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합니다] 고 박희진님 그리는 박봉우씨의 글

소나무를 유독 즐겨 노래한 고 박희진 시인.
소나무를 유독 즐겨 노래한 고 박희진 시인.

내 연구실 철제앵글 서가 한쪽 기둥에는 색 바랜 신문 조각이 붙어 있었다 . 한 일간지 시단에 실렸던 ‘겨울 북한산’ 이다 . 1987년 말이거나 88년 초라고 써 놓고 물음표를 붙여 놓은 것을 보면 꽤 오래된 것인데, 수차례 연구실을 옮겼음에도 용케도 그 자리에 붙어 남아 있다가, 이제는 수연 박희진(朴喜璡) 선생님의 시집 <북한산 진달래>의 표지 안쪽으로 자리를 옮겨 앉아 있다 .

이불 속에서 새벽에 잠이 깨면
나의 두뇌는 말들의 용광로~
육체의 문은 열릴수록 좁아지고
마음의 문은 열릴수록 넓어진다
묘구다 싶어 벌떡 일어났다

이 묘한 구절이 내 눈과 마음을 끌었기에 지금까지 신문 조각으로나마 간직해온 것이다.

고 박희진 시인의 시 ‘서울 북한산’이 실린 신문 조각
고 박희진 시인의 시 ‘서울 북한산’이 실린 신문 조각

신문에서 우연히 이 시를 읽었을 때 ‘박희진’ 시인은 이 땅의 많은 시인 중 한 사람이겠거니 했다. 그러다 수연 선생을 알게 된 것은 1992년 ‘숲과문화연구회’ 를 시작하면서다. 그때 <숲과 문화> 발행인인 전영우 국민대 교수가 시화집 <소나무에 관하여>를 구해 보여주면서 함께 찾아뵙자고 해서 첫 대면을 하게 되었다. 그 역시 묘한 인연이라고 생각했다.

<소나무에 관하여> 일행시집 (一行詩集)은, 첫 시 ‘한국의 낙락장송 그런 소나무는 서양엔 없다’ 로 시작하여, ‘소나무여 영원해라 늘 푸른 소나무여 나무의 고전이여’ 의 마지막 시로 되어 있다.

수연 선생님은 소나무 시인이다. 1993년 연구회는 ‘제1회 소나무와 우리문화’ 학술토론회를 대관령 자연휴양림에서 2박 3 일로 열었다 . 연일 비가 오는 중에도 많은 회원들이 같이 잠을 자고 먹고 늦도록 이야기를 나눴다. 소나무 줄기의 색은 비를 맞으면 더욱 오묘한 붉은색을 내보인다. 수연 선생님은 그 기간 함께 기거하면서 빗속의 대관령 소나무숲을 즐기셨다. 그날 이후일까? 수연 선생은 당신의 시를 내내 <숲과 문화> 에 싣게 허락하셨다.

2022년은 숲과 문화 연구회 30돌이다. 연구회의 이런 일 저런 일을 생각하면서, 수연 선생님 (1931년 12월~2015년 3월)을 그려 본다. 연구회의 행사인 ‘아름다운 숲 찾아가기’ 를 남한산성에서 열었을 때였다. 수연 선생님이 시 낭송을 해주시기로 해서 함께하였다. 아마도 일흔살 전후셨을 것이니 아무리 편한 남한산성길이라 해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그날따라 몸도 불편해서 힘들어하셨다. 그러나 시 낭송을 하시는 선생님을 보면서 이 분이 좀 전까지 그렇게 힘들어하시던 분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시인의 열정과 힘을 보았다. 예술이란 이런 것일까?

고 박희진 시인의 일행시집 <소나무에 관하여>
고 박희진 시인의 일행시집 <소나무에 관하여>

 

지상의 소나무는 하늘로 뻗어가고
하늘의 소나무는 지상으로 뻗어와서
서로 얼싸안고 하나를 이루는 곳
그윽한 향기 인다 신묘한 소리 난다

지상의 물은 하늘로 흘러가고
하늘의 물은 지상으로 흘러와서 
서로 얼싸안고 하나를 이루는 곳 
무지개 선다 영생의 무지개가

지상의 바람은 하늘로 불어가고
하늘의 바람은 지상으로 불어와서
서로 얼싸안고 하나를 이루는 곳
해가 씻기운다 이글이글 타오른다

’그때 시를 낭송하는 수연 선생님은 한 마리 학이 되어 너울너울 춤을 추시는 것 같았다. 훗날 철원의 겨울 들판에서 단정학 (丹頂鶴) 두루미를 본 순간, 나는 우리 선비들이 왜 그렇게 학을 좋아하는지를 단박에 알게 되었다. 이제 선생님을 뵐 수는 없지만, 선생님은 학이 되어 여전히 우리 곁에 계신다. ‘날마다 즐겁게 살자’는 호일당, 수연 선생님은 진정한 풍류를 구하는 풍류도인이시고, 미국 소설가 너 새니얼 호손 이 그린 ‘큰 바위 얼굴’ 로 우리 곁을 다녀가셨다.

교수로 생활하다 보니 제법 많은 책이 있지만, 아끼는 책 하나를 꼽으라면 시화집 <소나무에 관하여>이다. 내지에 호기롭게 서명한 것을 보면 1993년에 구한 것이다. 이호중의 첫 시에 대한 그림을 판각하여 옛 책의 멋스러운 능화판처럼 찍어 낸 표지와 원그림을 뒤표지에 장식했다. 이 책은 소나무를 찬미한 시와 함께 내가 가지고 있는 아름다운 책으로 기억될 것이다.

원고료를 드립니다 <한겨레>가 어언 34살 청년기를 맞았습니다. 1988년 5월15일 창간에 힘과 뜻을 모아주었던 주주와 독자들도 세월만큼 나이를 먹었습니다. 새로 맺는 인연보다 떠나보내는 이들이 늘어나는 시절입니다. 지난해부터 코로나19 탓에 이별의 의식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기억합니다’는 떠나는 이들에게 직접 전하지 못한 마지막 인사이자 소중한 추억이 될 것입니다. 부모는 물론 가족, 친척, 지인, 이웃 누구에게나 추모의 글을 띄울 수 있습니다. 사진과 함께 전자우편으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한겨레 주주통신원(mkyoung60@hanmail.net), 인물팀(People@hani.co.kr).

* 이글은 2022년 1월 28일 한겨레 지면에 실린 글입니다. 
기사 원문 보기 : https://www.hani.co.kr/arti/society/media/1029155.html 

 

 

편집 : 김미경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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