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 입학 동기…‘민청학련’ 구속
1985년부터 ‘교육민주화운동’ 두차례 옥고
2015년까지 국제교원노조운동 앞장
낙향해 자연농업연구 5년만에 사고사

 

1980년대 중반부터 부부 교사로 ‘전교조’ 참교육운동에 앞장섰던 고 이동진(왼쪽)씨와 부인 표외숙씨가 고향인 전북 남원이 내려다보이는 지리산 정령치에서 함께한 모습
1980년대 중반부터 부부 교사로 ‘전교조’ 참교육운동에 앞장섰던 고 이동진(왼쪽)씨와 부인 표외숙씨가 고향인 전북 남원이 내려다보이는 지리산 정령치에서 함께한 모습

 

묵직한 트랙터가 모내기 할 논을 삶고 있다. 써레질 밭갈이 하던 일소는 사라지고 어느새 농사 중심이 된 저 농기계가 이제 나에게 예사롭지 않은 물건이 됐다.

동진아, 네가 트랙터 사고로 졸지에 우리 곁을 떠나고 벌써 다섯 번 철이 바뀌었다. 너무나 황망한 나머지 동지들이 모여 격식 갖춘 영결식도 챙기지 못하고 보낸 것이 내내 켕겼다.

느닷없이 네 전화가 올 것 같다. “어디 있냐? 나 서울 가는 중인데 얼굴 좀 보자!”

우리가 처음 만난 지 꼭 반세기가 됐구나. 며칠 전 우리 학과 동기들이 모여 50년 전을 회고하는 자리가 있었다. 1972년 유신체제가 선포된 시절에 스무 살이던 청년들이 이제 일흔 살 고개를 넘고 있다. 너를 포함해서 벌써 빈자리가 둘이나 된다. 아무도 먼저 가버린 친구들을 화제에 올리지 않았다. 세월만 무상하겠느냐. 우리 살림살이가 다 그러하다.

대학이 수시로 휴교 조치를 당하고 사는 것이 무척 팍팍하던 시절, 살림이 궁한 나는 군에 자원입대를 하고 너는 과대표를 하다가 감옥에 끌려갔지. 1974년 4월 이른바 ‘민청학련’ 사건이었다. 긴급조치를 남발하며 독재체제를 굳혀 나가던 박정희 정권이 조작한 이 사건에 엮인 너는 15년 형을 선고받았다. 물론 학교에서 제적당하고... 해를 넘겨 2월에 출옥한 너는 구로동에서 노동야학도 하고 난방기술자격증도 따서 '보일러‘ 학원 강사 활동도 했지. 그렇게 유신독재체제가 끝날 때까지 6년 동안이나 학교 밖에서 버텨내야 했다.

1980년 초 ‘서울의 봄’을 맞이했을 때 너는 복학생이 됐고 나는 사립학교 프랑스어 초임교사로 살고 있었다. 1981년 네가 나를 찾아와서 우리가 참 오랜만에 재회했을 때 그 간 살아온 역정을 들려주면서 네가 가르쳐 준 쇼디에르(chaudière 보일러)라는 단어를 생생하게 기억한다. 너는 그 당시 막 시작한 교사운동을 나에게 소개했다. 내가 네 권유로 서울YMCA중등교사회에 참여하게 됐으니 우리 인연은 좀 특별한 거 맞지? 교사들 공개 조직 활동이 탄압받던 엄혹한 시절에 YMCA 교사회는 1980년대 교육민주화운동 초석 노릇을 할 참이었지. 너는 우리 사회에 군부독재 타도 투쟁이 차츰 고조되던 1985년 3월 비로소 교직에 들어섰어. 그 때부터 우리는 교사운동 대열에 늘 함께한 동지로 살았구나.

1989년 5월 28일 우리가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을 결성하고 너는 서울지부 강남동지회장을 맡아서 또 구속됐지. 나는 사실 ‘빵 복’이 많은 너를 좀 부러워했단다. 백 명 넘는 교사를 구속하고 1500명이 넘는 교사를 교단에서 쫓아낸 국가폭력이 일어났던 때였지. 그 해 8월 해직교사 명동단식 농성을 이끌었던 나도 구속됐는데, 11월 초 내 석방 환영회 자리에서 ‘나도 이제 빵잽이들한테 지녔던 마음 부담을 벗게 됐다!’고 했더니 사람 좋은 웃음을 웃으며 환호작약하던 네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벌써 33년이 흘렀구나.

고  이동진 영정 앞에서 
고  이동진 영정 앞에서 

농기계 사고로 비명에 가버린 내 벗 이동진은 재야운동 진영에 발이 넓었습니다. 그 인연을 살려서 전교조 사수 투쟁 국면에서 연대사업위원장으로 활동했지요. 그러다가 1991년 ‘고 강경대 열사 폭력 살인 규탄과 공안통치 종식을 위한 범국민대책회의’에 파견되어 대변인으로 활동했습니다. 그 일로 또 구속되어 징역 2년6월(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습니다. 우리 사회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그는 세 번이나 구속되었습니다.

1994년 3월 전교조 해직교사들이 해직 5년 만에 신규 특별 채용 형식으로 복직했을 때 그는 조직 운영 필수 요원을 자임하여 복직을 미루었습니다. 전교조 본부 국제국장을 맡은 이동진은 많은 나라 교원노조와 국제기구에 정부가 탄압하는 전교조 사정을 알리고 지지와 성원을 이끌어냈습니다. 이런 노력과 경험을 밑바탕 삼아 1995년부터 1997년까지 그의 활동 범위는 국제교원노조운동으로 확대됐습니다.

소련이 해체되고 냉전 체제가 끝나자 1993년에 전 세계 교원노조와 교원단체가 뭉쳐 교육인터내셔널(Education Internationale/EI)이 출범했습니다. 전교조 부위원장 직함을 가진 이동진은 EI 아시아 태평양 지역 집행위원을 역임한 다음 내처 중앙집행위원 선거에 도전하여 뜻을 이루었습니다. 세계 교육계에서 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에 버금가는 직책입니다. 지구 차원에서 활동하던 그는 1997년 전교조가 합법 조직이 되고 나서 1998년 교단에 복귀했습니다. 해직교사 생활 10년 만이었습니다. 이후 서울 언남고, 구정고, 경기기공 등에서 프랑스어와 영어 교사로 일했습니다. 이동진은 서울에서 진보 교육감이 처음 당선됐을 때 정책자문위원회에 참여하여 서울형 혁신학교 정착을 위해 분주하게 뛰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민청학련 사건 관련 재심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습니다.

이동진은 2015년 명예퇴직 하고 먼저 퇴직한 아내를 따라 고향 남원으로 귀농합니다. 이 때부터 그가 관심을 쏟은 것은 생태계와 지구 환경 문제였습니다. 그는 무엇보다 땅을 살리는 친환경농법을 부지런히 배웠습니다. 남원시 아영면 아막산성 아래 넓은 밭을 일구어 감자 오미자 두릅 초석잠을 비롯하여 다양한 친환경 농작물을 재배했습니다. 질 좋은 퇴비와 생태 친화 농약을 연구했습니다. 지리산 친환경자연농업연구회를 만들어 회장을 맡았고요. 지역 농민들과 친환경 고추작목반도 조직하여 도농 상생 교류 통로도 열었습니다.

북촌 한옥마을. 서울시ㅡ남원 간에 맺은 도농상생교류협력사업으로 남원 농민 30여 명 초청했을 때

특히 이동진은 고향 남원이 간직한 역사와 문화를 사랑했습니다. 귀향 직후부터 향토사를 배워가는 동안 남원 동학농민운동을 깊이 공부했습니다. 의욕과 열정이 넘쳐 아내가 옆에서 말리기라도 하면 ‘백세시대에 무슨 그런 소리를 하느냐?’고 큰 소리를 쳤답니다.

이렇게 열심히 살던 내 동무가 퇴비를 나르던 중 트랙터가 넘어져 우리 곁을 영영 떠나버리다니! 엄청난 충격이고 우리 운동에 큰 손실입니다. 이 기막힌 소식을 접한 Fred Van Leeuwen 전 EI 사무총장은 “너무나도 슬픈 소식이다. 오랫동안 나에게 그는 전교조 자체였다. EI에서 그는 오랫동안 전교조의 합법화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전 세계 교원노조로부터 전교조에 대한 엄청난 지지를 끌어내는 데 성공했으며 질높은 교육과 교사들 복지를 위한 투쟁에 그의 삶을 바쳤다.”라며 애도했습니다.

교육인터내셔널(EI) 본부는 2020년 12월 6일 고 이동진 중앙집행위원이 별세하자 애도 성명을 발표했다. EI 누리집 갈무리
교육인터내셔널(EI) 본부는 2020년 12월 6일 고 이동진 중앙집행위원이 별세하자 애도 성명을 발표했다. EI 누리집 갈무리

 

교육인터내셔널(EI) 본부는 2020년 12월 6일 고 이동진 중앙집행위원이 별세하자 발표한 애도 서한. EI 누리집 갈무리
교육인터내셔널(EI) 본부는 2020년 12월 6일 고 이동진 중앙집행위원이 별세하자 발표한 애도 서한. EI 누리집 갈무리

내 오랜 친구 동진아, 지금 이 순간 거리에는 지자체 선거와 교육감 선거 홍보물 천지다. 개중에는 ‘전교조 교육 OUT!’이라고 써 붙인 것도 보인다. 우리가 청춘을 바쳐 펼치고자 했던 참교육 실현이라는 대의와 곽노현 교육감 시절 혁신학교 정책자문위원회에서 헌신했던 네 노고들을 깡그리 부정하려 드는 작태들이 버젓이 벌어지고 있다.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니겠느냐! 네가 아끼는 후배 강신만 선생이 교육감 선거에 출마하여 이런 글귀를 내걸어 대응해주니 그나마 다행이라 할까?

“촌지 거부 운동에서 학교 혁신 운동까지!” “전교조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그대는 학생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주인 잃은 <한결농장>에 지금쯤 오미자 덩굴 기세 좋게 벋어나가고 감자 꽃도 만발했겠다. 홀로 사래 긴 밭 돌보는 사랑하는 평생 동지 표 선생이 허리 펴고 고개 들면 저 멀리 지리산 대맥이 무정하게 흐르고 아막산성 뻐꾸기 하염없이 울어쌓겠다.

 고 이동진씨가 일궈놓은 전북 남원의 한결농장에서 지난 3월 중순 씨감자를 심고 있다.
 고 이동진씨가 일궈놓은 전북 남원의 한결농장에서 지난 3월 중순 씨감자를 심고 있다.
지난 봄 심었던 감자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전북 남원 한결농장의 5월 전경
지난 봄 심었던 감자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전북 남원 한결농장의 5월 전경

* 이글은 지난 5월 31일 한겨레 지면에 실린 글입니다.
* 원문보기 : http:// https://www.hani.co.kr/arti/society/media/1045042.html
 

편집 : 김미경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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