쟁 당시엔 선친과 격렬하게 언쟁을 벌인 적도 있다. 그러나 어느 날 선친께서 독백하듯이 아들에게 고백하셨다. “지나고 보면 너희 젊은 세대들이 하는 게 옳았다. 우리 나이 든 세대가 빨리 사라져야 좀 더 좋은 세상이 오지 않겠냐?”

2년 뒤 89년 전교조 창립 당시 선친께선 여느 부모님들과 달리 반대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아들의 선택을 지지했고 믿음을 주셨으며 격려까지 해주셨다. “학교는 수용소가 아니라 교육이 이루어지는 공간이니 변해야 한다.”는 사려 깊은 말씀과 함께!

1994년 복직 이후에도, 그리고 2005년 갑자기 췌장암으로 돌아가실 때도 양달섭 선생님 안부를 묻곤 하셨다. 양달섭 선생님은 전교조 창립과정에서 군부독재 정권의 국가폭력에 맞서 앞서 희생된 구로고 해직교사다. 당시 양달섭 선생님은 언론을 자주 탔던 탓에 해직교사의 대명사가 되어 선친께선 양달섭 선생님 이름자를 그때까지 기억하고 계셨다. “양달섭 선생님, 잘 계시냐?”는 말씀과 함께!

하늘에서도 여전히 아들을 믿고 격려해 주시는 아버지가 오늘따라 몹시도 그리운 날이다. 다음 세상에서 아버지를 만나게 되면 가슴으로 꼭 안아드리고 싶다. ‘사랑한다’는 말과 함께!

편집 :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ethics6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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